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65화 (165/178)

반드시. 고요한 복도 가운데서 눈을 떴을 때 맹세했다. 두 번 다시 이 짓거리는 하지 않으리라. 지옥 같은 삶을 얼마나 반복하든 간에 불에 뛰어드는 일만큼은 더는 없을 것이다.

촛불 근처에도 안 갈 거다. 마법 약도 안 끓일 거고, 구운 고기도 안 먹을 거다. 만일 정신을 잃는 타이밍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아예 미쳐 버렸을 게 분명했다. 그만큼 끔찍했다. 진짜로 뭐 빠지게 아팠다.

어쨌든 효과는 확실했다. 나는 아릿한 느낌이 남은 팔이나 다리를 시종 문지르며 사물함으로 갔다. 아무 번호나 입력하고 자물쇠를 열어 확인했다. 독거미 달튼의 악성 팬이 문짝 안쪽에 휘갈겨 놓은 똥 그림은 온데간데없고 퀘퀘한 냄새와 먼지만이 가득했다. 그건 내가 성공적으로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 도달했다는 증거였다.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카일이나 켈란, 플로렌스 벨을 찾았다. 아니면 세 사람의 행방을 알 만한 애를 찾았다. 그런데 아무도 안 나타났다. 내가 찾는 사람은 물론이요, 찾지 않는 사람조차 도무지 눈에 띄질 않았던 것이다. 마치 모든 학생이 졸업한 피츠시몬스에 혼자 남은 느낌이었다.

발치에 떨어지는 햇살이 회색빛을 띠고 있음을 눈치챘다. 햇살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게 죄다 회색조였다. 피부를 긁적이는 공기에조차 고독감이 섞여 있었다. 불현듯 사무칠 정도로 외로워졌다. 도통 심상치 않다고 느껴서 창 너머로 머리를 뺀 찰나였다.

바깥에, 그러니까 기숙사에서 광장으로 가는 길에, 언젠가의 니콜스처럼 팔을 벌리고 꼿꼿이 선 학생의 행렬이 늘어져 있었다. 시선은 머리 위를 향한 채였다. 잘 보니 로즈마리 블로썸의 세계처럼 플로렌스 벨의 세계도 영문 모를 문자가 하늘을 유영하는 중이었다.

[잠시 후 게임 업데이트를 위한 정기 점검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점검 중에는 게임 이용이 제한되오니 점검이 시작되기 전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신 뒤 게임을 종료해 주시기 바랍니다.]

‘업데이트’니 ‘점검’이니 또 낯설기 짝이 없는 단어들이 등장했다. 나는 읽을 수 있지만 못 읽겠는 문장을 세 번쯤 곱씹다가 포기했다. 휴거를 앞둔 사이비 종교 신도 무리처럼 집단적이며 기묘하게 흐르는 사람의 덩어리 가운데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탓이었다.

계단을 거의 굴러 내려갔다. 실제로 구르기도 했다. 간헐적으로 쏘아지는 환상통이 무릎을 비트는 까닭에 발이 자꾸만 꼬였다. 가짜 열상에 이어 타박상을 한 아름 안고 행렬의 중간에 끼어들었다.

“브리! 너 괜찮아?”

브리아나의 어깨를 붙들고 마구 흔들며 물었다. 대꾸는 돌아오지 않았다. 흐리멍덩한 시선이 내 얼굴을 아주 잠깐 훑은 다음 하늘로 향했다. 활짝 벌어진 팔을 억지로 내려 보았는데 오뚜기가 우뚝 서듯 튕겨 올라가서 소용이 없었다.

게임 업데이트 중… 10%

구름을 반쯤 가린 문장의 내용이 바뀌었음을 인지한 다음 순간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빈민가의 공동묘지에 다닥다닥 박힌 나무 십자가처럼 우뚝 선 학생 중 일부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자리를 떴다는 뜻이 아니었다. 정말로 ‘사라졌다’. 부지불식간에, 어디로 솟거나 꺼져 버린 듯이.

하늘에 뜬 숫자와 비례하여 행렬의 여기저기에 뚫린 구멍이 커졌다. 과장 없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너덧씩은 사라지는 듯했다. 난데없이 펼쳐진 깜짝 쇼에 주의를 뺏긴 사이 나의 룸메이트가 있던 곳도 텅 비었다. 나는 막연한 공포에 쫓겨 광장을 가로질렀다.

게임 업데이트 중… 27%

광장을 지나 별관을 거쳐 본관으로 향하는 다리를 건너기까지 다양한 인간 십자가를 만났다. 엘리자베스와 브레넌, 아직 살아 있는 미케일라 메이나드, 징그러운 애덤 월시와 그의 졸개들, 최근에 나와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진 험프리스 교수도 있었다.

게임 업데이트 중… 29%

그때 불현듯 시야의 구석이 밝아지는 듯했다. 오른쪽 아래에서부터 금빛 섬광이 비스듬하게 들어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잠시 두리번거린 후에 내가 섬광이라 생각했던 것이 실은 인간 십자가에 둘러싸인 채 중정에 서 있던 켈란 일레스티아의 빛나는 금발이었음을 깨달았다.

소용돌이치며 낙하하는 다채로운 색상의 나뭇잎 사이, 켈란은 다른 사람들처럼 흉한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았다. 하늘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내게 꽂혀 있었다.

“아리.”

시간이 멈추기라도 했나 싶어질 찰나 입술이 움직였다. 지독하게 쉬어 터진 소리였다. 나는 난간에 몸을 반쯤 걸치고 손나팔을 만들었다.

“켈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사라지는 사람들 하며, ‘업데이트’라니!”

“내 잘못이야.”

기시감이 들었다. 정확히 같은 말을 하는 켈란을 만난 적이 있다고 느꼈다. 정확히 같은 분위기로 말이다. 주변에 난무하는 회녹색과 회갈색과 빛바랜 노란색과 달리 켈란의 눈은 채도가 아주 높은 호박색이었는데, 물기가 얕게 맺혀 안쓰러웠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아무리 버거워도, 죽을 것 같아도, 걔한테는 들켜선 안 되었어.”

굵직한 눈물방울이 켈란의 얼굴 굴곡을 따라 느릿하게 흘렀다. 절망과 절규가 난무하는 전쟁통에도 우아하고 고고할 것만 같던 남자의, 두 번 다시 보지 못하리라 여긴 모습이었다. 그제야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 닥친 것이 엄청난 위기임이 짐작되었다. 전신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에 난간을 꼭 붙잡고 크게 소리쳤다.

“걔라니? 카일? 카일은 어디 있어?”

“플로라가, 플로라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털어놨어. 화를 내더라. 엄청나게. 그러더니 갑자기 허공에 글을 썼어. ‘레포트’를 작성한다고….”

“잠깐, 잠깐만, 누구를, 뭐?”

혼비백산하여 끼어들자 켈란은 나를 물끄러미 봤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횡설수설하다가도 곧 명장의 출사표처럼 또렷해지곤 하는 음성에는 묘한 마력이 있어서 나를 속절없이 빠져들게 했다.

“지난번에 만난 이후로, 여태껏 네가 남긴 기억으로 버텼어.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조금 지나니까 전혀 아니더라. 가짜 세계에서 산다는 것 말이야. 빛이, 공기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닿는 모든 것이 역겹게 느껴졌어. 시스템은 집요하게 나를 교정하려 애썼고….”

게임의 흐름을 방해하는 나를 꾸역꾸역 배제하려 했던 시스템이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지 않은 공략 대상을 가만히 뒀을 것 같지는 않았다. 등줄기에 찬 바람이 부는 것 같아서 옷깃을 추슬렀다.

“고문이었어. 네가 오지 않는 날이 길어질수록 돌아 버리는 기분이었어. 실은 이미 약간 돌았을지도 몰라.”

켈란이 떼를 쓰듯 도리질을 쳤다. 사뭇 유치한 행동이었다. 평소에 켈란이 얼마나 빈틈없이 굴었는지를 고려하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만큼. 전에도 생각한 건데, 완벽한 사람이라고 무너지는 찰나마저 완벽하리라는 법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느 순간보다 지금 무소불위의 학생회장, 피츠시몬스의 절대자, 대신성 일레스티아의 황태자와 가까이 연결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기어코 그를 이해할 수 있겠다고 느꼈던 것이다. 서로 지옥의 밑바닥을 짚고 허우적거리는 상황이 되어서야.

“업데이트가 끝나면 너는 시스템에 의해 소멸될 거야. 나는 너를… 유일하게 진실했던 너에 대한 마음을 깡그리 잃고 거지 같은 데이터 쪼가리로 돌아가겠지.”

꽤나 기이한 경험이었다. 슬펐고, 아주 약간 만족스러웠고, 동시에 너무나도 애달팠다. 들불 같던 나의 짝사랑은 내 심장을 반쯤 태우고 거기에 오로지 연민만을 남겨 두었다. 결코 사랑이 되지 못하는.

“내게 주어진 벌은 감내할 수 있어. 하지만 너는… 젠장, 제기랄, 빌어먹을!”

켈란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다가,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둥근 등과 오므려진 어깨가 지나치게 작아 보였다. 나는 잠시 기다리라 말하고 중정까지 뛸까 하다가, 다리를 건너고 계단 십수 개를 밟은 뒤에 복도를 가로질러 중정에 다다르기까지의 고독을 그가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대신 난간에 발을 걸었다. 바닥을 일부러 보지 않은 채 뛰어내렸다. 나의 고소 공포증이 자취를 감추는 곳은 카일의 창가뿐이었고 타박상에 타박상을 더하는 것쯤이야 별것도 아니었다. 형편없는 도약과 꼴사나운 착지에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는 사람들의 발치에서 데굴데굴 구른 다음, 팔뚝을 주무르며 켈란에게 갔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 제발, 아리만은….”

“켈란, 켈란… 괜찮아.”

계속해서 같은 말을 되뇌이는 그의 턱을 콱 붙들어 억지로 나를 보도록 했다. ‘봐, 나, 여기 있잖아. 멀쩡히…’ 어르듯 속삭이자 그가 내 목에 애처로이 매달려 왔다. 케이틀린 대제의 비밀의 방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못 믿겠어. 못 믿겠다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또한 켈란 일레스티아여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 말을 안 믿으려고 들었다. 그는 ‘아리엘’이 아닌 ‘아리’가 살았고, 살아 있고, 앞으로도 살아가리라는 증좌를 손에 넣길 원했는데, 그 시점에 업데이트 어쩌고 하는 문장 오른편에 쓰인 숫자는 거의 80에 육박하고 있었다.

게임 업데이트 중… 77%

빠르게 늘어나는 숫자를 곁눈질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나는 아침에 잠이 너무 많아서, 일곱 시는 내게 꼭두새벽이나 다름없어.”

게임 업데이트 중… 82%

“또 완전 게을러터져 가지고 입학한 이래로 중정에 들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야. 여자 기숙사랑 중정은 거의 끝에서 끝이거든.”

게임 업데이트 중… 85%

“아무것도 모르는 이상 내가 실수로라도 오전 일곱 시에 중정에 나타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주절거리다 보니 문득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나는 떠들기를 그만두고 고장 난 마법 인형처럼 버벅거렸다. ‘나였어.’ 한참 가만히 있다가 대뜸 지껄였다.

게임 업데이트 중… 94%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서 켈란의 버그를 유발했던 캐릭터. 카일로 하여금 <패치 노트>를 잡아 뜯게 만든 장본인.

게임 업데이트 중… 96%

로즈마리 블로썸 세계에 다다라 뒤섞인 켈란의 기억 속 ‘아리’. 걔가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게 만든 여자애.

게임 업데이트 중… 99%

산수유나무와 자작나무, 동백나무 사이에 경건히 앉은 켈란 일레스티아가 매일 아침 기다리던 사람. 그게, 사실은, 전부….

[업데이트를 완료하였습니다. 게임을 재기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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