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70화 (170/178)

나도 가방을 뒤져 과자 봉지를 꺼냈다. 원래 졸업 시험을 마친 5학년은 학생으로서의 어떤 도리도 따르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저기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모리스 스위니만 해도, 실습용 세공 도구들로 탑이나 쌓고 있지 않은가.

카일 빌라드처럼 교수의 추천서가 필요한 애들이나, 브리아나 모슬리 같은 지독한 범생이가 아니고서야 수업 같은 건 안 들었다. 나는 탤론 시청 채용 예정자가 거짓말을 간파하는 번개 장갑을 제작하는 동안 그의 주둥이에 과자를 물리어 주며 응원했다.

평민의 실수로 귀족이 둘이나 봉변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로썸에 관한 소문은 아카데미를 나서며 지극히 축소되었다. 그건 블로썸이 일레스티아의 철권 황제가 특별히 아끼는 재원임을 고려하고도 꽤나 드문 경우였다. 월시 소동에 이어 블로썸 사건을 마무리하기 위해 아카데미장 마담 바틀렛이 얼마나 발품을 팔고 있을지 상상도 안 됐다.

그리하여 일부 저학년 애들만이 겁에 질리거나 부모에게 이끌려 피츠시몬스를 빠져나갔다. 나머지 학생은 나처럼 안부를 묻는 편지나 왕창 받고 말았다. 사안이 중대한 탓인지, 생각지도 못한 인연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예를 들어 스펜서 공작 부인은 아들의 병약한 여자 친구가 받았을 정신적 충격을 심히 염려했다. 나는 향수를 뿌린 편지지에 내가 얼마나 건강한지 빼곡히 적다가, 혹시라도 다른 자선 연회 초대장을 받을까 봐서 하루에 두 번씩 기절하는 중이라고 썼다.

달튼 영지 경영 대리인 뎀시 준남작의 편지는 안 읽느니만 못했다. 뎀시 준남작은 달튼 자작 부부가 그의 조언을 따라 못된 망아지 같은 외동딸을 신학교에 처넣었어야 했다고 한탄을 금치 못했는데, 걱정하는 건지 아닌지 되게 헷갈렸다.

선 넘는 유머 감각의 희생양이 되었던 아놀드 삼촌과 주디스 또한 내 방에 날다람쥐 집배원을 보냈다. 특히 주디스는 아직도 스펜서 공자가 악마라고 굳게 믿었는데, 걔의 열 장이 넘는 편지 대부분이 구마 예식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오해를 풀어 줘야 하나 싶어서 상담을 했는데, 제이든은 오히려 주디스의 호들갑이 되게 재미있다고 느낀 듯했다. 나는 제이든이 시키는 대로 평범한 답장을 거울에 비춰 썼다. 뒤집어진 글씨는 악마 숭배자의 표식이나 다름이 없었다.

창가에 편지의 산이 쌓인 것을 제외하면 특별할 것 없는 며칠을 보냈다. 여러 사건의 중심인 블로썸이 사라진 탓에 나도 피츠시몬스도 갈피를 잃고 말았다. 카일의 계획에는 블로썸의 존재가 필수적이었으므로, 흐르는 시간에 비례하여 내 신경은 조금씩 마모되어 갔다.

아무리 시스템이 나를 주인공으로 인식한다고 해도 내 본질은 배경 인물이었다. 블로썸처럼 아카데미를 뜻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카데미나 일레스티아 황실이 걔를 발견하길 바라며 흑마법 제단에 염소 꼬리를 올리는 것뿐이었다.

불안하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나와 달리 카일은 꽤나 태평하게 굴었다. 블로썸이 아예 다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 아니라면, 졸업 연회 전에는 싫어도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했다. 걔의 계산에 따르면 하늘에 뜬 숫자가 0이 되는 게 바로 그날이었다.

그래서 게임의 서브 캐릭터 카일 빌라드는 지극히 평소대로 살았다. 공시 2차에 합격한 밀루아 애들을 모아서 면접 준비를 했다. 탤론 시청 인사과에 지인이 있다는 드와이어 교수한테 한껏 알랑거렸다.

맨날 하는 실없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마침 핫 초콜릿의 계절이 되었으므로 마시멜로 동물 경주를 열기에 딱 좋았다. 카일이 특히나 공들여 마법을 건 마시멜로 사자에게 세 번쯤 들이받히고 나니 게임의 배경 인물 아리엘 달튼에게도 억지로 연말 기분을 즐길 마음이 생겼다.

기나긴 역사와 전통을 지녔으니만큼, 피츠시몬스에는 다양한 전설이나 괴담이 있었고 각자 최고로 꼽는 것이 달랐다.

이를테면 나는 예배당에 조각된 어떤 천사의 왼쪽 유두가 실은 땅콩을 무제한으로 공급하는 버튼이라는 이야기가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또 브리아나는 보는 눈이 없으면 걸어 다닌다는 케이틀린 대제 동상을 무서워했다. 하지만 개중 가장 유명한 전설이 ‘흰 수염 리로이’라는 사실에는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었다.

흰 수염 리로이는 배가 불룩 나오고 수염을 무릎까지 기른 노인이었다. 듣자 하니 수십여 년간 유급한 끝에 노환으로 아카데미에서 생을 마감한 멍청이의 유령이라는데,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퍽이나 애틋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매년, 졸업 연회를 보름가량 앞둔 시점에, 무지막지하게 키가 큰 전나무가 광장에 돌연 나타났다. 그러면 이제 졸업을 앞두고 범람하기 시작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소원이랍시고 풀어 놓은 쪽지들이 나뭇가지에 매달리곤 하는 것이었다. 꼭대기와 가까울수록 리로이가 소원을 이루도록 도와줄 확률이 높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블로썸 덕분에 출범과 동시에 위기를 맞은 새 학생회는 한껏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고자 헌 학생회와 다른 방향으로 동분서주하는 중이었다. 켄드라가 리로이 분장을 하고 전나무 근처를 배회하게 된 이유였다.

“나 때는 말이야, 고소 공포증에 시달리는 선배를 위해 후배가 막 저 끄트머리에다가 쪽지를 꽂아 주고 그랬는데.”

“신화시대에도 종이가 있었어요?”

배 나온 노인 꼴이 완전 안 어울리는 켄드라의 농담이야말로 선을 넘는 것이었다. 나는 정색을 하고 쏘아붙였다.

“당연히 떡갈나무 잎에다 썼지. 잔말 말고 올라가지 못해?”

그러자 켄드라는 낄낄거리며 사다리에 발을 걸었다. 사다리 제일 위층에서 발돋움까지 하여 내 쪽지를 집어 던진 뒤에는 즉시 다른 애의 쪽지를 받으러 갔다. 머리카락보다 긴 수염을 나풀거리며 뛰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가련했다.

혀를 차는 사이에 쪽지를 매달 만한 곳을 찾으러 나무 주변을 돌고 오겠다던 브리아나가 나타났다. 소원 뭐라고 적었냐고 하기에 엄숙하게 답했다.

“세계 평화.”

그러자 브리아나는 아주 환장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진심인데 말이다. 매우 억울해져서 해명하려다가 어차피 이해를 못 시킬 걸 알아서 말았다. 영웅은 참으로 외로운 법이구나.

대신 얼마나 굉장한 소원을 빌었기에 뻐기느냐고 물었다. 다른 애들 거도 궁금해서 슬쩍 봤는데(덕분에 브레넌이 결혼식에서 기어코 세레나데를 부를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브리아나의 소원 쪽지는 글씨가 너무 빽빽해서 읽기가 어려웠다.

“‘겸손한 폴룩 만 멋쟁이들’에 자리 마련해 달라고 썼어?”

여름 방학을 달튼 저택에서 보낸 것이 브리아나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친 듯했다. 그녀는 내가 경험한 다른 5학년에 그랬던 것처럼 황금알 낳는 오리의 재력에 기대어 흥청망청 살거나, 베넷 후작 부인의 수다쟁이 시녀로 돌아가는 대신 상단에서 일하고 싶어 했다.

내가 봤을 때 브리아나처럼 명석한 회계사라면 충분히 ‘겸손한 폴룩 만 멋쟁이들’에서도 탐을 낼 만했다. 달튼 상단 같은 영세업자의 개인 상단과 달리, ‘겸손한 폴룩 만 멋쟁이들’은 일레스티아 최고의 상인 길드가 운영하는 상단으로 규모가 다른 데랑 비교도 안 되었다.

“말 안 해.”

캐묻자, 브리아나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젓기나 했다. 턱을 쓰다듬으며 다음 가능성을 재고했다.

“커크패트릭이랑 잘되게 해 달라고 썼어?”

스테판 커크패트릭은 기어코 나를 닦달하여 내 룸메이트의 자비를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 다행히 기분 전환 삼아 나간 데이트에서 새로운 낭만을 발견한 브리아나는 요사이 동면을 준비하는 날다람쥐 집배원보다 바빴다.

“아니야!”

“그럼?”

내 생각에 열아홉 여자애가 소원 쪽지에 적을 만한 내용은 진로와 연애 고민 외에 거의 없었고 그래야 맞았다. 세계의 이치 어쩌고 하는 문제에 휘말리지 않았더라면, 나부터도 마베릭 빌라드의 기억 속에서 그 거지 같은 연서를 지워 달라고나 빌었을 것이다.

의아하여 되묻자 브리아나가 인상을 잔뜩 구기고 대꾸했다.

“너, 너를 용서해 달라고 썼어. 내 말은, 유독 너에게 사건이 많았잖아. 마치 스티아께서 올해 갑자기 너를 미워하기로 결심한 것 같이.”

“브리….”

“비록 네 믿음이 두텁지 않아도… 상당히 얄팍해도. 가끔은, 실은 자주 신성 모독자처럼 굴어도… 그건 일종의 죄이지만, 그래도….”

“…….”

“나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단 말이야. 그러니까….”

울먹거리는 브리아나에게 옮기라도 한 것처럼 눈가가 시큰해졌다. 나는 브리아나를 꼭 껴안고 그녀의 착한 심성처럼 부풀어 오른 곱슬머리에 고개를 박았다.

진심이 전해지기를 바랐으므로,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장난처럼 흔들거나 뱅글뱅글 도는 짓은 안 했다. 내 선택으로 최대한 많은 사람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다시금 확고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