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표? 왜?”
“로그아웃이 가능한 건 주인공뿐이야. 물레바퀴를 돌려 3월로 돌아갔을 때 시스템이 본래대로 블로썸을 주인공으로 인식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증표를 넘겨서라도 걔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야 해.”
“하지만 시간이 돌아가면 증표도 다시 얻어야 되는 거 아냐?”
“물레의 영향을 받는 건 게임뿐이야. 마녀의 길, 그러니까 터미널은 게임으로 인식되는 공간이 아니어서, 만약 시간이 돌아가는 순간 증표를 거기 둘 수만 있다면 무리 없이 증표와 함께 3월로 돌아갈 수 있어.”
카일이 점토 아리엘을 툭 치자 걔가 망토에서 완두콩 크기의 티아라를 꺼내더니만 점토 블로썸에게로 갔다. 발을 구르며 성질을 부리는 점토 블로썸에게 티아라를 씌워 주니 간이 물레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질렀다. 주인공이 두 번이나 바뀌었기 때문인 듯했다.
그때 커다란 주먹이 간이 물레를 내리쳤다. 안 그래도 삐걱거리던 물레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야, 뭐 해!”
소스라치게 놀라 매달리자 카일이 턱으로 점토 블로썸을 가리켰다.
“잘 봐.”
사뭇 무거운 목소리에 더 따지지 않고 점토 블로썸에게 집중했다.
찰나였다. 정말 눈 깜빡할 사이라고밖엔 할 수가 없었다. 간이 물레의 마지막 남은 부분이 아예 가루가 되었을 때, 점토 블로썸의 근처에서 아주 자그마한 반짝임이 있었다. 걔는 잡아 뜯기라도 할 기세로 그걸 눌렀고… 바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가 바라던 대로.
“기회는 딱 한 번이야. 물레가 완전히 소멸하는 순간. 몇 번을 확인해 봐도 결과는 같았어. 그때가 아니면 로그아웃 버튼은 결코 활성화되지 않아.”
“내 존재가 게임을 꼬아 버려서 로그아웃 버튼이 비활성화된 거니까, 나를 도로 삭제했을 때도 로그아웃할 수 있게 되는 거잖아. ‘결코’는 아니지.”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기어이 나 미치는 꼴 보려고?”
그냥 정정해 준 건데 되게 예민하게 나왔다. 나는 머쓱해져서 실실 웃다가 엄숙하게 표정을 굳혔다. 졸업 연회 날까지 모아야 하는 증표를 어떤 개자식에게 빼앗긴 참이라는 사실이 기억난 탓이었다.
“야, 이리 와 봐.”
진지하게 의논하고자 하여 카일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허리를 붙잡고 입을 맞춰 왔다. 따끈따끈하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감싸 안으며 하여간 틈을 보여선 안 되겠다고 느꼈다.
***
볼과 입술이 부르튼 채 발을 재촉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카일은 그게 반투명 네모들의 이름이라고 했다-를 통해 가늠한 시간상으로는 그리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마녀의 길로 들어서기 전에 내 발목을 물고 안 놓던 글자 뱀은 어디로 가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나 나의 목적지는 ‘선택지’가 종용하던 세 군데의 장소 중 하나였다. 본관 건물을 끼고 돌아 별관 사잇길로 향하면서 괜스레 벅찬 가슴을 손으로 내리눌렀다.
간만에 중정의 나무 벤치에 앉은 켈란을 봤다. 여전히 아름답고, 우아하며, 살짝 꼰 다리 위에 팔꿈치를 얹은 채 턱을 괸 모습이 어찌나 성스러운지 전신에서 광채를 뿜어내는 듯했다. 이른 아침의 햇살을 받아 아른거리는 미남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아쉬워졌다.
“아직도 너를 믿지 않아.”
입맛을 다시는 소리만 듣고도 나라는 것을 알았는지, 켈란이 왼편에 심긴 동백나무를 쪼는 빨간 부리 새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운을 떼었다. 나는 그의 앞으로 가다 말고 약간 주춤거렸다.
“로즈는 이상한 마법과 사랑의 묘약으로 내 감정을 가로채려 들었지. 나는 내 꿈에 등장하는 ‘아리’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 왔어.”
부지불식간에 감탄사가 튀어 나왔다. 그가 방학이 지나자 나를 밀어냈던 이유를 그제야 짐작한 까닭이었다. 아무래도 꿈이 되어 나타나는 켈란의 뒤섞인 기억은 내가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 다녀올 때마다 갱신되는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당연했다. 내가 거기로 넘어가서 만들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던 기억이었으니까. 말하자면 그의 과거와 나의 미래가 이어져 있었다는 거다.
점차 선명해지는 ‘아리’에 관한 꿈. 감정. 동시에 보다 명확한 형태로 뻗어오는 블로썸의 마수. 그것들이 켈란으로 하여금 불신의 벽을 쌓도록 만들었음이 틀림없었다. 내게는 그를 향한 마음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말이다.
엇갈려도 이렇게 엇갈릴 수가 없었다. 입술을 감쳐물고 울컥 치솟는 쓴맛을 혀로 눌렀다.
“그럼에도 널 사랑해.”
‘누구보다 정숙한 숙녀를 위한 꿈 인형’을 통해서나 듣던 세 음절의 문장을 발음하면서, 켈란은 고개를 돌려 나를 정확히 응시했다. 꿰뚫 듯하는 금색 안광에 어깨가 흠칫 떨렸다.
“내가 졌어, 아리엘 달튼. 네가 로즈처럼 어떤 목적을 지니고 나를 조종하려 하든 아니든 상관없어. 오히려 조종해 주기를 바라고 있지.”
“…….”
“진심으로… 이렇게 비참한 기분은 처음이야.”
그가 도로 눈을 내리깔자 아기 천사가 쥔 하프의 현처럼 가지런한 속눈썹 아래로 얕은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부둥켜안고 싶어질 만큼 애처로운 모습에 탄식이 절로 나왔다.
문득 여러 상념이 들었다. 만일 내가 조금 더 끈질겼다면 어땠을까. 혹은 켈란이 조금 더 솔직했다면 어땠을까. 나로 인해 비참해졌다는 고백을, 조금이라도 일찍 들을 수 있었더라면.
하지만 전부 가정에 불과했다. 그러한 가정에 기대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엇갈릴 수밖에 없는 이유였고. 나는 목을 가다듬고 일부러 똑똑히 지껄였다.
“미안한데, 나… 남친 있어.”
말하는 도중에 불현듯 걔랑 서로 어떤 사이 하자고 정리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으나 아무튼 단호하게 굴었다. 그러자 켈란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말끔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게도, 울며 매달리던 때보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띤 지금 켈란이 더욱 무르고 약하게 보였다. 내 생각에 그가 얼굴에 가면을 덧씌우는 이유는 찰나의 취약성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기다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냐.”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켈란이 문득 내뱉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였다.
“꿈속에서, 나는 네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꿈에서 깨고 나서도… 아침마다 여기에 있었잖아. 누굴 기다리는지도 모르면서, 막연한 그리움만 가지고.”
길쭉한 손이 벌레 먹은 나무 벤치를 연신 쓸었다. 굉장한 보물을 더듬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잘 다듬어진 손끝에 먼지 조금과 쓸쓸한 색상의 낙엽 두어 장이 걸렸다. 그걸 조금 보다가, 발끝을 안으로 모은 채 웅얼웅얼 되뇌었다. 사랑한다고. 켈란 일레스티아가. 나를…
“그 말을 간절히 듣고 싶은 순간이 있었는데.”
뭐가 어찌 되었든 내 심장 반쪽은 이미 타 버렸고 나머지 반쪽은 나의 ‘남친’에게 쥐여 주었다. 켈란이 얼마나 오래 기다리건 간에 내가 돌려줄 반응은 정해져 있다는 뜻이었다. 따끔거리는 입술을 매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평생 기다려야 할 거야.”
나름대로는 마음 독하게 먹고 내던진 거절의 말인데, 켈란의 귀에는 개 짖는 소리만도 못하게 들리나 보았다. 그가 선선히 대꾸했다.
“이번 기회에 인내심이나 길러 보지, 뭐.”
***
갑자기 벽으로 변해 버린 것처럼 거절을 거절하는 켈란과 이야기한 후에 기숙사로 돌아와 눈을 붙였다. 2학기에 나는 1학기에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으므로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하는 수업이 없다는 소리였다.
대충 두 시간쯤 죽은 듯이 잤다. 일어나 보니 침대 머리맡에 웬 가방이 굴러다녔다. 졸업 선물을 배달하는 날다람쥐 집배원이 실수라도 했나 싶어서 열었다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가방이라기보단 거적때기를 대충 꿰맨 것에 가까운 주머니 속에, 무려 스티아 신의 티아라가 들어 있었다.
진짜로 잠이 확 깼다. 화장대에 거의 엎드려 곱슬머리를 펴는 중이던 브리아나에게 누가 왔다 갔냐고 물었는데, 당연하겠지만 유의미한 답을 듣지 못했다. 황당해져서 멍을 때리고 있다가 가방 안에 갈무리했다. 어쨌든 나한테는 이득이었다.
며칠 뒤 마도구 제작 실습 교실에서 비로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깨달았다. 내 실습 테이블에 자연스럽게 앉은 켈란 일레스티아의 잘빠진 얼굴 여기저기가 보기 좋은 상처투성이였다. 도무지 참견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어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집안싸움을 좀 했다고 그랬다.
내 생각에 일레스티아 황실에서 괜한 일로 집안싸움을 할 거 같지 않았다. 그걸 집안싸움이라고 해도 되는지 몰랐고.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는 마음보다 궁금증이 커서 목을 쭉 뺐다.
“괜찮아?”
인사치레로 묻자 켈란은 아파 죽겠다며 불쌍한 척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나서는 귓가에 스치는 실바람 같은 소리로 어머니에 대해서는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속삭였다. 기함을 하여 입을 틀어막았다. 짐작대로 브리아나 몰래 내 침대맡에 다녀간 불청객은 얘였나 보다.
허락도 안 받고 숙녀의 침실을 막 오가는 법이 어디 있냐고 따지기 전에 다른 용건이 생겼다. 일레스티아의 성기사와 케이틀린 대제에게서 황실의 보물을 빼앗는 과정이 여간 지난하지 않았으리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켈란이 다치길 바란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들이 얼마나 만만치 않은 상대인지를 떠올리면 더 큰 희생이 없었다는 건 매우 의외였다.
그러고 보니 마르퀴즈 볼턴은 이번 주 내내 수업에 결석했다. 막연히 블로썸을 찾아 헤매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들으니까 이제 진짜 걱정이 된다, 야. 정말 괜찮은 거야?”
이번에 켈란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그가 목을 울려 조금 웃고는 농담했다.
“안 괜찮다고 하면, 가엾게 여겨 줄래?”
상상도 못 한 반응에 말문이 막혀 뚝딱거리는 사이 근처에서 인기척이 났다. 목덜미가 근질거린다 싶어서 돌아보니 웬 손가락이 볼을 푹 찔렀다.
“아이, 씨.”
나는 소파 귀퉁이와 용맹하게 맞서는 릴루처럼 카일의 손등을 찰싹 쳤다.
“결혼식 축사에 넣을 농담은 나한테 검토를 받으라니까. 아리는, 난 얘의 유머를 사랑하지만 가끔 웃기려는 욕심에 선을 넘곤 하거든.”
“왜 시비야?”
어깨를 마구 들썩여 거기에 놓인 팔뚝을 밀어내면서 성질을 부렸다. 그러자 카일은 내 선 넘는 유머 감각을 규탄하기 시작했는데, 최근에 그의 뒷목에 잇자국을 남겨 면접관에게 웨어울프라는 오해를 받게끔 만든 일을 예로 들었다.
사촌 자매 주디스 그린의 생일 연회 사건도 있었다. 아놀드 삼촌의 대머리를 점술사의 수정 구슬에 빗대어 문지른 건 솔직히 너무했으므로, 나는 조개처럼 입술을 딱 붙이고 잠자코 있었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켈란은 눈꼬리를 약간 구부린 채 나와 카일이 아웅다웅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었는지 훌쩍 가 버렸다.
“도대체가 내 케이크에는 들쥐가 너무 많이 꼬여서 혼자 둘 수가 없네.”
음유 시인이라도 된 듯이 말에 가락을 붙이며, 카일이 가방을 뒤져 실습 준비물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