“하! 잘하는 짓이다, 에드가 라모스! 네 여자가 저 꼴 날 때까지 뭐 한 거야?”
“하나, 나를 ‘누군가의 여자’로 표현하지 마. 둘, 나를 이 꼴로 만든 건 에드가가 아니라 블로썸이야.”
당연하게도, 내가 입에 올린 로즈마리 블로썸의 이름에 즉각적으로 반응한 것은 나돈 쪽이었다.
“로즈 어디 뒀어?”
그가 위협하는 듯한 동작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나도 궁금하다, 야.”
최대한 진심을 담아 대꾸할 심산이었는데, 막상 나간 건 배배 꼬아진 말이었다. 곱지 못한 태도에 곱절은 나쁜 태도로 맞서는 게 내가 가진 불치병 중 하나였던 탓이다.
“뭐?”
“거기까지만 해.”
눈썹을 사나운 각도로 기울인 채 성큼성큼 거리를 좁히던 나돈은 다행스럽게도 내가 쫄아서 주춤대기 전에 멈춰 섰다. 가슴 바로 앞을 가로지르는 멋들어진 지팡이 때문이었다. 이내 느긋한 목소리가 지팡이의 몸체를 따라 구불구불 새겨진 문양을 타고 미끄러져 들어왔다.
“내 주인이 싫어하잖아.”
손잡이를 비틀면 칼날이 튀어 오르는 호두나무 지팡이는 에드가가 강도 버릇을 못 버리고 근처에 너부러진 남자애에게서 빼앗은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떡 벌렸다.
“내가 왜 네 주인이야?”
“내 여자 하기 싫다며. 그럼 내가 네 남자 해야지, 뭐.”
뻔뻔하지만 요망하기 그지없는 대사에 물색없이 부끄러워하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귓불을 주무르던 손으로 스스로의 뺨을 갈긴 다음 에드가에게 매달렸다.
“에드가 막시밀리아노 나돈-라모스, 부탁이 있어.”
“원하시는 대로.”
“어쩌면 카일도 나처럼 공격받고 있을지도 몰라… 걔가 무사한지만 확인할 수 있을까?”
나도 하필 에드가를 붙들어 카일의 안위를 챙기는 행위가 부적절하다고는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걱정은 되고, 연회복 구울들의 표적이 되고 있는 내가 그를 찾아 뛰어드는 건 더욱 큰 위험을 떠안기는 꼴이나 다름이 없는데, 블로썸 때문에 눈이 벌게져 있는 브라이스 나돈은 내 말을 들을 것 같지가 않았으니까.
아주 솔직하게는 내게 말랑한 감정을 지닌 에드가 라모스가 결국 내 바람을 따를 게 뻔해서이기도 했다.
“미안해.”
입 속 연한 살을 깨물며 웅얼거리자 에드가는 지팡이에 달린 칼날로 머리를 긁적이다 말고 나를 빤히 봤다.
“반한 게 죄지, 반한 게 죄야.”
궂은 인상과 오만한 성정으로 정평 난 라모스 공작이지만 실은 그냥 착한 애라는 사실을 새삼 다시 느끼는 게, 절박하게 구는 데다 대고는 차마 신경질을 못 부리는 거 같았다. 에드가가 툴툴거리면서도 순순히 계단을 밟아 사라지자 이제 뿔이 난 것은 그의 형제였다.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가자미눈으로 나를 보던 나돈이 대뜸 지껄였다.
“손 내.”
“왜? 때리려고? 네 입장에서는 열 받을 수 있긴 한데, 어쩔 수 없었던 내 입장도 고려해 주면 안 될까? 그보다 왜 하필 손이야? 네가 내 가정교사라도 돼?”
“지랄하지 말고.”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시도였는데 그럴 기분이 아닌 모양이었다. 입맛을 다시며 쭈뼛쭈뼛 내민 손바닥에 뭐가 툭 떨어졌다. 화려한 디자인의 귀걸이였다. 전과 달리 굵은 루비 알의 어느 부분에서도 영혼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는데, 제 자리를 찾아간 까닭이라고 생각하면 매우 즐거워졌다.
“의외네. 넌 당연히 블로썸에게 귀걸이를 넘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내게로 돌아온 로즈마리 왕비의 귀걸이가 전과 달라진 것은 또 하나 있었다. 한 짝이 아니라 한 쌍이라는 점이었다. 괜히 머쓱해져서 중얼대자 나돈은 대수롭잖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떻게 그래? 네가 내 어머니를 살리고 형제를 구했는데. 그건 네 거야. 이것도 마찬가지고.”
뒤이어 그가 자그마한 쪽지를 건네었다. 그것을 잡아 펼침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일대일로 붙었을 때에 한해, 나는 피츠시몬스 재학 내내 케이트에게 져 본 적이 없어. 내 팔에 돋아난 가시로 너와 그 잘생긴 황자에게 기쁨을 선사할 수가 있다면 못 할 게 어딨겠어?
독거미에게, 사마귀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