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짧게 들이쉰 채 거울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캐노피의 그림자에 묻혀 나를 쳐다보고 있던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네모지게 파인 네크라인을 따라 레이스를 다닥다닥 붙인 드레스와 두꺼운 머리띠로 치장한 브리아나 모슬리였다.
깜짝 놀라 엉덩이를 들썩이는 찰나, 웬 칼이 내 팔이 있던 곳을 지나쳐 거울을 맞추었다. 곧 귀를 찢는 소음을 동반하며 거울이 산산조각 났다.
쨍그랑!
갑작스러운 공격에 정신이 마비된 사이, 브리아나는 천천히 걸어와서는 내 무릎 사이로 떨어진 칼을 주워 들었다. 자세히 보니 그건 브리아나가 항상 베개 밑에 두고 있던 호신용 단검이었다.
잘 갈린 날을 점검이라도 하듯 빛에 비추어 보던 브리아나의 안색은 비가 갠 아침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처럼 어두웠다. 이윽고 그녀가 문득 지껄였다. 정확히는, 브리아나의 몸을 차지한 시스템이.
[치명적인 오류가 VMM+00002F20의 0028:C0003F20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정확히 내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단검을 거울 조각으로 쳤다. 그러자 브리아나의 목소리는 시스템 특유의 음성 합성 장치를 거친 듯한 소리에서 낭랑한 여자애 목소리로 변했다.
“시스템이 네 존재를 용납하지 않을 거야.”
나는 금세 시스템과 함께 브리아나를 장악한 것이 블로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블로썸!’ 화장품과 액세서리, 가발 같은 잡동사니로 쏟아지는 공격을 막다가 소리쳤다.
“너 어디야!”
가슴 위쪽을 밝히기 위해 사용하는 가루를 마구잡이로 뿌리자 브리아나의 얼굴에 반짝이가 왕창 묻었다. 크게 벌어진 입 안도 마찬가지였다.
“너는 이 세계의 근간을 부-이상해-수고 있어. 그런 일은 절대로-머리 아파-일어날 수 없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발화는 아주 매끄러웠다. 마치 목을 울리고 혀를 차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이루어진 듯이 말이다. 다만 하나의 음성에 다른 음성을 덮어씌운 것처럼 군데군데 튀는 부분이 있었다. 얼핏 블로썸도, 시스템도 아닌 브리아나의 목소리와 비슷하게 들려서, 나는 드레스 안에서 검을 꺼내다 말고 멈칫했다.
“아리엘 달튼은 사라져야-아니야!-해.”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브리아나였다! 환희에 차 브리아나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단검을 휘둘렀다.
“브리!”
이름을 부르는 한편 재빨리 손목을 잡아 눌렀다. 그러나 이미 상대를 친구로 상정한 탓에, 내 동작은 날래지도 거세지도 않았다.
너무도 간단하게, 브리아나는 팔을 비틀어 내게서 벗어났다. 그러고 나서는 양손으로 단단히 움켜쥔 단검을 바짝 치켜들었다. 실수했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도망쳐!”
그러나 잠시 뒤 내 뺨을 찌른 것은 칼날이 아니라 날카로운 외침이었다. 찰나 마주친 눈은 빛을 조금도 반사하지 않았으나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팔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나는 그녀가 안간힘을 써서 시스템에 저항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즉시 문간으로 달음질쳤다. 목덜미를 노려 날아오는 거울 조각을 요리조리 피하며 방을 나섰다. 삐걱대는 나무 문짝을 후려쳐 닫고 근처에 놓인 조명 기구와 장식장을 넘어뜨려 막았다. 밀릴 듯 말 듯 덜컥이는 문틈으로 튀어나오는 칼날이 소름 끼쳤다.
꽤나 끈질기게 문을 열기 위해 노력하던 브리아나는 꿈쩍도 하지 않는 문짝에 칼질을 몇 번 하는 듯하더니 끝내 조용해졌다. 숨을 돌릴 말미를 만끽한 것도 잠시, 복도로 난 방문 앞에 나란히 서서 나를 들여다보는 여자애들을 발견했다. 나와 브리아나와 함께 여자 기숙사 4층에 사는 맥마이클스, 혼, 서덜랜드랑 오라일리였다.
“아리엘.”
“달튼은.”
“사라져야.”
“해.”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짠 듯이 지껄이는 네 사람의 목소리 또한 블로썸의 것과 동일했다. 나는 한데 뭉쳐 달려드는 맥마이클스와 서덜랜드의 다리를 걸어 무너뜨린 후 혼과 오라일리가 던지는 물건을 검집으로 쳤다. 브리아나 때는 경황이 없었고, 친한 친구라 방심했다지만 원래 검술은커녕 호신술조차 배운 적 없는 귀족가 영애를 무력화하기란 달튼의 말괄량이에게 식은 수프 마시기였다.
최근 대륙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드레스 디자인이 길고 몸에 딱 붙는 거여서 망정이기도 했다. 나는 4층에 사는 네 사람에 이어 구울처럼 계단을 기어 올라오는 여자애들을 드레스 자락을 밟는 것만으로 쉽게 쓰러뜨렸다.
그런 다음에는 재게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블로썸이 움직였다는 건 나도 맡은 일을 마쳐야 한다는 뜻이었다. 비록 블로썸에게 남은 힘이 내 상상을 아득히 상회한대도, 걔가 나를 찍어 누르기 위해 지극히 끔찍한 방법을 택했어도, 충격에 빠지거나 두려움에 벌벌 떠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건 내게 사치였다.
4층에서 3층으로 가는 건 식은 수프 마시기였다. 3층에서는, 남자 기숙사와 이어진 통로 때문에 좀 까다로웠다. 하지만 내게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여 카일이 쥐여 준 마도구들이 있었다.
모든 마도구가 유용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뚜껑을 열면 광대 인형이 튀어 나오는 상자는 재미를 주는 것 외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짙은 안개를 발생시키는 구슬은 충분히 쓸 만했다. 몸뚱어리만 한 크라바트를 목에 단 페드로 캔트렐이 갑자기 퍼진 안개에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나선 계단의 난간에 매달려 아래층으로 뛰어 내렸다.
2층과 1층을 잇는 계단을 내려가던 와중에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짙은 보라색 드레스를 걸친 중년 여성의 보닛에는 커다란 포도송이 같은 형태로 보석이 달려 있었는데, 그건 그녀가 가장 최근에 들른 남대륙의 유행이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엄마! 왜 벌써…!”
“…….”
“여기 있으면 위험해! 당장 아카데미에서 나가야 된단 말이야! 아빠는?”
[치명적인 오류가 VMM+00002F20의 0028:C0003F20에서 발생하였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엄마의 어깨를 붙잡고 버벅대는 동안 바로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자 머리통 바로 위로 주먹이 날아갔다. 내가 피한 탓에 주먹은 엄마의 옆구리에 바로 꽂혔다. 나는 마나 코어를 빼낸 마법 인형처럼 고꾸라지는 엄마를 붙잡고 계단을 굴렀다.
계단참에 거꾸로 엎어진 내 시야에 드레스 자락이 드리워졌다. 가볍게 살랑이는 실크 천 꼭대기에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랑 많이 닮은 둥근 눈매. 반대쪽에는 휑한 정수리를 가리기 위해 옆머리를 악착같이 올려붙인 남자가 있었는데, 그의 두툼한 입술 또한 내 입술과 비슷했다.
뭐라 호소하려는 찰나 아빠의 손이 내게로 뻗어졌다. 미지근한 감촉이 목에 닿자 나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잊고자 했던 기억이 다시금 눈꺼풀에 달라붙었다. 입천장과 코끝에 피 냄새가 감돌았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발버둥을 치는데, 별안간 강한 마나가 몸뚱어리로 확 끼얹어지더니 두꺼운 결계를 만들었다. 파도처럼 치미는 마나에 나가떨어지는 엄마가 멀찍이 보였다. 다음으로는 검은 후드를 눌러 쓴 남자에게 뒷덜미를 붙잡힌 아빠가.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엄마!”
“이게 무슨 개같은 환영 인사야? 도적이 침입해도 안 이러겠다.”
“안 돼, 에드가! 우리 아빠야!”
“어이쿠, 장인 어르신.”
내 외침에 에드가는 즉시 손아귀에서 타오르던 불꽃을 사그라뜨린 다음 아빠를 정중히 결계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자 부모님을 포함하여 내가 제압하지 않고 지나친 캔트렐 무리, 또 1층을 돌아다니다가 소음에 이끌린 애들이 한데 모여 결계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흡사 구울 떼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뭐야, 대체? 왜 이 많은 사람이 너를 노리고 있는 건데? 나 모르는 사이에 막 반역이라도 일으켰어? 그건 내 선에서 수습이 안 되는데.”
거칠게 후드를 잡아 내린 에드가가 대단하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아니거든!”
매우 억울해져서 해명하려는데, 뾰족한 타박이 득달같이 끼어드는 통에 그러지 못했다.
“야, 할 말 있으면 자리부터 정리하고 해. 나 지금 땀 흘리는 거 안 보이냐?”
말마따나 연회복 입은 구울들이 아우성치는 결계에 기대어 마나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 중이던 남자의 밀색 머리는 폭삭 젖어 있었다. 그제야 에드가가 혼자 피츠시몬스로 돌아왔을 리 만무하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쟤 지금 결계 치느라고 저렇게 된 거야?”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평소의 배 이상 마나를 쓰지 않으면 마법이 안 통해. 공간 이동은 어림도 없고. 아카데미 정문도 겨우 넘었어.”
물량 공세에 장사가 없었으므로, 나돈은 나와 에드가가 끝도 없이 들이닥치는 학생이나 사용인, 가끔 교수를 일일이 기절시키는 동안 줄곧 결계를 쳐 우리를 보호해야만 했다. 에드가 라모스가 대륙에서 두 번째로 강한 원소 마법사인 반면 그의 형제는 방어 마법, 특히 결계술에 뛰어났기 때문이다. 만일 농담의 달 연회에서 마나 감지 결계를 친 게 나돈이었더라면 나는 진작에 들켰을 게 분명했다.
입이야 험해도 나돈이 마나를 다루는 방식은 꽤나 부드러웠으며 끈질겼다. 그의 결계는 여자 기숙사 로비에 연회복의 산이 쌓인 뒤에도 한참이나 멀쩡함을 과시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눈을 부라리는 나돈에게 양 엄지를 치켜올려 화답했다.
“이제 너희들의 의문을 해소해 줄게. 반역이라 하긴 뭐하지만 비슷한 짓을 저지르긴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