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71화 (171/178)

정말 쏜살같이 시간이 갔다. 내 생각에 쇠뇌를 기가 막히게 다루었던 신화시대의 악마 사냥꾼 군발트도 그보다 빠른 화살은 못 쏠 거 같았다. 영문도 모르고 과일 펀치에 얻어맞던 게 방금 있었던 일처럼 생생한데, 정신을 차려 보니 졸업 연회가 채 하루도 안 남은 시점이었다.

밤에, 카일이 찾아왔다. 추운지 부리를 딱딱 부딪치는 그리폰과 함께였다. 이번에는 창문 닫기를 잊지 않고 그리폰의 등에 올랐다. 추위에 약한 범생이가 등장하는 농담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스태포드 교수의 온실 앞이었다.

우리를 발견하고 으르렁거리던 삼두견은 카일이 풀어 놓은 가짜 나비의 현란한 움직임에 혼이 쏙 빠졌다. 색유리와 합성 소재로 꿰어진 날개 사이에 은으로 된 태엽이 박혀 있었는데, 밤이 되어 활발해진 픽시들이 어찌나 열심히 감아 대는지 앞으로 두 시간은 너끈히 날아다닐 기세였다.

온실의 문을 열기 전에 루이사에게 육포를 건네었다. 콧김을 뿜으면서 흥분하는 그리폰의 두툼한 발볼록살을 만지작대다가 대뜸 내뱉었다.

“올해 초에, 같이 왔었잖아.”

“그때는 라일라였지.”

루이사는 라일라보다 늙은 그리폰이어서, 턱에 난 털이 다소 빳빳하고 색이 옅었다. 손으로 슬슬 빗질하니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치켜드는 모습이 귀여웠다. 다른 손으로는 카일의 턱을 간질였다가 손끝을 아프지 않게 물렸다. 이것도 귀여웠다.

키득거리며 발을 옮겼다. 스태포드 교수는 삼두견을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온실 자체의 보안에는 신경 쓰지 않았는데, 덕분에 우리는 전과 완전히 동일한 마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손쉽게 침입에 성공했다.

어쩌면 그녀의 온실이 최고의 마법 정원 트로피가 무색하리만큼 초라해진 탓일 수도 있었다. 대부분의 꽃 화분이 줄기만 듬성듬성 남은 상태였는데, 메이나드의 관을 장식하기 위해 꺾인 게 틀림이 없었다. 불현듯 울적해져서 우두커니 있으려니 이빨 달린 분홍색 은방울꽃을 건드리던 카일이 말을 걸어왔다.

“여기서, 네가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해?”

솔직히 기억이 안 났다. 멍청한 표정이나 짓자 카일은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고 검지로 머리카락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카일의 빨간 머리는 너무 짧은 나머지 손가락에 반도 감기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 우스꽝스러운 몸짓이 함의하는 바를 금세 짐작했다.

“너 지금 내 흉내 내는 거야?”

“‘사랑하는 사람 생기면 털어놓기로 했잖아.’”

“야, 하나도 안 똑같거든!”

팔짱 끼고 따지자 카일은 한참 낄낄거리더니 내 말을 따라 하는 동시에 뽀뽀를 쪽쪽 했다. ‘야’라고 부를 때 이마에, ‘하나도’를 발음할 때 눈썹뼈에, ‘똑같거든’하고 외칠 때 눈두덩이랑 뺨 근처에 한 번씩.

마지막에는 나도 모르게 끙끙거릴 만큼 입술이 깊게 맞물렸다. 키스해 본 경험이 많은 게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는데 엄청 능숙한 거 같았다. 어쩌다가 엄청 능숙해진 건지를 추측하다 보면 사뭇 묘해졌다. 카일은 거의 영원히 5학년을 반복했고… 스스로도 인정할 정도로 ‘다양한 가능성’을 접했다.

“집중 좀 하시지?”

“아!”

딴 데에 정신이 팔린 것을 눈치챘는지, 카일이 내 윗입술을 애교 삼아 깨물었다. 찌릿한 감각에 깜짝 놀라 그의 가슴을 밀어내었다가 도리어 확 잡아끌렸다. 목덜미로 부드러운 감촉이, 턱으로 바다 내음 섞인 열기가, 귀 뒤로 키스보다 끈적한 목소리가 달라붙었다.

“언제까지 기다리면 돼?”

은근히 등허리를 쓸어내리는 손길마저 노련했다. 복잡한 머릿속에 여러 이름이 떠올랐다. 학생회까지는 아니어도 주목받는 인물이니만큼, 카일도 심심치 않게 묘한 소문에 휩싸이곤 했다. 크리스타 에드워즈 같은 경우가 한 번만 있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산뜻한 체를 하고 싶었다. 이제 와서, 하필 내가 거듭해서 거절했던 카일에게 구질구질하게 구는 건 진짜 멋없었다. 근데 감정이라는 게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나는 맞닿은 채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무시하려고 노력하며 약간 툴툴거렸다.

“내일까지만….”

지껄이던 와중에, 별안간 꿈에서 깬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빈 꽃대를 붙잡고 뱅글뱅글 도는 픽시에게 무심코 눈이 간 까닭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온실의 유리 천장 너머로 반짝거리는 글자를 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플레이어’의 시간을. 또 팔을 뒤로 하여 더듬어 잡은 손등은 흉한 상처로 울퉁불퉁했다.

“내일이면 다 끝날 거야.”

다짐하듯 덧붙이자 카일은 포옹을 풀어내고 살짝 물러났다. 그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지금 당장도 끝낼 수는 있어.”

“못 한다는 거 알잖아.”

“알지…. 내가 널 왜 사랑하는데.”

장난스러운 말투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카일은 블로썸과 함께 생존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로 인해 우리의 계획에 생겨난 불확실성을 꺼리는 편이었다. 끝내 블로썸을 살릴 방법을 고안한 것도, 나를 못 이겨서 울며 먹은 겨자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더구나 나는 아직도 모든 증표를 모으지 못했다. 성녀 에이레네의 묵주는 이미 블로썸에게 갔을 테니까 차치하고, 한때 내 손아귀에 들어왔던 로즈마리 왕비의 귀걸이조차 말이다. 원래 같았으면 나돈 쌍둥이는 지금쯤 아카데미로 돌아왔어야 하지만 로즈마리 왕비가 참전하여 계승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탓에 짬을 내기가 여의찮아졌나 보다.

내일은 게임이 우리에게 허용하는 최후의 날이다. 게임의 공략 대상이니만큼 적어도 연회장에서는 에드가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으나, 그러지 못하는 경우 무조건 ‘플레이어’의 시간이 끝나기 전에 물레를 부수어 버리기로 약속한 바가 있었다. 나는 카일의 웃옷 주머니를 장식한 무언가를 막 발견한 것처럼 굴며 딴청을 피웠다.

“겨우살이가 있네.”

빨간 열매 다섯 개가 달린 겨우살이 가지를 머리 꼭대기까지 집어 들었다. 살짝 흔들어 주의를 끌었더니 카일은 짜증 난 것처럼, 하지만 귓불을 빨갛게 물들이고 말했다.

“키스해 달라는 소리야? 진짜 예뻐서 봐주는 줄 알아.”

머리털이 바짝 서는 입맞춤이었다. 근래에 나와 카일은 진짜로 눈만 마주치면 붙어먹기 바빴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고의 친구처럼 굴었던 남자애와 나누기에는 도무지 익숙해지기 어려운 접촉이었다. 마베릭이나 코넬리아 빌라드한테 들키면 평생의 놀림거리가 되고도 남을 짓이기도 했다.

불안과 불만을 쾌감이 깡그리 집어삼켰다. 카일과 손을 잡거나, 그의 등을 안거나, 입술을 마주 대면 기분이 너무 좋아져서 그 외의 모든 것은 문제가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발뒤꿈치를 들고 코가 부딪치지 않도록 고개를 비틀면서, 어쩌면 중독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최후의 날이라고 언제나의 졸업 연회와 엄청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다. 여자 기숙사는 어김없이 붐볐는데, 사용인이야 그렇다 치고 귀족의 수가 유의미하게 많았다.

졸업 연회에 졸업생의 가족이 나타나는 건 당연했으나 꼭두새벽부터 기숙사를 들쑤시는 건 이상했다. 아무래도 메이나드 사건의 여파는 내 판단보다 큰 모양이었다.

달튼 상단 무역선의 입항 예정일은 어제였다.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외동딸의 소꿉친구이자 남친을 위한 선물 상자를 건네어 받는 건 일러야 저녁이라는 소리다.

또한 브리아나는 졸업 연회 초대장을 한 장도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치장을 하는 내내 복도에서 벌어지는 별별 소란들로 귀를 달구어야만 했다.

졸업 연회 날에, 나는 보통 허리를 꽉 조인 뷔스티에 탑에 소매와 치맛단이 풍성한 진녹색 드레스를 입었다. 머리에는 촌스러울 정도로 많은 보석 핀을 꽂았으며 투명하게 비치는 원단으로 가느다란 리본을 묶어 작은 꽃 몇 송이와 같이 발목에 달곤 했다.

오늘은 완전히 반대였다. 거추장스러운 액세서리는 일절 걸치지 않았고 가슴 바로 아래서부터 넉넉하게 퍼지는 치마 안에는 굽이 납작한 구두와 허리에 매는 가방, 검 한 자루를 숨겨 두었다. 연회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누구일지, 혹은 무엇일지 몰라도, 나를 달가이 여길 확률은 거의 없었다.

처음에 내가 수수한 디자인의 미색 드레스를 입겠다고 선언했을 때 깜찍이 파티마는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듯이 오열하였지만, 기특하게도 쿠키 두 개에 기운을 차렸다. 드레스 같은 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멋진 머리 모양을 만들어 주겠노라고 장담에 장담을 했다.

내 버릇 중 하나는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이어서, 세계를 구하지 않는 경우에도 내 머리 모양은 공들인 만큼 유지되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생각한 바를 곧이곧대로 내뱉어서 파티마를 실망시키지는 않았다. 눈치 없고 자의식 강한 마르퀴즈 볼턴이나 산통 깨기 전문가처럼 굴기 마련이었는데, 걔도 2학기 들어서는 정신을 차렸는지 잘 안 그랬다.

드레스 같은 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멋진 머리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 파티마는 새끼 딱새의 다리보다 가느다랗게 내 머리카락을 쥐었다. 그런 다음에는 촘촘히 땋기 시작했는데, 여간 품이 드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파티마의 집중을 흐트러뜨리려고 웃긴 표정을 짓는 짓거리에 금방 질려 버렸다.

거울에 비치는 얼간이 같은 여자애는 곧 졸음을 참는 여자애가 되었다. 졸음을 참는 여자애는 참지 못하는 여자애가 되었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주변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아무도.

기숙사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또한 방 안은 깜깜했고, 아주 조용했다. 그건 내가 겪은 어떤 졸업 연회와도 달랐다.

더구나 공기 중에 섞인 마나의 흐름이 지나치게 묵직했던 것이다. 손끝을 밝혀 간이 조명으로 쓰는 마법을 사용하려다가 몸속의 마나가 땅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에 그만두었다. 여간 기이한 상황이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