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64화 (164/178)

뻔뻔하게 우기자 카일이 짜증스레 마른세수를 하다가 나를 빤히 봤다. 얼굴을 감싼 투박한 손가락 사이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빨간 머리와 봄의 연안처럼 녹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극명히 대비되었다.

“켈란, 너 좋아해. 원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네가 주인공이 되고 나서 더욱 확실해졌어. 젠장. 다른 자식들이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 따위는 안 궁금했는데.”

퍽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나는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대답하라고 채근하려다가, 양손을 서로 겹쳐 눈두덩이에 올린 카일이 너무 괴로워하는 듯하여 그만두었다. 눈앞에 떠다니는 무언가를 가리려는 몸짓이었다.

“내가 먼저 만났어. 내가 더 사랑했고. 네가, 너는 모르겠지만, 계속….”

그다음에 벌어진 일은 아주 충동적이면서도 자연스러웠다. 카일은 부드러운 동작으로 나를 밀쳤다. 허벅지와 엉덩이와 등이 순서대로 침구에 감싸였다. 매우 정중한 초대장이었다. 하지만 내 허리를 감아쥔 팔에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갈급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소꿉친구와 벽 사이에 갇혀 침대의 구석까지 몰렸다. 두툼한 겨울 이불이 우리의 움직임에 밀려 산줄기처럼 구불구불 쌓였다. 곧 그가 낮은 동산 중 하나를 무릎으로 짚고 내 위로 올라왔다. 오래 지나지 않아 왼쪽 귀 아래에 간지러운 느낌이 났다. 물기 어린 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이 들려서 기분이 영 이상했다.

귀 주변에서 시작된 입맞춤은 턱을 따라 목으로 내려왔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쪽쪽거리다가 목의 중간쯤, 박동이 느껴지는 자리에 머물렀는데, 마치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입술로 확인하는 듯했다.

그런 뒤에는 재차 옆 턱과 볼, 입가로 올라왔다. 아랫입술 바로 밑의 오목한 부분과 입꼬리에도 키스가 퍼부어졌다. 중간중간 핥거나, 물거나, 빨아들이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바짝 들릴 만큼 선정적인 접촉이었다.

발끝까지 맴도는 자극에 무심코 이를 사리물었나 보다. 카일이 얼굴을 약간 떨어뜨리더니 허리를 받치지 않은 손으로 내 입술을 더듬었다. 검지를 구부려 턱에 대고 엄지로 아랫입술을 만지다가, 갈라진 틈에 조금 넣었다. 깜짝 놀라 입을 벌리자 앞니랑 혀끝에 단단한 게 느껴졌다.

입 안을 휘젓던 손가락은 금세 빠져나갔다. 그는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것을 자기 입술에 대고 보란 듯이 눌렀다. 후회하지 않을 거냐고 묻는 동시에 앞으로의 행위를 예고하는 것처럼 보여서 속이 홧홧했다.

남의 애간장을 한참이나 태우던 입술이 내 입술과 맞물린 것은 그 다음이었다. 얘하고 가림막 없이 입을 맞춘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후덥지근한 분위기에서는 처음이었다. 아랫배가 지끈지끈했고 숨이 턱 막혔다.

작은 새나 물고기들이 그러는 것처럼 얕은 뽀뽀를 서너 번 하고 나서 깊은 키스가 이어졌다. 생애 두 번째 키스에서도 나는 여전히 정신이 없었다. 카일이 틈을 주지 않고 마구 달려들어서 그럴 수도 있었다. 주저하던 모습은 어디에 내버렸는지 그는 이제 거의 내 입 속에서만 숨을 쉴 수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이대로는 질식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에 카일의 뒷머리를 당겼다. 그랬더니 그는 즉시 몸을 물렸지만 아쉬운 듯 입술 대신 손끝으로 나를 건드렸는데, 철저히 무릎 아래나 허리 위로만 오가는 손길이 있는 힘껏 자제하는 중임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너무 웃기고 애틋해서 들숨을 쉬자마자 소꿉친구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다시금 열띤 감촉이 얼굴과 목과 어깨에 마구 내려앉기 시작했다. 살갗을 때리는 차디찬 공기에도 불구하고 그가 닿는 부분마다 열꽃이 막 폈다.

“네가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상처 안 받기를 바라. 하지만 잊는 것도 싫어. 잊히고 싶지 않아….”

마지막에 카일은 내 쇄골 바로 위를 집요하게 깨물었다. 흔적을 남기고 싶은 듯했다. 나는 찌릿한 통증과 동반하는 쾌감에 눈을 내리깔아 그를 보았다. 빨갛고 살짝 부푼 자국에서 입술을 떼고 몸을 일으킨 카일의 손아귀에는 어느 사이엔가 묵직한 황동 덩어리가 쥐여 있었다. 내 재킷 안주머니에 들어 있던 다미앙 할아버지의 회중시계였다. 서브 캐릭터 카일 빌라드의 ‘공략 증표’.

카일이 시계를 열고 베젤에 튀어나온 버튼 몇 개를 누르자 조그마한 소음과 함께 문자판이 들렸다. 정교하게 구성된 무브먼트를 조심조심 들어 올리자 낡은 종이쪽지 같은 것이 있었다.

“어쩌면… 주인공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레가 무너지지 않은 건, 네 존재가 아직 온전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종이 쪽지를 손안으로 갈무리한 채 머뭇거리다가, 카일이 결심한 듯이 말했다.

“하나만 약속해. 어떠한 경우에도 이기적인 선택을 하겠다고. 메이나드나, 노먼뿐만 아니라 블로썸, 엘리자베스와 모슬리, 혹은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뭐? 그딴 게 어딨어!”

“약속해.”

하도 독촉하는 통에 떠밀리듯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러자 카일은 신성한 의식이라도 취하는 것처럼 내 손가락과 손등과 손목에 다시금 입을 맞추고는 종이쪽지를 건네었다. 매우 낡은 종이였다.

꽤나 익숙하다고 느꼈다. 당연했다. 그건 나와 켈란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패치 노트>의 일부였다. 정교하게 찢겨 있던 <패치 노트>의 마지막 한 장. 긴장감에 뒷덜미의 솜털이 솟는 것을 느끼며 종이 귀퉁이를 잡아 펼쳤다.

공략 대상 ‘켈란 일레스티아’의 버그를 유발하는 캐릭터 데이터를 삭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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