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조던 니콜스 또한 애덤 월시에게 그다지 달가운 존재는 아니었다. 페드로 캔트렐을 바보 만들며 썸 탔던 시절이 있기는 했지만, 원래도 삐걱거렸던 둘의 관계는 골 때리는 선물 교환식 사건을 통해 아예 종지부를 찍었다. 좀스러운 월시는 니콜스가 자기 선물을 ‘먹튀’했다는 사실에 과도하게 반응했다.
“레이디 니콜스의 글씨입니다.”
당시 상황을 돌이키다 보니 새삼스럽게 열이 받는지, 월시가 씩씩거리며 내뱉었다.
“감사합니다.”
원하는 답을 얻어 내는 데 성공한 켄드라는 진심이 느껴지는 감사 인사와 함께 월시를 물렸다. 그러고 나서는 즉시 니콜스를 불러냈다. ‘계획이 약간 틀어지긴 했지만….’ 중얼거리는 그녀의 품에 투박하게 생긴 나무함이 안겨 있었다.
“이 나무함은 미스 달튼이 레이디 니콜스가 쓴 쪽지를 통해 발견한 ‘골 때리는 선물’입니다. 레이디 니콜스, 어째서 미스터 월시와 선물을 교환하기로 해 놓고 미스 달튼에게 쪽지를 썼죠?”
‘참고로 필적 감정은 이미 마친 상태입니다. 발뺌해도 소용없어요.’ 켄드라의 은근한 협박에 니콜스는 퍽 혼란스러워진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니콜스 스스로도 그녀가 나한테 쪽지를 썼는지 안 썼는지, 썼다면 왜 썼는지, 무슨 선물을 무슨 까닭에서 했는지 애매모호한 형태로만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기억이 또렷하다 해도 이해는 되지 않을 거였고. 블로썸이 내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주입할 때 나는 분명히 의식과 감각이 있었지만 죄다 간유리 너머에 둔 듯이 먼데다 불투명하게 느껴졌다.
허리를 쫙 편 켄드라와 잔뜩 움츠러든 니콜스의 대비되는 자세에서 진실을 가려낸 퍼셀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로서는 처음 접하는 정보인가 보았다. 퍼셀이 부들부들 떨며 니콜스를 쳐다보자 그녀가 혼비백산하여 둘러대었다.
“그건, 그러니까, 갑자기 그러고 싶어져서….”
“레이디 니콜스!”
진하게 풍기는 자폭의 향기에, 퍼셀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리고 깜짝 놀란 니콜스가 비명을 올리거나 말거나, 원고석과 피고석, 증인석 사이를 왔다 갔다 걸으며 횡설수설했다. 수심이 깊게 들어찬 이마에 흐르는 땀줄기가 한여름 소나기보다 굵었다.
“안에는 뭐가 들었죠? 열어… 아니 열지 말아 주세요. 아니….”
뭐가 어찌 되었든 켄드라는 아까부터 나무함을 열어젖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서리마다 나무 가시가 튀어나온 낡은 함은 켄드라의 거침없는 손길 아래 만천하에 그 속내를 드러냈다.
“보시다시피, 깃펜입니다. 썩은 냄새가 나는, 피 같은 게 잔뜩 묻어 있죠. 아마 미스 블로썸의 교복과 교재를 더럽힐 때 썼던 것과 동일할 겁니다. 아카데미 내에서 구울의 피를 구할 경로는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피고가 몇 달 전 마법 약 교실에서 훔친 것으로 알려진 구울의 피 말이죠.”
“과연 그럴까요? 이 나무함을 피고에게 전달한 것이 누구인가요?”
내가 봤을 때 제럴드 퍼셀은 담이 너무 작아서 동생을 때리다가 들킨 신시아 빌라드보다 임기응변에 서툴렀다(적어도 신시아는 꼬마 밴지의 머리통이 그녀의 손바닥이 향하는 곳에 갑자기 나타났다고 당당하게 주장할 줄 알았다). 순식간에 목구멍이 막힌 퍼셀이 허둥거리자 역시 이마와 관자놀이를 푹 적신 니콜스가 말릴 새도 없이 치고 들어왔다.
“저는, 그러니까, 쪽지만 썼어요! 깃펜은, 저런 나무함은 처음 본다고요! 제가 아니에요!”
“글쎄요. 애초에 선물을 교환하기로 한 파트너를 무시하고 친분이 없는 미스 달튼에게 쪽지를 보낸 이유는 뭡니까?”
“말했잖아요! 갑자기 그러고 싶어져서….”
“변명이 되지 않는군요. 레이디 니콜스는 미스 달튼에게 괴롭힘 사건의 증거물을 쥐여 주려고 했습니다. 그런 레이디 니콜스의 증언을 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합니까?”
켄드라의 무자비한 공격에 손가락 사이 말랑한 살을 무아지경으로 쥐어뜯는 니콜스는 부담감을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녀가 금방이라도 구토할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서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슬슬 이 재미없고 감동도 없는 연극의 막을 내릴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피고 측에 주장에는 정황 증거 외의 증거가 없습니다. 여기서 갑자기 레이디 니콜스에게 뒤집어씌우려고 들어도….”
“뒤집어씌우려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레이디 니콜스에게는요.”
퍼셀은 그의 말을 끊고 들어온 것이 나라는 사실에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볼살에 묻혀 거의 드러나지 않던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다 보였다.
“아무 일도 없는데 갑자기 월시를 개무시하고 제게 쪽지를 보내고 싶었을 수 있죠. 충분히 가능합니다. 저도 매일 아무 일도 없지만 갑자기 명치를 세게 때리고 싶은 인물의 목록이 존재하는걸요. 어차피 중요한 건 쪽지를 누가 썼느냐가 아니라 구울의 피가 묻은 깃펜을 누가 보냈느냐예요. 그리고 저는 처음부터 한 사람만을 지목했죠.”
“미스 달튼….”
질리지도 않고 블로썸을 물고 늘어졌다. 신경질이 난 듯이, 블로썸이 무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켄드라는 내 등을 지긋이 짚었다. 우리의 수신호에 따르면 헛짓거리 말고 짜져 있어야 했으나, 나는 되레 목소리를 높였다.
“좀 이르지만 괜찮을 거 같아요. 제 친구들을 믿으니까요. 카일은 원래 잽싸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애고, 아나이스는, 적어도 급할 때 걔는 진짜 빠르다고요. 그러니까 이쯤에서 집어치워도 될 거 같아요. 애초에 저는 뭘 숨기는 데 소질이 없거든요.”
“선배.”
“그래, 네 선배야. 하루아침에 웃기지도 않은 기적을 경험한 스티아 신도가 아니라.”
난데없이 떨어진 말의 폭탄이 강당을 꽉 메운 사람들을 전부 죽여 버리기라도 한 듯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누가 숨 쉬는 소리와 다리 떠는 소리, 옷깃이 스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요를 찢어발기며 입을 열었다.
“끝내주게 불리한 재판에 피고인 자격으로 출석하게 되고 나서, 제가 아는 모든 신에게 매일 같이 빌었죠.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내려 달라고. 그런데 아무리 빌어도 자비롭고 자애로운 스티아께서는 제 꿈에 나타나지 않으시더군요.”
하는 수가 없었다. 스티아는 뱅글뱅글 돌기만 하는 물레였고 다른 신들은 스티아가 자아낸 실의 반짝임 어드메에 있었다. 스스로 어떻게든 해야 하겠다는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가진 것들을 처음부터 찬찬히 검토해 봤다. 거머리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끈질긴 성격, 내가 아는 가장 지독한 여자애로부터 인정받은 튼튼한 몸뚱어리, 가당치 않게 훌륭한 친구들, 걔네가 나에게 무엇을 선사했는지 생각했다.
그러다가 발견했다. 끝내 무너진 하늘에서 솟아날 구멍을 찾아내고 만 것이다. 역시 아무리 불공평한 세상에도 무작정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블로썸이 니콜스의 손을 빌려 내게 전달한 나무함을 펼쳐 들고 지껄였다.
“잘 봐 주세요. 달랑 깃펜 하나 들어가기에는 빈 공간이 수상하게 넓지 않습니까? 여기 원래는 뭐가 있어야 맞는 것 같습니까?”
“구울의 피!”
똑똑한 발음으로 떠든 것은 배심원석에 얌전히 앉아 있던 1학년 여자애였다. 코끝이 동그랗고 볼이 발그레한 그녀는 내 룸메이트와 상당히 비슷한 부류처럼 보였다. 누구보다 먼저 아는 체를 하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타입 말이다. 나는 그녀의 귀여운 허영심을 채워 주기 위해서 여자애를 콕 집어 가리켰다.
“맞아요. 구울의 피예요. 몇 달 전 마법 약 교실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빈 곳에 그게 들어가면 딱 좋을 것 같죠. 근데 왜 없을까요? 포장하다가 까먹기라도 한 걸까요?”
“대체 무슨… 수수께끼 장난이라도 치자는 겁니까?”
툴툴거리며, 퍼셀은 판사석을 자꾸 흘긋거렸다. 상념에 잠긴 휴스턴 교수, 흥미롭다는 듯이 목을 쭉 빼고 있는 드와이어 교수 사이로 콧잔등을 주무르는 험프리스 교수가 있었다.
근거는 없지만, 나는 험프리스 교수가 어떤 감상에 저항하는 중임을 직감했다. 내가 겪은 그녀는 항상 깐깐하거나 피곤해 보였으나, 근래처럼 그릇된 야망에 사로잡혀 막무가내로 굴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녀의 이성에도 비이성을 날름거리는 혀가 존재할지 몰랐다. 약간의 연민에 젖어 험프리스 교수를 보다가 말했다.
“그러지 말고 대답해 보세요. 어떤 연유로 구울의 피는 골 때리는 선물의 일부가 되지 못했을까요?”
“폭발물이 골 때리는 선물 교환식에 포함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피츠시몬스 학생은 없어요!”
“있어요. 여기.”
으쓱거리는 1학년 여자애에게 향해 있던 손끝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반 바퀴를 돌아 원고석으로 갔다. 그제야 블로썸은 스스로 어떤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달은 듯했다. 그녀가 이를 꽉 물자 안 그래도 불그스름한 입술에 핏기가 가득 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