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당에서 벌어지는 것은 더 이상 재판이라고 할 수 없었으며 다만 하나의 촌극에 불과했다. 퍼셀과 블로썸, 두통에 굴복한 험프리스 교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내 흠결을 찾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세 사람은 마치 크리스타 에드워즈라도 씐 듯이 정수리에 솟은 잔머리부터 발뒤꿈치에 난 상처까지 나의 전부를 들쑤시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성질 엄청 부리면서 대들었겠으나 그들이 다급해진 이유를 아니까 도리어 관대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허허거리며 내게 쏟아지는 모든 공격을 받아넘겼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고요? 솔직히 그건 블로썸도 똑같은 것 같은데요.’ ‘못됐다고요? 어휴, 그럼요. 지지리도 불공평한 세상인데 제 수프 볼이라도 챙기려면 못돼 먹어야지 어쩌겠습니까.’ ‘고집부리지 말고 인정하라고요? 카일하고 아나이스가 빈손으로 돌아오면 인정할게요. 쫄리면 뒈지시던가.’
나무망치가 마지막으로 나무판과 맞닿은 이후, 엉덩이가 배길 정도로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휴정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배심원석에서 아까부터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안달하던 2학년 남자애가 죽을 상을 할 때쯤에 모든 소동에 질려 버린 것은 의외로 퍼셀이었다.
비라도 맞은 듯이 늘어진 앞머리를 양 검지로 가르며, 그가 블로썸에게 대고 입술을 벙긋거렸다.
“정말 자작극이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켄드라가 내 귀에 바짝 붙어 속달댔다. ‘지랄 났네요.’ 그녀는 천박한 단어를 퍽 우아하게 발음하는 법을 알았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리고 배심원 여러분.”
퍼셀이 귀에다가 대고 침을 튀기는 동안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겨 있던 블로썸이 문득 말했다. 고개는 어디라고 하기 어려운 허공을 향한 채였으며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교칙 제89조 2항에 이런 내용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원칙적으로 배심원은 평의를 진행하여 만장일치로 평결에 이르러야 한다. 다만, 다음 각호에 해당하는 경우 재판장은 배심원의 관여 없이 임의로 교육 처분을 부과할 수 있다. 하나. 심리가 세 시간 이상 지속되었을 때. 둘. 피고인이 아카데미의 명예를 지나치게 실추시킨다고 판단되었을 때.’”
더듬거나 말미를 주지 않고 줄줄 읊어 내려가는 낭랑한 목소리에 조종이라도 당하듯, 험프리스 교수는 테이블에 놓인 아카데미 규정서를 펼쳐 넘겼다. 퍼셀과 켄드라도 그렇게 했다. 이윽고 켄드라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팼다.
“그 말대로네요.”
켄드라가 혀를 되게 찼다. ‘토씨 하나도 안 틀렸어요.’
반면 퍼셀은 돌연 득의양양해졌다. 그는 언제 블로썸에게 저주를 퍼부었냐는 듯이 산뜻한 태도로 블로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오물이라도 닿은 양 멀찌감치 피하는 블로썸이 퍽 재밌었지만, 재미 같은 걸 느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퍼셀이 말했다.
“기회와 희망, 진실과 믿음. 피츠시몬스 아카데미가 추구하는 가치이죠. 누구보다 강한 믿음을 지닌 평민 소녀가 기회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피츠시몬스에 발을 들였음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내 무엇이 되돌아왔던가요? 계급주의자의 무자비한 발길질이지 않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미스 달튼은 거짓으로 우리 모두를 농락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아카데미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음은 명백합니다.”
“잠시만요!”
“심리 개시 이후 세 시간은 족히 지났습니다. 또한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배심원의 의견이 일치할 날은 요원한 모양이네요. 그렇지요, 배심원 대표?”
배심원석의 가장 오른편에 앉은 4학년 남자애가 고개를 끄덕이니 부지불식간에 블로썸과 내 처지가 뒤바뀌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무망치를 집어 든 험프리스 교수에게 켄드라가 다급히 매달렸다.
별 소용은 없었다. 험프리스 교수가 굉장히 시혜적으로 굴며 더는 물고 늘어지지 않는 조건으로 켄드라에게 제시한 것은 질문 하나가 전부였다.
그리하여 켄드라와 나는 턱을 매만지며 깊은 고민에 잠겼다. 엄청난 은혜라도 베푸는 태도와 달리 여유라고는 쥐똥만큼도 주지 않았으므로, 적어도 내 뇌리에 기적적으로 기똥찬 돌파구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켄드라는, 미래의 학생회장은 조금 달랐다. 짧은 침묵 후에 그녀가 내뱉은 이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휴스턴 교수님.”
사건의 관련자인 블로썸도, 나도 아니고 퍼셀이나 증인들도, 하다못해 재판장인 험프리스 교수도 아닌 휴스턴 교수를 끄집어내는 켄드라에게 당황과 의문이 반씩 섞인 눈길이 왕창 꽂혔다. 놀라기는 지목 대상이 된 휴스턴 교수도 매한가지여서, 켄드라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와중에도 그는 거듭해서 엄지손가락으로 스스로의 가슴을 찔러 확인했다.
혼란에 빠진 휴스턴 교수를, 켄드라는 끈덕지게 기다려 주었다. 더욱 큰 혼란을 선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휴스턴 교수에게 스티아 성가 중 <약속 안에 거하리>를 불러 달라고 요구하자 강당은 시장통으로 일변했다. 정말이지 뜬금이 하나도 없었다.
질 것 같으니까 맛이 갔나 보다고 비웃는 무리도 있었고, 켄드라가 나를 내다 버린 게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무리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무슨 의도에서 중요한 시점에 성가 따위를 꺼냈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휴스턴 교수의 융통성은 크리스타 에드워즈의 인간성 이상으로 희박했다. 사건과 일말의 관련성도 없는 질문이 용인될 리가 없었다. 원래 같았으면 말이다.
켄드라가 약속을 운운하는 한은 달랐다. 그녀는 아직 휴스턴 교수에게 망토를 갈아입어 달라는 것 이외의 부탁을 하지 않았다.
처음에 퍼셀은 얼핏 자충수를 둔 것처럼 보이는 켄드라를 비웃고나 있었으나, 휴스턴 교수의 입술이 열린 지 삼 분이 지나자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의 음성이 멈추지 않는 이상 험프리스 교수는 나에게 교육 처분을 부과할 수 없을 것이었다.
‘고지식한’이나 ‘재미없는’이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만든다면 그건 바로 휴스턴 교수였다. 신성한 법정에서, 그것도 판사석에 서서, 냅다 노래를 갈기는 휴스턴 교수를 구경하기란 여간 진귀한 경험이 아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의 발끝은 나와 켄드라와 나란한가 보았다.
쪼끔 감동적이었다. 실은 쪼끔 많이. 두 번밖에 남지 않은 기회를 나를 위해 소진한 켄드라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전교생 앞에서 성가를 열창하는 휴스턴 교수도, 갈 곳 없는 처지에도 나를 감싸려 들었던 브리아나도. 또 두 마리 벌을 노련하게 조종한 켈리와, 지금쯤 블로썸의 방이나 사물함을 죽어라 하고 뒤지는 중일 아나이스와 카일도.
모든 노래에는 끝이 있었다. <약속 안에 거하리>는 매우 길고 느린 곡에 속했으나, 유의미한 시간이 끌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의 왼편에서 험프리스 교수가 음성이 끊기는 찰나를 노려 법봉을 내려치기 위해 준비 중인 까닭이었다. 내가 피츠시몬스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5학년 2학기 퇴학생으로 거듭날 순간이 목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등을 받치는 손을 세다 보니 하염없이 낙천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또 퇴학을 당한다고 해서 아카데미에 발도 못 붙이리라는 법은 없었던 것이다. 들숨을 그러모아 음을 늘리느라고 사정없이 떨리는 휴스턴 교수의 목소리를 귀에 담으며 글로윈 숲에 숨어 살 계획을 세우던 찰나였다.
“아리엘!”
활짝 열린 뒷문으로 빛이 쏟아 들어와 카일과 아나이스와 레이디 에드워즈의 뒤를 밝혔다. 특히 레이디 에드워즈가 있는 쪽에서는 광량이 얼마나 강한지 그녀의 목 위에 빛 덩어리가 놓인 듯했다. 절묘하게도, 내가 묘사했던 스티아 신을 쏙 빼닮은 모습이었다.
여태껏 5학년을 평생 반복할지라도 레이디 에드워즈를 반갑게 여길 날은 안 올 거라고 굳게 믿었던 터라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고 앉은 자리에서 마구 들썩거렸다.
둥근 형태에 코르크 마개로 밀봉된 유리병은 아나이스의 품에서 나왔다. 카일이 숨을 헐떡이는 아나이스로부터 유리병을 전달 받는 동안 레이디 에드워즈는 오른손을 들고 간단하게 선서하며 그것이 블로썸의 소유물임을 맹세했다.
유리병을 건넬 때, 카일은 내 손을 꼭 쥐었다 놨다. 나는 그가 자주 하는 장난스러운 눈짓으로 카일에게 감사를 표한 뒤 겹친 손안에 유리병을 두었다. 그러고 나서 블로썸을 빤히 봤다. 그녀는 강당의 문이 열린 시점부터 완전히 사색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