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57화 (157/178)

“미스 블로썸의 신성력 폭주는 본 사건과 무관합니다! 이미 비의도적인, 사고로 결론 난 사안이고요! 피고 측은 전혀 관련 없는 일을 본 사건에 끌어들여 미스 블로썸의 명예를 훼손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퍼셀이 다급히 외치자 켄드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명예를 훼손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신성력 폭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니까요. 제가 궁금했던 건 실제로 폭주 사건이 일어났는지 여부입니다. 그런데 방금 원고 측에서 직접 증명해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켄드라가 능청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퍼셀의 볼살이 다시 한번 진동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켄드라는 원고석 테이블의 모서리를 짚고 느긋하게 기대었다. 그리고 블로썸을 향해 압박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퍽 멋들어진 동작이었다.

“미스 블로썸. 1학기 전체 수석을 차지할 만큼 뛰어난 인재이고, 그중에서도 신학과 치료술에 상당한 두각을 보인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대답 가능하시겠지요. 스티아의 교리상 부정을 행한 자는 어떻게 됩니까?”

블로썸이 분주하게 눈을 굴렸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인 듯했다. 카일에게 공략 대상들의 호감도가 보이고 나에겐 스스로의 처참한 능력치가 보이는 것과 같이, 아마도 그녀에게만 보이는 어떤 것을. 잠시 후 그녀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죄인이 청하여 가로되 부디 제게 가르침을 주옵소서 하매 그가 벌 위에 벌을 내리니 축복이 병자의 코끝처럼 곱아 들고 박쥐의 날갯짓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스티아의 축복이란 일반적으로 신성력을 의미한다는 것을 다들 아실 겁니다. 축복이 갈피를 잡지 못한다? 제 귀에는 폭주와 상당히 비슷하게 들리네요.”

켄드라가 검지로 귓바퀴를 툭툭 치며 내뱉은 말에 방청석에서 소란이 일었다. 아마도 블로썸을 응원하는 플래카드나, 그녀의 초상화를 손에 쥔 추종자들일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켄드라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점차 고조되어 갔다.

“생각을 해 봤습니다. 한참 고민했어요. 미스 블로썸은 스티아의 축복 그 자체예요. 그런 미스 블로썸이 폭주한다는 건 어떤 부정이 그녀의 손아귀에서 태어났음을 의미하죠. 그렇다면 어째서? 그토록 선하고 상냥한 미스 블로썸이? 미스 달튼에게 벌어진 기적이 아니었다면 아마 절대 실마리를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일부러 중간에 말을 늘렸다. 적절한 긴장감과 아주 많은 관심을 바라서였다. 나와 달리 켄드라는 핀 조명이 쏘아져도 별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 듯했는데, 그 증거로 그녀가 만면에 머금은 자신만만한 미소는 시선이 모이면 모일수록 짙어져만 갔다.

마침내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이목을 끌었다고 판단했는지, 켄드라가 힘찬 동작으로 팔을 벌려 블로썸을 가리켰다. 망토가 크게 펄럭이며 가슴팍에 단 백합 모양 액세서리가 반짝였다. 내가 성스러워 보이는 각도를 연구하는 동안 미래의 학생회장은 저걸 날리는 각도를 연습하고 있었다.

“미스 블로썸의 부정. 자작극 말입니다.”

“또 근거 없는….”

“미스 달튼의 기적을 믿지 않는대도, 신성력 폭주가 부정을 증명함은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신성력 폭주… 그러니까 사고로 인하여 몇 사람이 피를 보았습니다. 그것이, 그, 미스 블로썸을 탓할 일은, 절대! 아니지만 그녀의, 어떤, 부정으로 여겨진 게 아닐까요? 제 말은….”

“아니요. 아니죠. 선후 관계가 달라요. 부정이 먼저 일어났기 때문에 폭주가 발생한 겁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안절부절못하는 퍼셀이 약간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는 무언가 해답을 구하듯 블로썸을 자꾸 봤는데, 블로썸은 주야장천 테이블을 노려보고 있어서 퍼셀의 간절한 부름에 응답하지 못했다.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뭘 고민하고 있는지 알 만했다. 그녀의 신성력이 폭주한 이유는 부정 같은 게 아니라 치트가 원인이었다(근데 치트도 따지자면 일종의 부정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게임의 내부적 요소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다시, 시스템에 묶이고 말았다. 시스템이 누구보다 아끼던 주인공이. ‘제4의 벽’을 통과하지 못하던 시절 내가 어땠는지를 돌이키면, 또 플로렌스 벨 세계에서 켈란에 의해 ‘이치’를 접한 레스토랑 점원의 반응을 떠올리면, 블로썸이 납득시키고자 하는 바를 대중이 납득할 만큼 설명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피고 측, 신실함은 스티아 신도의 미덕이나 이 자리는 피고의 재물 손괴 및 공갈 협박 혐의에 대한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꾸려진 자리입니다. 부디 눈에 보이는 형태로 근거를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십 분간 휴정하고 재개하겠습니다.”

퍼셀이 크라바트를 두 번째로 비틀어 짰을 때 험프리스 교수가 법봉을 내리쳤다. 나는 켄드라와 티 안 나게 눈빛을 교환한 다음 꿈꾸는 듯 몽롱한 표정을 얼굴에 덧씌운 채 일어섰다. 속으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기나 하면서. 아무래도 전반전은 어찌어찌 버텨 낸 모양이었다.

***

퍼셀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내세운 근거, 즉 두 번째 증인은 다름 아닌 조던 니콜스였다. 머리카락을 복잡하게 비틀어 올리고 눈두덩이와 입술에 화장품을 옅게 얹은 니콜스는 의외로 긴장한 듯이 손을 떨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니콜스가 갑자기 등장한 이유라고 하면 뻔했다. 바로 전날에 목격한 것을 증언하려는 것이었다. 대외적으로 내가 블로썸을 밀친 것으로 알려진, 블로썸의 자해 사건. 그때 보았던 끔찍한 광경이 떠올라 작게 몸서리를 쳤다.

아무렇게나 너부러진 몸뚱어리. 목이 꺾인 와중에도 미소 짓던 블로썸. 그리고 별처럼 쏟아지던 무수히 많은 글자… 그건 플로렌스 벨의 세계와 로즈마리 블로썸의 세계를 오갈 때마다 내 의식에 밀려들어 오던 것들과 거의 비슷했다.

어쨌든 내가 취할 태도는 하나였다. 나는 퍼셀의 노골적인 유도 심문에 넘어가지 않고 줄곧 고수하던 입장을 내세웠다. 블로썸이 스티아 신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나를 모함했다는 것. 나와 예닐곱 마디쯤 나누고 나서 퍼셀은 진흙 구덩이에 빠진 듯한 안색이 되어 돌아섰다.

그런 다음에 드디어 니콜스의 차례가 되었다. 경청하는 척 한 귀로 흘리고 있는데, 불현듯 니콜스가 떠드는 뉘앙스에서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사건이 벌어진 자리에 처음부터 있었고, 내가 블로썸을 떠미는 것을 직접 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침착함을 고수하는 퍼셀과 블로썸을 보아하니 미리 말을 맞춰 둔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크리스타 에드워즈와 거짓부렁 타임즈에 비견할 법한 날조 짓거리에 그만 뚜껑이 확 열리고 말았다.

“뻥 치지 마, 니콜스! 너는 블로썸이 떨어지고 나서 나타났잖아!”

저지르기부터 한 뒤에 생각한 건데, 기적을 몸소 겪고 깨달음을 얻은 여자애라면 이런 식으로 발끈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망했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완전히 늦어 버린 뒤였다. 켄드라가 경악을 채 지워 내지 못한 얼굴로 나를 봤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잽싸게 입을 틀어막자 딸꾹질이 나왔다. 나는 한참 동안 형편없이 딸꾹거렸다.

일부러 방청석을 보지 않았다. 히죽거리는 에드워즈랑 시선이라도 마주치면 열 받을 듯했다. 판사석도 안 봤다. 휴스턴 교수가 나 같은 얼간이에게 B를 준 것을 후회할 것 같아서였다. 눈에 띄게 치솟은 블로썸의 입꼬리는 애써 무시했다. 대신 배심원석을 간절히 봤다. 순진한 척 고개를 갸웃대었다. 아까와 달리 별 효과는 없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켄드라의 소매를 살짝 당겼다. 그건 우리가 정한 수신호 중 하나였는데, ‘살려 달라’는 뜻이었다. 켄드라가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 방금 일어난 소란에 대해 정중히 사과했다. 그리고 퍼셀이 끼어들기 전에 잽싸게 새로운 증인을 요청했다. 애덤 월시였다.

월시는 퍼셀이 준비한 증인이었으므로 켄드라와는 사전에 아무것도 협의하지 않았다. 월시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이 어리둥절해졌다. 당황한 퍼셀이 내 다분히 ‘아리엘 달튼적인’ 태도와 켄드라의 수상한 행동 중 어느 것을 먼저 지적해야 하는지 헷갈려 하는 동안 월시가 증인석에 앉았다.

켄드라가 서기석 근처에 서 있던 채프먼 교수에게 손짓하자 그가 땅을 울리며 사라졌다가 또 다른 트롤리와 함께 등장했다. 트롤리의 맨 위에 놓인 종이쪽지를 주워 들어서는 월시에게 건네는 켄드라의 동작이 사뭇 유려했다.

“이건 미스 달튼이 농담의 달 연회 때 받은 쪽지입니다. 증인, 필체를 알아보시겠나요?”

“그걸 내가 어떻게….”

짜증스레 반문하다 말고, 월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는지, 켄드라가 눈매를 슬쩍 휘었다.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증인, 골 때리는 선물 교환식 때 화가 많이 났다고 들었습니다. 서기석에 앉아 계신 레이디 우드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길길이 날뛰는 증인의 모습을 목격했죠. 이유가 뭡니까?”

켄드라의 손가락 끝에서 무아지경으로 깃펜을 놀리던 우드가 지체 없이 긍정했다. 켄드라가 말하는 동안 고민하듯 퍼셀과 나와 니콜스를 번갈아 보던 월시는, 거짓말을 해 봐야 소용이 없다고 여겼는지, 금세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저와 선물을 교환하기로 한 상대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상대는요?”

“레이디 니콜스입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필체를 알아보시겠나요?”

두 번째 물음에도 월시는 여전히 고민했다. 이미 니콜스가 쪽지를 썼다는 걸 확신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걸 밝혔다간 지독히도 증오스러운 내게 도움을 주는 꼴이 될까 봐서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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