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61화 (161/178)

“기회와 희망, 진실과 믿음. 마지막으로 줄게. 여기서 포기해.”

이제 퍼셀은 블로썸을 외면할뿐더러 그녀를 원망하게 된 듯했다. 그의 엉덩이는 벤치 의자의 거의 가장자리에 걸려 있었으며 끈으로 동여맨 소시지처럼 올록볼록한 상반신은 블로썸 쪽을 향해 있지도 않았다.

한편 험프리스 교수는 자기 숨에 질식한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눈두덩이와 볼이 팬 각도가 세 시간 전보다 확연히 가팔랐다. 광대뼈는 너무 뾰족해서 망토를 걸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만… 그만할게요.”

그래서 블로썸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픽시의 날갯짓보다 작았지만 강당을 온통 메운 침묵보다 가벼웠기 때문에 벽에 이리저리 튕겼다.

“제가, 착, 각, 했어요… 달튼은… 저를 괴롭히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한순간에는 내게, 다른 순간에는 블로썸에게, 어떤 순간에는 켄드라나 휴스턴 교수에게 꽂혀 있던 색색의 시선은 이제 모조리 험프리스 교수가 쥔 법봉을 향했다. 무언의 압박에 못 이겨, 그녀가 지극히 천천히 나무망치를 휘둘렀다.

법봉이 세 번째 딱 소리를 냈을 때 나는 몸을 살짝 틀어 블로썸에게만 손바닥 아래 유리병을 보여 주었다. 짧고 통통한 털실이 입구 주변에 앙증맞게 둘린 병 안에는 빨간 색소를 탄 물이 들어 있어서, 슬슬 흔들면 실없이 찰랑거렸다. 짓궂게 눈썹을 들썩이자 블로썸은 그제야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입매를 잘게 떨었다.

블로썸이 내 자물쇠에 입력한 번호는 그녀의 사물함 비밀번호가 아니었다. 또 블로썸의 방에는 구울의 피 같은 건 없나 보았다. 아나이스는 일부러 유리병을 양손으로 완전히 감싸서 가져왔는데, 그것은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는 의미였다. 일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카일이 손을 잡아 준 덕에 가까스로 천연덕스럽게 굴 수 있었다.

카일은 셈하기도 어려운 시간 동안 피츠시몬스의 학생이었다. 그래서 일반적인 학생이라면 전혀 모를 만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마법 약 교실의 벽 선반에 어떤 재료가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늘어져 있었는지.

하필 카일이 블로썸의 방으로 갈 것을 자처한 이유는 그가 여자 기숙사 사감을 입 안의 혀처럼 다룰 수 있어서이기도 했으나, 망토 속 유리병과 테이블이나 선반에 놓인 유리병을 솜씨 좋게 교체할 할 수 있어서이기도 했다.

내 손아귀 속 유리병은 카일이 만일의 경우를 위해 기숙사를 나서는 순간부터 줄곧 품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자기가 바꿔치기한 가짜 구울의 피를 발견하고 레이디 에드워즈 앞에서 갖은 호들갑을 떠는 카일을 상상하며 키득대었다.

퍼셀은 원고석 테이블에 엎드린 블로썸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배심원석하고 방청석은 블로썸과 나를 대놓고 삿대질하며 수군거렸다.

아마 어느 쪽에도 긍정적인 이야기는 오가고 있지 않을 것이었다. 나더러는 지독하다고 하겠고 블로썸에게는 착한 줄 알았는데 죄 가식이었냐는 둥, 이래서 평민은 안 된다는 둥 떠들겠지. 원래 대중이라는 게 다 그랬다.

또한 발 디딘 데가 높을수록 추락도 긴 법이었다. 블로썸을 씹는 이빨은 나를 씹는 이빨보다 날카로울 것이 분명했다. 그마저도 시시비비가 끝까지 가려지지 않았으니 망정이었다. 어찌 되었든 자작극이 확실히 밝혀진 것이 아니고, 맹목적인 추종자층이 두터웠으니만큼, 일부는 여전히 나를 독거미라 칭하고 블로썸을 비호할 것이었다.

내 명예는 너무 바닥을 기어서 갈 곳이라곤 위밖에 없었다. 근데 블로썸과의 싸움에 내 모가지를 매달아 놓은 밧줄, 내 등을 두드리는 채찍은 사실 고작 명예 따위가 아니었다.

로즈마리 블로썸이, 학생회의 공주님이자 피츠시몬스의 성녀가, 게임의 주인공이, 졌다. 피츠시몬스의 별것도 아닌 아리엘 달튼에게. 예쁘지도, 상냥하지도, 똑똑하거나 마법에 뛰어나지도 않은 게임의 배경 인물에게. 오늘의 승리가 나와 카일에게 가지는 상징성은 감히 가늠도 못 했다.

걸음 보조기에 의지하여 일어서는 블로썸의 안쓰러운 꼴을 보노라니 후련한 기분과 답답한 기분이 동시에 났다. 넘쳐나는 신성력으로 충분히 회복했을 거고, 걸음 보조기는 연출에 불과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편없이 비틀대는 모양새가 충격이 여간 큰 게 아닌 모양이었다.

원수지간에도 코가 찡해질 정도로 가련한 모습에 블로썸의 추종자 몇몇이 방청석에서 득달같이 뛰어나왔다. 그중에는 걸음 보조기에서 막 벗어난 미케일라 메이나드도 있었는데, 절뚝거리면서도 열심히 뛰는 그녀의 정성이 가상했다.

그때 문득 눈앞이 어둑해지더니 이상한 화상이 떠올랐다. 반투명한 회색과 푸른색의 네모 너덧 개가 차곡차곡 겹친 형태로 나타났는데, 묘한 글자들이 그 위를 장식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 중 일부를 겨우 읽었다. <금주의 새 소식>, <일일 미션>, <도전 과제>, <특별 판매>….

다음 순간 시야가 바로 맑아졌다. 거기에 있는 반투명한 네모라고는 여전히 슬프기 그지없는 수치를 기록하는 나의 ‘상태 창’뿐이었다. 되새겨 보니 색감이나 생김새가 꽤나 비슷한 듯했다. 어쩌면 <금주의 새 소식>이나 <일일 미션>, <도전 과제>는 ‘상태 창’처럼 게임의 어떤 정보를 알려 주는 장치일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마침 나를 보고 있던 블로썸과 눈이 마주쳤다. 동공이 크게 열린 그녀의 눈에 명확한 패배감이 떠올라 있어서, 블로썸이 방금 상실한 것이 무엇이고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즉시 짐작했다.

삼 초 남짓한 시간 동안 시스템이 누구를 주인공으로 판단했는지. 전율이 등줄기를 관통했다.

***

승리를 기념하는 간이 연회가 여자 기숙사 4층에서 조촐히 열렸다. 연회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학생 자치 법정의 주역인 나와 켄드라였다. 뒤이어 각자의 자리에서 다양한 방면으로 힘을 써 준 친구들과, 켄드라 브래들리 선거 대책 위원회가 도착하니 좁은 복도가 과히 북적거렸다.

원래는 카일과 제이든과 브레넌도 끼워 주려고 했으나, 여자애가 대다수라서인지 다들 내키지 않아 보였다. 카일에게는 특별한 활약에 대한 감사를 표해야 했으므로 그와의 약속은 따로 잡았다.

세 시간여에 달한 학생 자치 법정에서 괴롭힘 사건에 대해 확실히 밝혀진 바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블로썸이 내게 씌운 누명을 거두어 가기로 결심한 이유가 스스로 밝힌 대로 착각이나, 아니면 나를 걱정해서라고 믿는 사람은 그녀의 지독한 추종자 외에는 없을 것이었다. 나로서는 만족하지 않기 힘든 성과였다.

그래서 브리아나 모슬리의 금화 주머니가 활짝 열렸다. 저녁을 먹고 나오면서 브리아나는 매점을 식당에서 내 방으로 고스란히 옮겼다. 테이블 그리폰 크리켓 오락기-테이블에 매달린 인형들을 움직여 그리폰 크리켓 시합을 재현하는 마도구였다-를 침대 사이에 쑤셔 넣고, 선반마다 간식거리를 놓느라고 브리아나가 고이 모시는 <미남들>은 잠시 그녀의 가방에 처박혀야만 했다.

극히 일부를 제외한 여자 기숙사생 전부가 내 방에 들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다수는 간식을 얻어먹기 위해서였는데, 내게 학생 자치 법정의 감상을 전하러 온 머릿수도 제법 되어서 적잖이 놀랐다.

그 고맙거나 간사한 무리에는 메건 클리블랜드처럼 나를 헌신짝으로 다룬 애도, 심지어 적극적으로 내게 못된 소리를 지껄이거나 쓰레기를 집어 던진 애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전자의 품에 맛대가리 없는 과자 봉지를 안겨 주었다. 후자에게는 근래 연마한 간지럼 마법으로 본때를 보였다. 걔네들 덕분에 내 장난 마법 실력은 정말이지 일취월장했다.

밤이 새도록 과자와 수다로 주둥이를 메웠다. 학생 자치 법정에 직접 참여하여 나와 블로썸 사이 공방을 목격한 탓인지, 웬일로 레이디 에드워즈도 늦은 시간까지 시끄럽게 구는 우리를 가만히 놔두었다. 백 피트 물속은 알아도 일 피트 일레스티아인의 속은 모르겠다는 생각을 계속 했다.

아무튼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주정뱅이처럼 놀았다. 특히 켈리는 틈만 나면 쌤통이라고 외쳐서 테이블 그리폰 크리켓을 하거나 체스를 두느라고 집중한 애들을 놀라게 했다. 켈리가 그 단어를 얼마나 자주 입에 담았냐면, 아나이스는 그녀의 입에서 ‘쌤통’이 나올 때마다 은밀히 손을 꼽았는데, 자기 방으로 돌아갈 때 걔의 손가락은 쉰둘까지 구부러져 있을 정도였다.

동이 틀 즈음 잠자리에 들었다. 학생회장 선거일에는 수업이 없어서 일정 수준의 늑장은 피워도 되었다. 켄드라가 정말 대단한 것이, 삼십 분도 못 자고 투표소에 마련된 자신의 사무실로 가야 했는데도 간이 연회의 시작과 끝을 모조리 봤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유권자를 확보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진짜 학생회장 아무나 하는 거 아니었다.

학생 자치 법정에서 두 번째 부탁을 써먹어서 켄드라는 휴스턴 교수에게 단 하나의 부탁만을 더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최후의 부탁은 최초의 부탁과 다양한 부분에서 닮아 있었다.

투표용지를 네 번 접은 뒤에 투표함에 넣는 행위는 얼핏 투표처를 가리기 위한 목적 이외에 무엇도 암시하지 않는 듯이 느껴졌다. 하지만 특정 후보의 지지자로 알려진 사람들이 전부 투표용지를 네 번 접는다면, 그건 그들이 공유하는 신호처럼 보일 게 분명했다.

켄드라 브래들리 선거 대책 위원회는 일부러 휴스턴 교수가 투표한 직후에 함께 투표소로 향했다. 대충 스무 개의 조그마한 종이들이 투표함에 쌓인 이후에 휴스턴 교수는 네 번 접힌 투표용지가 가지는 함의를 깨닫게 되었다. 그가 켄드라 브래들리 선거 사무실을 찾아와 칭찬과 비난을 동시에 했을 때, 나는 휴스턴 교수의 등에서 여전히 빛나는 백합 무늬에 웃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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