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68화 (168/178)

따지고 보면 고민할 거리도 없었다. 애초 내가 아득바득 공략 대상의 증표를 모아 주인공이 되려고 했던 이유는 물레 따위에게 내 선택을 맡기기 싫어서였으니까.

여자 기숙사 건물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자 세 개의 화살표에서 글씨가 삐져나왔다. 그러더니 흰색의 꼬부랑 선이 되어 내 걸음을 붙잡기 시작했다. 주어진 길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듯이 말이다. 발치에 엉겅퀴를 놓거나, 계단의 끄트머리를 잡아 늘여 고작 열한 단짜리 계단을 백수십 단으로 늘리기도 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나아갔다. 축축 늘어지는 팔다리를 꾸역꾸역 이끌고 옥상까지 다다랐다.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 이래 나는 줄곧 누구를 만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고, 걔의 고집만큼 내 고집도 만만치는 않았다.

다행히 그리 높지 않은 위치에 마녀의 길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었다. 발목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선택지’를 털어 내고 뛰어들었다. 제각기 깜빡이는 코드 조각을 보고 있노라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까까지만 해도 나 역시 그것들과 한데 뒤섞여 있었다.

전후좌우를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약간 걷자, 운명의 물레가 보였다. 부러지고, 뜯어지고, 성한 부분이 거의 안 남은 와중에도 삐그덕거리며 작동하는 꼬라지가 경이롭기까지 했다.

내가 찾던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내 입술에 거듭해서 숨을 불어넣은 사람.

무릎을 세우고 바닥에 주저앉아 운명의 물레를 올려다보던 카일의 곁에 찰싹 붙었다.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가 대뜸 입을 열었다.

“두려웠어.”

“뭐가?”

“그냥, 다. 내 손으로 저지른 짓을 마주하는 게. 내가 수정한 코드 때문에 플레이어는 게임에 갇혀 버렸어. 그 결과 너는 시스템과 블로썸에게 몇 번이나 위협당했고, 메이나드는 목숨을 잃었지. 노먼은 그 모양이 됐고….”

알록달록한 꽃으로 꾸며진 메이나드의 관을 떠올렸다. 이어서는 그리폰은커녕 의자에조차 마음대로 오를 수 없게 된 케이시와, 요 며칠간 부쩍 핼쑥해진 켈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블로썸을… 분노와 혐오감, 공포와 슬픔으로 점철된 제비꽃색 눈동자.

비록 카일의 행동이 모든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할지언정 그가 그것들을 혼자 감당할 필요는 없었다. 얕게 떨리는 팔뚝에 머리를 박자 카일이 기대기 편하게 어깨를 슬쩍 빼었다. 그건 내가 사랑하는 소꿉친구의 모습 중 하나였다.

“블로썸의 말마따나 걔는 게임을 플레이한 것뿐인데, 거기까지 몰아붙이는 게 옳았던 걸까… 더욱 나은 방법으로 너를 구할 순 없었던 걸까. 혹은, 처음부터, 내게 너를 구할 자격이 있었을까. 그렇잖아. 뭐라도 해 보겠다고 그 지랄을 하는 과정에서 네 의사를 물은 적은 없으니까. 어쩌면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안온한 영면일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넘어진 너를 일으켜 주는 손이 다른 사람의 것이길 바랐을 수도 있는데 말이야.”

“…….”

“만일 모든 진실에 다다른 네가 나를 싫어하게 되면… 알잖아, 생각 많은 거.”

알고 있었다. 원래도 알았는데, 코드 조각이 되어 카일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 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가 얼마나 고뇌하고 고통받았는지.

“네가 날 살렸어. 몇 번이나. 날 위해 블로썸에게 빌었잖아. 프라스웰 호수 밑바닥에서 건져 내기도 했지. 무엇보다 별처럼 무수한 코드 조각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내 줬어.”

카일의 걱정과는 달리 생에 대한 내 의지는 확고했다. 또 진실을 숨긴 룬 카드가 모조리 엎어진 당장에 내가 느끼는 감정은 완전 정반대였다.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겠어?” 나는 엄청난 비밀이라도 말하는 양 카일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그러고 나서 그와 아슬아슬하게 닿은 새끼손가락을 꼼지락대어 손마디를 조금 간지럽혔다.

다음 순간 시야가 확 뒤집어지더니 턱이랑 입술에 가쁜 키스가 떨어졌다. 나는 누운 채 깔깔거리며 카일을 껴안았다.

나야 그렇다 치고, 가만 보면 얘도 참 밝히는 자식이었다. 어떻게 여태껏 참아 왔던 걸까? 물색없이 마구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시답잖은 감상에 빠져 있던 와중이었다.

“다 부서졌어. 운명의 물레 말이야.”

카일이 문득 중얼거렸다. 그의 말마따나 물레는 거의 제 모습을 잃었다. 정상적으로 기능을 한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나는 근처에 굴러다니는 물레의 잔해를 주워 물레바퀴에다가 집어 던졌다. 허무하리만치 쉽게 바큇살이 빠졌다.

“형태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상태야. 약간의 충격만으로도 무너질 게 분명해. 그게 어떤 결과를 촉발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보단 낫겠지. 원한다면 당장 해 봐도 좋아.”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벨은, 블로썸은, 플레이어는 끝내 이 세계에서 떠나지 못하게 된다. 23시간 56분 뒤에 생체 반응이 정지될 가능성을 제쳐 두고도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나도 모르게 입 안쪽 여린 살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피 맛을 느끼고 멈췄다.

“여전히 블로썸을 살리고 싶어?”

갑자기 조용해진 나를 물끄러미 보던 카일이 물었다. ‘물론.’ 즉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비록 블로썸이 계속해서 나를 죽이거나 피츠시몬스에서 쫓아내려고 들기는 했지만, 걔를 그렇게 만든 건 게임이 허용하지 않는 아리엘 달튼의 존재로 인해 먹통이 되어 버린 로그아웃 버튼이니까.

헌신적인 나의 소꿉친구는 책임을 전부 자신에게 돌렸으나 내가 봤을 때는 내 잘못도 상당 부분 있었다. 애당초 내게 반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게임을 수정하지 않았을 거다. 당당하게 지껄이자 뒤통수라도 맞은 듯 멍하니 있던 카일이 폭소를 터뜨렸다.

“근거 없는 자신감 뭐야!”

그가 웃음 반 소리 반으로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근거 있는 자신감이거든.”

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카일은 웃느라고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낸 뒤에 내 손을 덥석 쥐었다.

“네가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준비했지. 따라 와.”

운명의 물레 가까이에 얇은 합판으로 벽을 세운 피츠시몬스 모형이 있었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점토 골렘들이 여기저기를 바삐 오가는 모습이 깜찍했다. 개중에는 머리통이 아주 긴 골렘이나 다른 인형보다 확연히 둔중한 골렘도 있었는데, 험프리스 교수와 채프먼 교수라고 생각하니 재미있었다.

잘 보니 골렘들은 투명하고 반짝이는 거미줄에 묶여 움직이는 중이었다. 실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묘한 형태의 마도구가 나타났다.

기다란 실감개와 구불구불한 문양이 아로새겨진 손잡이, 바큇살이 빽빽한 나무 바퀴가 어디서 본 듯했다. 바퀴의 중앙부에는 마나 코어가 박힌 채였는데, 거기서부터 뻗어져 나가는 마법 회로가 어찌나 복잡하던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이 돌아갔다.

“운명의 물레?”

“간단하게 만들어 봤어.”

“말도 안 돼! 그걸 어떻게 간단하게 만들어? 너 진짜 천재 아니야?”

내가 오버하며 방방 뛰자 카일은 귓불을 빨갛게 물들이고 민망스러워했다. 실은 얼마간 생고생을 했다는 둥, 기적적으로 게임의 백업 코드를 발견했으니 망정이라는 둥 떠들어 댔지만 뭔 소린지 도통 몰랐으므로 한 귀로 흘렸다. 대신 피츠시몬스 모형에 딱 달라붙어 거의 다 똑같이 생긴 점토 골렘 사이에서 내가 아는 애들을 골라내기 위해 노력했다.

울퉁불퉁한 덩어리에 팔다리만 달린 대부분의 골렘과 달리 유달리 매끈하니 예쁘게 생긴 점토 골렘이 있었다. 갈색 털실을 잘라 붙인 머리카락은 뒤통수 중간쯤에서 파란 털실로 묶여 있었는데, 섬세하게 빠진 잔머리가 퍽 앙증맞았다. 정확히 같은 색 리본으로 동여매어진 뒷머리를 더듬다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거 나야? 와, 너, 진짜…”

“조용히 해, 쪽팔리니까…”

광장 부근에서 노란 털실로 장식된 점토 골렘을 가지고 오던 카일이 내가 든 것을 보고 팔로 얼굴을 가렸다. 나는 카일 주위를 뱅글뱅글 돌면서 놀려 대다가 그의 볼에 뽀뽀했다. 다시 한번 낭만적인 장난이 이어졌다.

“이건 블로썸이야.”

잠시간 노닥거린 끝에, 카일이 쥐고 있던 점토 골렘을 간이 운명의 물레 옆에 내려놓았다. 그랬더니 점토 블로썸은 무아지경으로 허공을 두드렸는데, 로그아웃 버튼을 누르는 모양새였다. 괜히 속이 쓰려졌다.

“그건, 음, 네 말대로… 너고.”

카일의 손짓을 따라 점토 아리엘을 블로썸과 다소 떨어진 곳에 두었다. 산만하게 움직이거나 방귀 마법을 쏘아 대는 걔의 모가지에는 딱 봐도 비정상적인 거미줄, 운명의 실이 감겨 있었다. 아무래도 점토 아리엘의 정체는 카일이 코드 조각을 모아 설치한 지금의 나인 듯했다.

“내가 만든 물레로 이것저것 시험해 보다가 알게 된 건데, 졸업 연회를 마치고 3월로 돌아갈 때 물레는 물레바퀴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리면서 자아냈던 실을 코드 조각으로 되돌려.”

말하면서, 카일은 간이 물레의 물레바퀴를 살살 잡아 돌렸다. 이윽고 피츠시몬스 모형 쪽에서 놀라운 현상이 발생했는데, 정말로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걸음을 물릴 때마다 점토 골렘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졌다. 별관 처마에 맺힌 고드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자 기숙사의 어떤 방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점토 케이시 또한 활력을 찾았다. 그것이 점토 그리폰을 타고 아카데미를 마음껏 누비다가 점토 메이나드의 옷자락을 흐트러뜨리는 통에 일어난 소동을 흐뭇하게 봤다.

‘기회와 희망, 진실과 믿음.’ 멋들어진 문구를 휘갈긴 현수막이 정문 입구에 내걸리자 물레의 실감개는 텅 비었다. 카일이 물레바퀴를 놓자 그것은 도로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주변의 코드 조각을 흡수했다.

“지금 물레는 사실상 넝마나 다름이 없으니까, 물레바퀴를 돌리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문제는… 아리엘, 혹시 졸업 연회 날까지 공략 증표를 전부 얻을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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