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물이나 날붙이가 걸러질 수 있다는 사실은 알았죠. 그러니까 굳이 칼이 아니라 깃펜 같은 걸로 어렵사리 교복 치마를 찢은 거 아니겠어요? 깃펜은 학생회가 거르는 ‘날붙이’가 아니면서 종이나 얇은 천을 잘라 낼 만큼 날카로우니까요. 또 섬뜩한 효과를 주기도 하고요. 미스 블로썸이 몰랐던 건 다른 부분이에요. 단독으로 사용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뾰족가시 달팽이 점액과 섞이면 순간적으로 연소되는 구울의 피가, 엄연히 폭발물로 분류된다는 것.”
“말도 안 됩니다! 미스 블로썸은 5학년 전체 수석이에요! 그녀가 구울의 피가 지니는 성질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말이 되어 버렸네요. 그렇죠, 미스 블로썸?”
계속해서 침을 삼키며 튀어나오려고 하는 심장을 도로 넘겼다. 턱에 힘을 주고 블로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법 약재의 성질에 대해 주로 탐구하는 것은 저학년 마법 약 수업입니다. 미스 블로썸은 피츠시몬스 역사상 유례없는 5학년 편입생이고요. 뭐, 원한다면 저학년 수업을 들을 수야 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건 이미 아시지요.”
사실 그것만이 학년 수석인 블로썸이 구울의 피에 대해 잘 모르는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언젠가 궁금증을 참지 못했던 나는, 발만큼 눈치도 빠른 카일에게 호된 창피를 당할 각오로 상태 창과 지력 수치에 대해 캐물었다. 그러자 그는 게임에서 지력이란 대상이 얼마나 똑똑한지가 아니라 시험을 얼마나 잘 보는지를 나타내는 수치라고 말해 주었다(그 시점에서 카일은 내 지력 수치가 완전히 바닥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으나 기특하게도 나를 놀리지 않았다.).
확실히, 누군가의 코를 갑자기 오뚝하게 만들거나, 힘을 강하게 하거나, 마법의 위력을 더하는 것과, ‘똑똑하게’ 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다. 내 머릿속에 절망을 속삭일 때와 같이 마과학 이론을 속삭인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흡수-배출 구조에 통달하게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시스템이 선택한 방법은 ‘보여 주는’ 것이었다. 스티아의 교리에서 부정한 자를 벌 주는 방법을 물었을 때 블로썸은 눈꺼풀 안쪽을 열심히 뒤진 다음 대꾸했다. 마치 거기에 답이 쓰여 있기라도 한 것처럼.
시스템이 높은 지력 수치에 대응하는 방식은 바로 그것이었다. 누군가 질문했을 때나, 과제를 작성할 때나, 시험지를 더듬었을 때 눈앞에 정답을 띄워 주는 것.
학년 수석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블로썸은 구울의 피가 폭발물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몰랐다. 그것을 훔치고, 자작극을 일으키고, 나무함에 담아 골 때리는 선물 교환식에 제출하기까지.
“폭발물이나 날붙이를 담았을 경우 날다람쥐 집배원은 선물을 보낸 사람에게 되돌려 주죠. 처음에 나무함을 도로 받고 나서 미스 블로썸은 꽤나 당황했을 거예요. 깃펜은 날붙이로 분류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럼 다른 게 문제인가? 설마?”
한 번 보냈던 날다람쥐 집배원이 돌아왔을 때 블로썸은 구울의 피가 실은 폭발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급하게 계획을 수정해야 했으나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그럴싸한 계책을 짜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학생회 일원으로서 행사를 진행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또 인기인인 그녀를 주시하는 눈은 언제나 있어 왔으므로 큰 동작으로 허둥지둥 움직이기란 어려웠다.
그래서 구울의 피를 뺀 깃펜만이 나에게 왔다. 만일 블로썸이 조금이라도 한가했다면, 생각할 말미가 약간이라도 있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소행을 밝히는 증거를 스스로 손에 쥐여 주는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처럼.
“여기서 문제. 그렇다면 이 순간 구울의 피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첫 번째, 미스 블로썸의 방. 두 번째, 미스 블로썸의 사물함. 세 번째, 내 친구들의 주머니.”
“도둑, 도둑질이에요!”
블로썸이 황급히 외쳤다. 드디어 뭣 됐다는 사실을 실감했나 보다. 나는 참지 못하고 깔깔거리고 말았다.
“지금 제 친구 한 명이 여자 기숙사 사감인 레이디 에드워즈를 만나고 있을 것 같은데요. 걔가 또 민첩성과 눈치만큼이나 이거로는 이름난 자식이라.”
입가에 손을 대고 쥐었다 폈다 하자 다들 블로썸의 방으로 카일 빌라드가 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레이디 에드워즈가 기꺼이 카일의 수족이 되어 블로썸의 방을 샅샅이 뒤질 것도. 퍼셀은 이제 흙으로 빚은 것처럼 회갈색이 되었다.
“사물함은, 보통 사물함에는 자물쇠를 걸어 두잖아요? 자물쇠는 올바른 마나를 흘리거나 비밀번호를 알지 못하면 못 열고요. 이게 또 재미있는 부분이거든요. 이 자물쇠, 기억하시나요?”
어느새 내 손아귀에는 익숙한 감촉의 쇳덩어리가 올라와 있었다. 켄드라가 쥐여 준 것이었다. 원통형 자물쇠의 고리는 무력하게 벌어져 있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기적 어쩌고 떠들어 댄 건 죄 헛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제가 이 자물쇠에 블로썸이 어떤 번호를 입력할지 어떻게 알았을까요?”
퍽 의기양양하게 나서자 켄드라가 은근슬쩍 코로 웃었다. 퍼셀은 마른세수를 했고 블로썸은 손끝으로 테이블을 연신 두드렸다. 신경에 거슬리는 불규칙한 마찰음보다 내 심장이 뛰는 속도가 더 빨랐다. 거기서 흘러나온 피가 머릿속을 뱅글뱅글 돌면서 묘한 쾌감을 선사했다.
“몰랐습니다. 전혀 몰랐어요. 쟤 생각을 제가 어떻게 알아요? 하지만 이게 열릴 거라는 사실은 알았죠. 실은 이건 제 사물함 자물쇠인데, 고장 난 지 오래라서 아무 번호나 입력해도 열리거든요.”
고리를 눌러 자물쇠를 잠근 다음 실린더를 만져 작은 세모꼴 장식이 가리키는 숫자가 ‘1234’가 되도록 했다. 고리에 검지를 걸고 수직 방향으로 힘을 주었더니 허무하게 딸려 올라갔다. ‘0000’으로 번호를 맞춰도, 손바닥에 실린더를 끼고 아무렇게나 비벼 돌린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독거미 달튼’의 악성 팬을 위시하여, 내 사물함 자물쇠가 망가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꽤나 많았다. 그걸 몰라도 조금만 머리를 쓰면 떠올릴 법한 허접한 사기였다. 하지만 나와 켄드라가 지극정성으로 꾸린 연출은 물론이요, 알음알음 성녀라 불리는 블로썸의 신성성, 학생 자치 법정의 함부로 입을 대기 어려운 분위기, 결정적으로 강당의 구조가 이 허접한 사기를 통하게 했다.
높게 솟아오른 연단과 그보다 높은 피고석, 전체적으로 어둑한 가운데 가늘게 쏘아지는 핀 조명, 대중을 속이기에는 딱 좋은 환경이었다. 선동과 날조로 승부하겠다는 나의 포부는 학생 자치 법정이 결정된 이래로 변한 바가 없었다.
“미스터 스톡스가 레프러컨 축제 기간에 판매한 자물쇠를 사지 않았다면 높은 확률로 아카데미에서 지급한 자물쇠를 사용할 텐데요. 이거랑 똑같이 생겼죠. 뇌리에 떠오르는 번호로 열어 보라고 했을 때, 어떻게 하셨나요? 눈에 익은 자물쇠에 무심코 손에 익은 번호를 입력하지는 않았나요?”
허리에 손을 대고 가슴을 내밀며 물었다. 그랬더니 블로썸은 기억을 되짚기라도 하는 듯이 눈을 막 굴렸다. 흐릿한 제비꽃색 시선이 왼쪽 아래에서 왼쪽 위, 오른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돌아갔다. 그녀에게 생각할 말미를 주고 싶지 않았으므로 곧장 말을 붙였다.
“레이디 오브라이언은 바로 그 번호를 가지고 미스 블로썸의 사물함으로 달려갔죠. 그리고 저는 그녀가 자물쇠를 풀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배심원 대표로 나온 4학년 남자애가 쥐고 있던 깃펜을 떨어뜨렸다가 주변의 눈총을 못 이기고 즉시 주웠다. 나는 걔네들의 애가 타고도 남을 만큼 오래도록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솔직히 말해서, 제게 확실한 증거물 같은 건 없어요. 다만 확실한 증거물을 기다리고 있죠. 미스터 빌라드와 레이디 오브라이언이 무엇을 들고 돌아올지 걱정이 된다면 가능한 한 서둘러서 재판을 끝내야 할 거예요.”
재판을 끝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내게 씌워진 혐의를 입증하거나, 누명을 거두는 것. 블로썸 입장에선 입증을 하고야 싶겠으나, 준비한 증거와 증인이 모조리 무너진 시점에서 배심원 전원을 설득시키기란 <말싸움 무패 신화>의 저자 휘태커 판사가 나타나도 불가했다.
그렇다고 해서 진절머리가 나는 아리엘 달튼이 무죄로 풀려나는 꼴을 얌전히 지켜볼 것이냐 하면, 블로썸이라면 그러지 않을 게 틀림없었다. 여섯 번째 아리엘 달튼은 로즈마리 블로썸이랑 너무 자주 부딪힌 탓에 걔가 어떤 앤지 살짝 알게 되었다.
최후의 방법이 있기는 했다. 치트로 강당에 모인 전교생의 의식을 속이는 것. 근데 블로썸은 요 며칠 나를 피츠시몬스에서 치우겠다는 일념하에 케이틀린 대제의 조언일랑 개만도 못하게 여겼다. 무리해서 치트를 사용했다는 거다. 덕분에 물레가 만신창이가 되었으니, 정말로 더는 나대어선 안 되었다.
머리카락을 그러쥐는 블로썸의 손등 위로 날카롭게 솟아오른 뼈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고민이 많이 되는 모양이었다.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켄드라와 손장난을 쳤다. 어차피 나로서는 상관없는 고뇌였다. 블로썸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 지독하게 매달려 시간을 끌 예정이었으니까.
내게 시련을 내리기 위해 일부러 자작극을 벌였다? 그런 형편 좋은 포장지를 씌워 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얼마나 끔찍한 사정이 있고 얼마나 험준한 벼랑 끝에 서 있건 간에, 잘못을 했다면 책임을 져야 했다. 기왕이면 모두의 앞에서.
다행히 나의 말꼬리 잡는 실력은 연기력보다 열 배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