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66화 (166/178)

나였단 말이야! 그렇게 외치기 직전에 끔찍한 고통이 몰아쳤다. 시작은 손끝이었다. 과일의 껍질을 벗기는 도구로 부드러운 살을 저미는 듯한 감각이 지속되다가 손가락의 마디가 똑 떨어졌다. 그다음에는 손목이랑 팔꿈치가, 그러고 나서는 오금이 절단되었다.

종내에는 심장이 터졌다. 그것의 파편이 칼날이 되어 전신에 산개하자 비로소 고통이 멎었다. 끝도 없는 어둠이 가짜 태양, 가짜 구름, 아카데미의 첨탑과 벽에 도드라진 돌 부조, 듬성듬성 박힌 인간 십자가에 이어 마침내 켈란을 집어삼키고….

어느새, 나는 마녀의 길을 장식하는 문자 부스러기로 변했다.

갈가리 찢긴 나의 몸은 흰 글자가 되어 마녀의 길 여기저기에 흩어졌다. 카일이 ‘코드’라고 부르던 것들이었다. 카일은 그것이 나를 이루고, 하늘과 흙과 풀을 이루고, 운명의 물레와 실을 이룬다고 했다.

퍽 추상적인 개념이었다. 카일은 도통 감을 잡지 못하는 내게 연금술이나 정령술에서 언급하는 원소와 닮았다며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었지만, 애석하게도 호문쿨루스가 골렘처럼 비지성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나는 연금술에 대한 흥미를 모조리 잃었다.

정령술에는 애초에 흥미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입꼬리에 힘을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뭔 소린지 모르겠고 전혀 안 궁금하다는 신호였다. 그러자 눈치 빠른 카일 빌라드는 즉시 입을 다물어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를 택했다.

스스로 코드가 되어 보니 이해가 되었다. 끝도 없는 어둠 속에 은밀하게 스며든 채, 나는 게임의 거의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게 아니라, 그냥 인지했다. 이 세계를 구축하는 거대한 코드 중 하나가 나였으니까.

내가 삭제되고 난 뒤 게임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동작했다. 켈란을 포함한 모두가 아리엘 달튼이 누구인지 잊었다. 브리아나 모슬리의 룸메이트는 방을 혼자 쓰던 메건 클리블랜드가 되었으며 애덤 월시의 전여친은 조던 니콜스로 변했다. 브리아나랑 니콜스가 발길질을 주고받는 꼴은 꽤 재밌었다.

하루하고 정확히 반나절이 지나자 마녀의 길에 누군가 들어섰다. 카일이었다.

나는 그가 유일하게 아리엘 달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임이 재개되었을 때 카일이 가장 먼저 내가 4학년 때 그에게 선물한 드와이어 교수 목조각을 찾았기 때문이다.

소토의 침댓가에서 그 저주받은 목조각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카일은 숨죽여 울었다. 그러고 나서는 수업을 들으러 가는 대신 도서관으로 향했다. 아리엘 달튼이 삭제되며 켈란과 내가 겪은 일들도 사라졌기 때문에, <패치 노트>는 다시 책의 바다 매우 깊은 곳에 잠긴 채였다.

카일은 그가 망설임 없이 뜯어낸 <패치 노트>의 일부를 손에 쥐고 마녀의 길에 다다랐다. 거기서 그가 한 일은 별처럼 박힌 코드 조각들 중 몇몇을 골라 다른 코드와 겹치는 것이었다. 그 작업을 아주 오래도록 반복하자 반투명한 덩어리가 생겼다.

장장 사흘 동안, 카일은 훌쩍거리며 코드 덩어리를 깎고 늘리고 다듬었다. 처음에 그냥 길쭉한 무언가였던 그것은 카일의 손 아래에서 점차 누에고치처럼 변했다.

나는 코드 조각 뭉치의 표면을 감싼 문자들 사이에서 일부 익숙한 내용을 찾았다. 내 기억에 게임이 배경 인물을 찍어 내는 거푸집의 이름은 ‘템플릿’이었고, 나는 열세 번째 템플릿이 일곱 번째로 찍어 낸 여자애였다.

카일이 코드 조각 뭉치를 물레 근처에 가져다 대자 희한한 현상이 벌어졌다. 운명의 물레가 그것을 흡수하여 실을 자아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윽고 웬 문장이 물레의 바퀴 위로 둥글게 나타났다.

[모드 설치가 완료되었습니다.]

이윽고, 놀랍게도, 열세 번째 템플릿이 일곱 번째로 찍어 낸 여자애가 브리아나 모슬리의 옆 침대에 나타났다. 메건 클리블랜드가 문짝과 옷장에 도배를 한 케이틀린 대제 초상화는 자취를 감추었으며 브리아나가 뜯어 놓은 니콜스의 두피는 멀쩡해졌다.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되살아난 아리엘 달튼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공략 대상은, 그들의 실은 애초에 배경 인물과 묶이지 않았으므로 조금의 의구심도 가지지 못했다.

사라졌을 때처럼 카일만이 내 부활을 인지했다. 장난스레 볼을 잡아 늘이며 시비를 거는 그의 손가락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플로렌스 벨은 여전히 주의력이 부족하여, 아리엘 달튼이 한 번 삭제되었다가 게임에 다시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카일이 <패치 노트>의 일부를 찢어 나와 관련된 내용을 숨겼으므로, 아무래도 켈란의 왜곡된 감정을 바로잡는 방향으로 레포트에 기재한 버그가 수정되었다고 착각한 듯했다.

카일은 시스템이 저지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나의 조각을 모아 아리엘 달튼의 실을 되살렸다. 대륙의 역사 교재에 실린 수많은 사령술사처럼 말이다.

사령술은 대륙에서 엄격히 금지된 마법이었다. 역사 속 대부분의 사령술사가 스스로의 피조물과 함께 목이 매달렸다. 유감스럽게도, 허용되지 않은 코드로 새로운 실을 뽑아내도록 하는 행위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코드 조각들을 그러모아 고치를 만드는 동안 카일은 틈만 나면 피에 젖은 살덩어리나 이를 뱉어 내곤 했다.

코드를 매만지다가, 잠시 까무러쳤다가, 도로 일어나서 코드를 만지는 모습도 꽤나 빈번히 보았다. 고통에는 익숙해진 듯이 허세를 부리더니 말이다. 코드 조각이 되어 버린 나에게는 속 같은 게 없었지만 속이 아프다고 느꼈다.

말 그대로 피를 토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일이 너덜너덜한 코드 조각들을 이어 붙여 만들어 낸 아리엘 달튼은 정말이지 꼴불견이었다. 걔의 기억과 인격은 아무 재료나 때려 박은 스튜처럼 대중이 없어서 어느 순간에는 평범한 배경 인물처럼 굴었고, 다음 순간에는 ‘아리’처럼 굴었다.

특히나 켈란과 자신이 특별한 유대를 쌓았다고 굳게 믿어, 기억을 잃어버린 켈란을 여간 야속하게 여기질 않았다. 쫓아다니면서 혼자 주접을 떨다가, 길길이 날뛰다가, 끝내는 완전히 맛이 가 버려서, 정상적인 세계로 가겠답시고 강에 뛰어들었다. 당연하겠지만 가라앉을 뿐이었으며, 이미 난도질이 된 지 오래인 소꿉친구의 심장에 칼집을 내는 결과나 낳았다.

아리엘 달튼의 장례식은 메이나드의 장례식과 상당히 비슷했다. 구별되는 점이라고 하면 관 위에 비스듬히 놓인 초상화였다.

졸업 앨범에 들어갈 초상화를 그릴 때, 나는 보통 남학생을 가장하여 화공 앞에 섰다. 왁스로 잔머리를 싹 넘겨 묶고 나서 눈썹을 두껍게 그렸으나 수염을 붙이지는 않았다. 마지막까지 유머를 담고자 하는 마음과, 마지막이라도 멀쩡한 모습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서로 충돌해서 그랬다.

어정쩡한 장난은 안 치느니 못했다. 맞지도 않는 남자 교복을 걸친 여자애 초상화는 안쓰러우리만치 우스꽝스러웠다. 관 뚜껑에 꽃을 내려놓는 동시에 피식대는 애들 때문에 앞으로는 평범한 초상화를 남기리라는 결심이 섰다.

카일은 메이나드의 장례식에 이어 아리엘 달튼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온종일 물레 앞에 앉아 스스로를 저주했다. 그리고 켈란을. 켈란이 시스템에 반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를 택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삭제되는 일은 없었으리라고 계속해서 뇌까렸다.

게임의 막바지에 주인공은 공략 도우미를 호출할 필요가 없었다. 잠도 안 자고, 식사도 안 하고, 그저 손등이 불어 터질 때까지 눈물을 닦다 보니 어느새 졸업 연회였다.

깃이 빳빳한 연회복을 대충 걸친 카일은 그에게 주어진 대사를 전부 읊자마자 마녀의 길에 처박혔다. 플로렌스 벨이 공략 대상과 최후의 춤을 추고, 여러 번에 걸쳐 고백을 받는 내내 기존의 코드 조각 누더기에서 몇몇 코드를 빼고 다른 코드를 엮었다.

그가 재단장한 아리엘 달튼을 게임에 설치한 직후 운명의 물레가 뻑뻑한 소리를 내며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실감개에 둘린 실들이 전부 풀리어 마녀의 길 여기저기에 흩뿌려지자 시간은 다시 3월이 되었다.

끔찍한 사고 이후 다시 태어난 아리엘 달튼은 전보다 약간 나았지만 여전히 얼간이였다. 다섯 번에 한 번은 말 대신 ‘꽥’ 소리를 냈다. 졸업은 마땅히 요원했다. 사랑의 달 연회에서 춤을 추다 말고 파닥거리는 사건이 벌어진 뒤에 달튼 자작 부부가 실성한 딸의 자퇴 절차를 밟았다.

여섯 번쯤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나서, 플로렌스 벨은 로즈마리 블로썸으로 거듭났다. ‘도전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하필 ‘로즈마리’인 이유는 그렇게 했을 때 브라이스 나돈의 초기 호감도가 높기 때문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블로썸이 가장 마음 쓰는 공략 대상은 그 자식이었다. 취향도 참 특이하단 말이야.

게임으로부터 빠져나가는 문이 닫혀 버렸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도 그즈음이었다.

“로그아웃이 안 되잖아!”

블로썸은 거듭 말했다. ‘아까부터 뭐야, 진짜?’ 하지만 당장 문제가 되지는 않았으므로 대수로워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최애’의 모든 이벤트를 회수하는 것이 일시적인 버그보다 중요했다.

블로썸과 나돈이 염병을 떠는 와중에도 카일은 꾸준히 아리엘 달튼을 개선하려고 애썼다. 코드 뭉치에서 잘못된 부분이나 빈 공간을 눈알이 빠져라-때때로 정말로 빠지기도 했다-찾았으며 온종일 마녀의 길을 뒤져 적당한 코드 조각을 덧대었다. 그러는 동시에 블로썸이 우리의 수상한 동향을 의심하지 않게끔 천연덕스레 굴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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