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구 두드려 보았다. 대답은 없었다. 팔꿈치로 세게 쳤다. 부서질 것 같지도 않을뿐더러 적지 않은 소음에 기웃거리는 시선이 생겼다. 하는 수 없이 기다렸다. 참을성 있게. 훌륭한 사냥꾼은 기다림의 미학을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다만 사냥감이 모래 더미에서 머리털 한 올도 내밀지 않는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나는 십여 분만에 참을성을 가지길 때려치웠다. 그리고 낡은 나무 문짝 건너편에 있을 카일을 향해 끈덕지게 말을 건네었다.
회유도 하고 협박도 했다. 농담도 욕설도 이어졌다. 끼어들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민망할 정도로 아무런 메아리가 없었다.
불현듯 그의 창가에 거대한 오동나무가 자라나 있다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창을 뚫을 기세로 뻗어진 가지를 타고 별의별 야생 마물이나 동물이 기어들어 온다고 불평한 기억이 났던 것이다.
거듭 따지지 않고 몸을 돌렸다. 기숙사 건물 모퉁이를 크게 돌아 문제의 오동나무가 심긴 데까지 물 흐르듯 갔다. 적어도 감탕나무에서 떨어지기 전까지 나의 나무 타는 실력은 원숭이보다 뛰어났다.
환각 속에서라고 해도 나무줄기를 밟은 경험이 있기도 했다. 옹이에 손가락을 끼우고 숨을 들이마셨다. 대륙 최고의 원소 마법사가 보증하는 한 나의 공포증은 고개를 숙일 것이 분명했다. 칠 피트쯤 오르자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일부러 강하게 되뇌었다.
카일은 나를 살리겠다는 일념하에 죽도록 무서운 물속에 몸을 던졌다. 그때 내게는 걔를 감탕나무 가지에서 구해 낼 자신이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를 꽉 물고 나무줄기를 빠듯이 안았다.
공포를 눌러 참고 꾸역꾸역 매달린 보람이 있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턱을 떨어뜨린 카일의 표정은 내가 근래 본 것 중에 가장 무방비했다.
“제정신이야?”
최초의 비난은 유리창에 부딪혀 내 진로를 방해하지 못했다. 나는 실실 웃으며 가지 중간쯤까지 꾸물꾸물 나아갔다. 앙상한 가지가 내 무게로 인해 심각하게 휘었다.
“야, 너, 진짜…!”
“무서워서 더는 못 가겠어. 손잡아 줘.”
두 번째 비난은 두꺼운 낯짝에 가로막혔다. 바들바들 떨면서 팔을 뻗자 카일은 욕을 뱉으면서도 내 손목을 꽉 붙잡았다.
그의 품에 안겨 창틀을 넘는 동안 나는 그리폰 크리켓 경기가 열리던 어느 날을 떠올렸다. 훅 끼치던 열기와 바다 냄새. 귀를 먹먹하게 울리던 환호성. 내가 잘 아는 남자애의 잘 모르는 얼굴.
귓불이 달아오르는 듯해서 그의 가슴을 밀어내고 바닥에 발을 디뎠다.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괜히 크게 나갔다.
“나 완전 열 받은 거 알지? 이게 뭐 하자는 거야?”
“그건 내가 할 소리야. 너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는 알아? 그런데 나무를 타? 고소 공포증까지 있는 애가? 진짜 환장하겠네.”
“위험한 상황이니까 너한테 상담하러 온 거 아니야. 문이나 걸어 잠그고 말이야.”
투덜투덜 핀잔하자 카일은 바닥에 흩어진 나무토막이며 마과학용 세공 도구 같은 것들을 발로 슬슬 밀어내다 말고 돌연 조용해졌다. 잠시 뒤에 그가 말했다.
“정리를 좀… 하려고 했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내가 보기에 얘가 아무 이유 없이 난리통에 마과학 소양이나 기르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카일이 주절거리는 동안, 나는 그의 침대 아래로 모습을 숨긴 마나 코어에 잠시간 집중했다.
미처 따져 묻기 전에 다른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카일의 이마나 가르마 부근에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카락 말이다. 그가 특히 나를 대할 때 유독 멋진 머리 모양에 집착했기 때문에, 간만에 보는 앞머리 내린 카일의 모습은 아주 신선한 축에 속했다(카일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을 경우 자신이 매우 앳되어 보인다는 점을 증오했다).
그에게 머리를 정돈할 여유가 없다는 건 내게 썩 좋은 신호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카일도 나처럼 허우적대는 중이라면 도대체 누가 우리를 혼란에서 구해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반신이 마비된 케이시, 목숨을 잃은 메이나드, 사라진 블로썸과 나타난 글씨, 진절머리 나는 불운과 불행으로부터 말이다.
“블로썸이 돌아 버린 이유는… 사람들을 조종하고, 널 곤경에 빠뜨리고, 결국 메이나드랑 노먼을… 걔를 그렇게 만든 건 나일지도 몰라. 아니, 나일 거야.”
퍽 심상찮은 말투도 신경이 쓰였다. 나는 초조한 듯 이리저리 발을 옮기는 카일을 잠자코 시선으로 쫓았다. 자세히 보니 그의 눈 밑이 시커멨다.
“전에 말했잖아. 블로썸은 우리와 다르다고. 걔는 게임과는 완전히 별개의 존재야. 그러니 엄밀히 따지면 ‘로즈마리 블로썸’조차 아니라고 할 수 있지. 블로썸의 탈을 쓰고 있는 ‘플레이어’라고 표현해야 정확하겠네.”
“‘플레이어’….”
“그래. 저거.”
카일이 내가 들어온 창밖을 턱짓했다. 사나운 할머니 고양이가 찢어 놓은 냅킨처럼 잘게 쪼개진 구름 사이로 글자가 깜빡거렸다. 최초에 발견한 순간으로부터 수십 분은 족히 지났는데 숫자에 변함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것과 내 시간은 다르게 가는 모양이었다.
[플레이어의 생체 반응 정지까지 24시간 37분 남았습니다.]
별안간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블로썸이 어떤 지옥에 살고 있었는지 단번에 깨달은 탓이었다. 멋진 남자애들의 사랑을 받는 열아홉으로 살길 반복하며 그토록 불행해 보였던 이유도.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다가 겨우 침대에 걸터앉았다. 예고 없이 맞닥뜨린 버거운 진실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돌이켜 보면, 블로썸은 ‘주인공’이 죽지 않는다고 했지 ‘플레이어’가 죽지 않는다고 한 적이 없었다. 또 반드시 올해 진엔딩을 봐야 한다며 벼랑 끝에 몰린 사람처럼 굴기도 했다. 카일의 말마따나 블로썸이 ‘플레이어’라면, 그녀를 몰고 간 것은 시간이 분명했다.
블로썸을 돕고 싶었다. 동시에 영원히 반복되는 5학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또 배경 인물이 아닌 아리엘 달튼으로 살고 싶었다. 완전히 똑같이 빛나는 모든 실을 물레의 실감개에서 풀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화살 하나로 구울 여러 마리를 꿰뚫기란 욕심이었으며 옳은 선택에도 언제나 그림자가 졌다. 주인공이 되어도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했다는 거다.
“지금 시스템이 인식하는 주인공은 너야. 내게 보이는 호감도가 확 바뀌어서 알았어. 아마 너한테도… 변화가 일어났을 거야.”
그의 말대로였다. 블로썸이 대형 사고를 치고 게임에서 이탈하자마자 배경 인물이 접근해선 안 되는 정보가 내 시야에 냅다 박히기 시작했다. 더구나 전날까지만 해도 나를 적대하던 블로썸 추종자들의 기세가 티 나게 누그러졌던 것이다.
내 생각에 그건 시스템이 나를 주인공으로 판단한 까닭인 듯했다. 하여간 진짜 소름 끼쳤다. 물레가 자아낸 실이 어디까지 얽혀 있는지 모르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직접 확인하자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단순히 주인공이 된 거라면 상관없어. 만에 하나, 네가 플레이어의 자리마저 이어받게 된다면….”
플레이어의 생체 반응은 곧 정지된다. 플레이어는 주인공이다. 현재 시스템은 나를 주인공이라 여기고 있다. 나는 카일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깨닫고 팔뚝에 돋아난 소름을 쓸어내렸다.
“플레이어가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된 건 아마도 내 탓이야. 내 손으로 너를 사지에 몰아넣은 꼴이라면, 그러면 도무지 나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어. 그리고….”
“만약에 내가 플레이어인 채로 24시간 37분이 지나면 블로썸은 살 수 있는 거야? 내 말은, 혹시나 해서….”
내가 운명의 물레를 부수려면 게임이 무너져야 했다. 블로썸이 게임을 유지하려고 했던 까닭은 24시간 37분 후에 죽기 싫어서였다. 만일 생체 반응 정지 처리의 대상이 그녀가 아니라면, 블로썸은 게임이 무너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게 틀림없었다.
여태껏 나는 블로썸과 내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하는 줄만 알았다. 나란히는 아니어도 함께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택하지 않기란 얼간이 짓이라고 느꼈다. 비록 약간의 희생을 동반하긴 하지만 말이다. 솔직히 블로썸은 크리스타 에드워즈 이상으로 적대하는 것보다 협력하는 게 이득인 애였다. 예뻐서가 아니라, 성가셔서.
“웃기지 마, 아리엘 미첼 달튼.”
그래서 운을 좀 떼어 봤는데, 카일은 상상조차 않았다는 듯 단칼에 끊어 냈다. 너무 험악하게 으르렁대서 미들 네임 불렀냐고 따지기도 뭐했다.
“이따위 헛소리 지껄일까 봐 너 안 만나려고 한 거야. 알기나 해?”
“몰라.”
“…….”
“네 말대로, 나 아무것도 몰라. 멍청해서 말이야. ‘패치 노트’의 찢어진 페이지에는 무슨 내용이 담겨 있는지, 플로렌스 벨의 세계는 정체가 뭔지, 내가 자살해야만 했던 이유도, 전혀 모르겠어. 사실 여태껏 네가 설명해 준 게임의 요소들도 반만 알아먹었다고. ‘플래그’나 ‘선택지’나 ‘세이브’ 같은 것들.”
사실 반이 아니라 삼분의 일만 알았지만 멍청해 보일까 봐 좀 과장해서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알려 줘. 전부 다.”
로즈마리 블로썸이 싫었다. 치가 떨렸다. 걔 때문에 어떤 개고생을 했는지 가늠도 못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울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적어도 고려하는 시늉은 해야 발을 뻗고 잘 것 같았다.
카일의 주장대로 플레이어의 삶에 시간제한을 건 것이 그라면 더욱 그러했다. 나를 극진히 여기는 소꿉친구이니만큼 그가 진 죄에 내 몫이 없기는 드물었다. 자고로 상인에게는 책임감이 덕목이었다. 군주의 덕목이 몰인정함과 잔인성이듯.
그래서 알아야 했다. 게임의 전부를. 내가 손에 넣은 것과 잃어버린 것을. 내 생각에 카일이 자책하는 이유가 단지 블로썸을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그녀가 진엔딩을 맞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용서하지 못하는 ‘카일 빌라드’가 과거나 미래 어느 순간의 그임을 직감했다. 아마도 나의 구멍 난 기억 속에 살고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