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시도가 이어졌다. 어떤 5학년에 그가 되살려 낸 아리엘 달튼에게는 발가락이 여덟 개밖에 없었다. 다른 5학년에는 식사 시간마다 침을 흘렸다. 과도하게 폭력적이거나 소심하거나 우울한 경우도 있었다. 눈만 떼면 콱 죽어 버리려고 드는 아리엘 달튼에게 애걸복걸 사정을 하는 소꿉친구가 애처로웠다.
여러 시행착오를 통해, 카일은 마녀의 길에 너부러진 아리엘 달튼의 코드 조각을 거의 모았다. 나만 빼고 말이다. 그러느라고 다 망가졌다. 반복이라면 무뎌질 대로 무뎌진 상태일 텐데도, 그의 신경이 점차 갉아 먹히다가 결국 요만한 점이 되었음이 훤했다.
포기는 절대 안 했다. 울고 다치고 미쳐 가다가도 희미하게 빛나는 코드 뭉치를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다는 듯이 쓰다듬었다. 끈질기기가 선반에 놓인 유리컵이란 유리컵은 죄 쓰러뜨리고 싶어 하는 할머니 고양이보다 더했다.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불현듯 애절한 목소리가 뇌리에 되살아났다.
“폭삭 망한 지 오래인 걸. 그 고집 때문에.”
그리하여 먼저 나가떨어진 쪽은 로즈마리 블로썸이었다. 블로썸은 카일이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자살 중독자 아리엘 달튼과 함께 졸업 연회에 참석했을 즈음 슬슬 위기가 닥쳤음을 짐작했다. 반응 없는 ‘로그아웃’ 버튼을 연타하였으며 ‘레포트’를 주야장천 작성했다.
플로렌스 벨 때와 달리, ‘레포트’를 그러쥔 날다람쥐 집배원은 뱅글뱅글 돌다 말고 블로썸에게로 돌아왔다. 그건 그녀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게임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조막만 한 손바닥을 마구 핥아 털을 정리하는 설치류의 깜찍한 모습은 퍽 무구한 축에 속했으나, 블로썸에게는 공포의 상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날다람쥐 집배원을 내던졌다.
카일이 블로썸의 위급한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했다. 그에게는 블로썸에 대한 죄책감 말고도 시달릴 구석이 쌔고 쌨다. 사랑하는 남자 스위치를 켜지 않은 모든 순간에 가시밭을 걸었다. 당시에 그가 설치한 아리엘 달튼은 겉이 멀쩡한 반면 속은 완전 썩어 문드러진 채였으므로 자살 중독 이상으로 손이 갔다. 여기서 썩었다는 건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아무튼 그랬다.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알았어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카일은 무엇보다, 종종 자기 자신보다 나를 위했다. 나만 행복할 수 있다면 세계고 운명이고 쥐뿔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걔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미 벅차게 받았다고 여겼다. 물질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었다. 카일은 내가 없었다면 그가 미쳤을 거라고 말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정확히 반대였다. ‘제4의 벽’에 부딪혀 깨지기를 반복할 때, 카일과 나눈 실없는 농담이나 우스운 장난이 없었더라면 나는 진작에 맛이 가고도 남았다.
또 ‘제4의 벽’이 사라진 뒤 거대한 풍랑과도 같은 환경 변화에 속절없이 흔들리던 나를 지탱해 주려고 애쓰던 것이 카일이었다. 자기도 너덜너덜한 주제에 말이다. 진짜 혀가 절로 내둘렸다. 성서에도 그만한 헌신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많이 부담스러웠다. 여태껏 산뜻하게 굴던 애였는데, 갑자기 감당하기에 지나치게 깊은 애정을 털어놓았으며, 더구나 나는 자각은 없었더라도 다른 남자애한테 푹 빠진 상태였으니까.
별것 아닌 접촉에 되게 예민하게 굴었다. 실수로 부딪힐 때 과장되게 피하는 통에 상처받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봤다. 대수롭지 않다고 여겼다. 돌려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 선택한 것은 그이니 감내해야 마땅하다 믿었다.
확실히 매정하기는 했다. 지지고 볶은 끝에 걔의 애정을 편하게 여길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안 그랬을 거였다. 그와 팔꿈치를 부딪친 블로썸과, 주말에 약속을 잡은 에드워즈에게 질투할 것을 알았더라면.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손을 맞잡고 글로윈 숲을 산책했을 때? 그리폰 크리켓 경기 때? 농담의 달 연회? 그리피스 전시관 앞에서? 따지자면 충동에 못 이겨 웃기지도 않는 ‘친구 뽀뽀’를 용인한 시점에서 마냥 순수한 사이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그에 대한 동정심이 아무리 컸대도 말이다.
추억을 정리하다 보니 뱃속이 간지러웠다. 켜켜이 쌓인 분홍색 감정이 목구멍을 가득 메웠다. 날숨만 쉬었다 하면 재채기처럼 튀어나오는 심장을 가시밭에 선 카일에게 전하고 싶었으나 코드 조각인 채로는 불가능했다.
돋아나지도 않은 팔을 카일에게로 뻗었다. 목소리도 안 나오는데 있는 힘껏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나를 발견하길 바랐다. 나를 발견하여 불완전한 코드 뭉치를 완성하고, 설치해서, 9개월을 다섯 번 되돌린 끝에 도로 만나길 바랐다.
그러자 나를 스쳐 지나가는 듯하던 카일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눈이 마주쳤다. 마치 운명처럼.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다가 가까스로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것처럼 정신이 희미하게 들었다. 슬렁슬렁 흔들리는 감각이 마치 나룻배가 된 듯했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옮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미처 몸부림을 치기 전에 새로운 졸음의 파도가 나를 덮쳤다.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날 때마다 가물거리는 시야에 보이는 풍경이 변했다. 교실에서 복도로, 복도에서 기숙사로, 마침내 익숙한 내 방 천장으로. 그러는 동안 콧 속에는 줄곧 향수 냄새가 맴돌았다.
실은 맴도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진동을 했는데, 내가 알기로 온 피츠시몬스를 통틀어 그만큼 향수에 진심인 남자애는 단 하나였다. 눈을 가늘게 뜨자 유령같이 핏기 가신 얼굴이 동동 떠다녔다. 밝은 회색의 머리카락 덕택에 그는 언제나 남들보다 배는 창백해 보였다.
공교롭게도 불길에 휩싸인 채 죽어 갈 때 마지막으로 봤던 것도 같은 자식이었다.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는 침구의 감촉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먼지처럼 목구멍에 쌓인 기침을 더러 밀어낸 후에 말이 나왔다.
“가져갈 거야?”
힘겹게 속삭이자 볼턴은 이불 끄트머리를 내 턱 끝까지 추켜올리다가 멈칫거렸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에는 못 들었다는 듯이 이불귀를 반듯하게 폈다. 벼락 맞은 나뭇가지를 연상시키는 그의 손목에는 내가 진짜로 목숨을 걸고 손에 넣은 스티아 신의 티아라가 걸려 있었다.
“주운 거야.”
볼턴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적어도 내가 이걸 발견했을 때는 잿더미 속에 있었거든.”
덧붙이는 표정이 오묘해서 나와 성화와 티아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추 짐작했다. 아무리 모든 것을 태우는 불이어도 이미 재로 화한 것을 태우지는 못했다. 아마도 나는 배경 인물로서 죽었다가 주인공으로서 되살아나는 과정에서 한 번 재가 되었던 듯했다.
문득 미친 듯이 속이 칼칼해졌다. 나는 목젖이라도 토해 낼 기세로 거세게 기침했다. 추측을 뒷받침하듯, 손등에 묻어난 까만 자국에서 탄내가 났다. 내장이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완전 징그러웠다. 침대 옆면에 대충 문지른 뒤에 물었다.
“블로썸을 찾아 주기라도 하겠대?”
볼턴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딱히 긍정도 부정도 아닌 반응이었다. 내가 보기에 케이틀린 대제가 뭘 약속하거나 한 건 아닌 듯했고, 그냥 자기 혼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제에게 알랑거려 보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하여간 그놈의 사랑이 문제였다. 머릿속에 자꾸 통속가요의 가사 같은 말들이 맴돌았다. 때려눕히기는커녕 대거리를 할 힘도 없어서 손이나 흔들어 주기로 했다. 가지고 가라. 가지고 가. 아주 그냥 모가지도 뜯어다가 블로썸한테 바치지 그러냐. 또라이 자식아.
“만약, 달튼… 로즈를 알기 전에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다면….”
내 마음처럼 삐걱거리는 문을 조심히 열고 돌아서기 전에, 볼턴이 대뜸 지껄였다. 제법 진지한 말투였다.
“그랬다면, 내 첫사랑은 너였을지도 몰라.”
지랄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는데 기운이 너무 빠졌다. 하릴없이 팔을 뻗어 못다 한 손가락 욕을 마음껏 했다. 그러자 볼턴은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목을 울려 웃었다. 짜증 나리만치 맑은 웃음이었다.
***
플레이어의 생체 반응 정지까지 23시간 56분 남은 시점에 깨어났다. 익숙하게 개운한 기분이었는데, 전에도 그런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마르퀴즈 볼턴이 내게 신성력을 사용했음을 확신했다. 그것이 선의에 의함이었는지, 아니면 케이틀린 대제의 충실한 심복으로서 나를 살려 놓고 영원히 고통받게 하기 위함인지 헷갈렸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좋아져서 이불을 박찼다.
주인공이 되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굳이 시계를 보지 않아도 시간을 대강 알 수 있다는 거였다. 나는 시야의 오른쪽 위에서 특이한 나침반을 찾아냈다. 북쪽에는 달이 해를, 남쪽에는 해가 달을 반쯤 가린 모습이,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온전한 해와 달이 그려졌는데, 엄지손톱만 한 바늘은 북동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즉 일출까지 좀 남았다는 뜻이다. 죽은 듯이 자는 브리아나를 깨우지 않기 위해 발꿈치를 들고 옷장까지 갔다. 세탁 같은 귀찮은 짓은 몰아서 하는 게 버릇이라 애석하게도 거기에 남은 외투는 프릴 달린 천 갑옷뿐이었다. 소매에 놓인 파랑새 자수를 매만지며 방을 나섰다.
문을 열자마자 눈앞에 반투명 화살표가 세 개나 나타났다. 그것들은 나를 둘러싸고 뱅글뱅글 돌면서 내 진로를 방해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관심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좋아.’ 나는 반짝이거나 둥실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네모들 사이에 팔짱 끼고 섰다.
“별것 아니기만 해 봐.”
곧 세 개의 화살표가 차례차례 날아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 중정으로 향한다.]
[➡ 그리폰 사육장으로 향한다.]
[➡ 광장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