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56화 (156/178)

그가 목숨처럼 아끼던 구레나룻 또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치료술용 실로 꼼꼼히 심은 속눈썹은 고개를 돌릴 때마다 나풀거렸다. 작은 키에 빈약한 몸, 좀스러운 성격, 있는 거라곤 예쁘장한 이목구비뿐이었는데 그마저 망가지니 괘씸도 안 할 정도로 보잘것없었다.

“뭐, 네, 그렇죠. 더구나 제게는 스티아의 손바닥과도 같은 포용력과 즉시 빠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마성이 있었으므로 마치 메마른 황야와 다를 것 없던 미스 달튼과 미스 모슬리의 마음에 촉촉이 파고 들어가….”

“즉 두 사람의 진실을 상당히 자주 접했다는 거군요. 이를테면 내밀히 간직해 두었던 저열한 속내나… 대외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이면의 얼굴을요.”

거짓말. 브리아나는 월시의 여친이었던 반년 동안 걔의 과제만 했다. ‘이면의 얼굴’ 운운할 만큼 교류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또 나는, 연애에 환상을 품고 있어서, 첫 남친으로 선택한 남자애의 이상적인 여친이 되고자 애를 되게 썼으므로 그에게 스스로를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의 턱에 주먹을 꽂고 싶었지만 참았다. 절망적일 정도로 불리한 재판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깨달음을 얻어 모든 번뇌에서 해방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다른 콘셉트를 짜는 건데. 안 들키게 이를 갈았다. 내 밧줄에 내가 묶인 기분이었다.

“그렇습니다. 특히 미스 달튼의 탐욕스러운 성정과 폭력성에 자주 노출되곤 했지요. 그녀가 식당에서 제 발을 걸었던 날은 제게 아직도 악몽으로 남아 있답니다.”

퍼셀이 두 번째로 말을 끊자 월시는 기분이 꽤 상한 듯했지만 아무튼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했다.

“미스 모슬리 또한 비슷하게 느꼈는지, 룸메이트를 꽤 날카롭게 평가하더군요. ‘멍청하고 샘 많은 달튼이 견제를 일삼는 통에 피곤하다’, ‘주제도 모르고 특례 입학생을 질투하는데 꼴사납기 그지없다’….”

자극적인 단어란 단어는 모조리 골라 버무린 월시의 발언에 강당이 온통 술렁거렸다. 브리아나를 곁눈질하자 파랗게 질려 뻐끔거리고 있었다. 아마 완벽히 같은 표현을 쓰진 않았어도 비슷한 논조로 나를 헐뜯기는 한 모양이었다.

하기는 블로썸이 등장할 즈음에 우리의 관계는 거의 최악에 치달았기 때문에, 그보다 더한 소릴 지껄였대도 이해가 갔다. 룸메이트 바꿔 달라고 빌기도 했다고 그러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는 블로썸과 본격적으로 틀어지기 전까지는 걔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한 바가 없었다. 특히나 브리아나–확성기-모슬리에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고민하며 켄드라를 툭 쳤더니 그녀는 턱을 비스듬하게 괸 채 검지로 광대뼈 부근을 두드렸다. 뭔가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이 침착한 모습이었다.

지력 2의 나로서는 똑똑한 애들의 심산을 짐작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단 가만히 있기로 했다. 켄드라가 내게 불리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머지않아 방청석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제, 제가 이간질한 거예요!”

익숙하게 째지는 소리였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브리아나가 벌떡 일어서 있었다. 광이 도는 흰 피부 위로 밝은 올리브색 목도리를 걸친 그녀는 검은 망토 사이에서 꽤나 불거져 보이는 편이어서 쉽사리 눈이 갔다.

“그가 자꾸 아리엘을 의식하는 것 같아서, 자꾸 비교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아리엘은 로즈마리 블로썸에 대해 일언반구도 안 했어요!”

나의 절친 브리아나는, 안 그러려고 노력하는 것과 별개로, 오랜 세월 남의 눈치를 보면서 살다 보니 주위를 꽤나 의식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정은 많아도 잇속에 더 밝아서 손해를 안 보려고 들었다. 퇴학을 논하는 와중이기도 하니, 오갈 데 없는 그녀가 나서 줄 것이라는 기대는 전혀 않고 있었다.

어쩌면 브리아나에게 있어 나는 신변의 위협쯤은 너끈히 감수할 만큼의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세 번째 아리엘 달튼이었고 얘가 나를 구도자로 여겼을 때도 안 그랬는데. 코가 찡해지는 것을 느끼며 입가에 힘을 주었다. 입술이 일자가 되었다.

“미스 모슬리의 발언이 진실이어도 미스 달튼이 질투심이 강하고, 거짓말에 능하며, 폭력적인 성향을 자주 보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증인?”

“아니야!”

발끈하여 소리치는 브리아나의 소매를 곁에 있던 포크너가 슬슬 당겼다. 가망 없는 상황에 브리아나가 나서서 얽히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아리엘은, 내 친구는 그런 애 아니야! 협박 편지는, 그건….”

덜덜 떨리던 브리아나의 오른손이 망토 안으로 들어가더니 뭘 쥐듯이 꼼지락거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구멍 난 단어장을 꺼낼 것임을 깨닫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와 켄드라는 내게 씌워진 누명 전부가 블로썸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중이었으므로, 브리아나가 혐의를 인정해 버리면 여간 복잡해지는 게 아니었다.

자칫하다간 브리아나가 죄다 뒤집어쓰게 될 위험도 있었다. 켄드라가 만류하건 말건 지르고 봐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연 찰나였다.

“원고 측.”

단 세 음절 만에 켈란은 혼란스럽던 분위기를 제압하고 모든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그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증인은 큰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원고 측에서 지금처럼 증인에게 부담을 주는 상황에서라면 증언의 무결성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오스왈드 2세로 인하여 처참한 최후를 맞은 드미트리우스 칸투를 떠올려 보십시오.”

드미트리우스 칸투는 고대 밀루아의 시인으로, 기질이 유달리 예민하여 누구와도 대면하려 하지 않았으며 가족과도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는 괴짜였다. 당시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오스왈드 2세는 그러한 칸투의 태도를 불손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병사를 동원하여 칸투를 억지로 끌고 나왔는데, 그것이 그 심약한 남자에게 어찌나 큰 충격을 선사하였는지 왕궁까지 가는 길에 그만 미쳐 버렸다고 한다.

켈란이 하필 오스왈드 2세와 드미트리우스 칸투의 일화를 꺼낸 데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하나, 나에게 불리한 증언을 지나치게 유도하는 퍼셀에 대한 경고. 둘, 머리를 포함해 전신을 크게 다친 월시의 정신 상태에 대한 의문점 제기. 쉽게 말하면, ‘쟤 아무래도 돌아 버린 거 같으니 쥐어짜지 말고 증인석에서 내려라’.

“어쩌면 증인석 자체가 그에게 중압감을 선사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부상이 없었더라면 다른 각도에서 봐야만 했을 자리이지 않습니까. 월시 후작의 몸도 성치 않으니… 걱정거리는 적은 편이 좋겠죠.”

이건 좀 더 노골적인 경고. ‘원래 같았으면 피고석에 앉아 있었어야 하는 거 알지? 아버지 끈도 떨어진 마당에 알아서 잘하자’.

“무리하게 나오는 원고 측의 입장도 이해는 됩니다. 다만 지금처럼 피차 증명이 어려운 주장만을 내세운다면 학생 자치 법정을 이어 갈 이유가 없습니다. 제 생각이 틀렸습니까?”

그의 날카로운 혀가 마지막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내가 있었다. 쇼하는 거 다 아니까 작작 하라는 뜻이었다.

작작 할 거였으면 시작도 안 했다. 딱 얄밉기 직전까지 입매를 둥글린 다음에 눈을 내리깔았다. 기가 찬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는 켈란에게 다만 공손하게 지껄이기나 했다. 기울어진 시소를 타기 위해서는 안간힘을 다해 온몸을 내던져야만 했으니까.

“원하신다면 다른 방법으로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켈란이 일부러 개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바람은 내 쪽으로 불었다. 나는 일반적으로 신의 축복 없이는 절대 알아낼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몇몇 ‘진실’을 입에 담았다. 이를테면 지난주에 식당에서 발생하여 미궁에 빠진 말린 과일 도난 사건이 날다람쥐 집배원의 소행이라는 거나, 피츠시몬스 총동문회에서 <마법은 사실 섹시하다> 재발행을 위해 모금 중이라는 거. 전부 내가 5학년을 반복하며 직접 겪거나 귀동냥으로 얻은 정보들이었다.

어리둥절하여 하염없이 크라바트를 적시기만 하는 퍼셀과 달리, 블로썸은 내가 불세출의 예언자나 스티아의 사도처럼 구는 동안 엄청나게 딴죽을 걸고 싶어 보였다. 그녀가 입매를 살짝 비틀자 매끈한 미간과 눈 밑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퍼셀도, 켄드라도, 하다못해 나마저 블로썸이 뭐든 떠들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소리든 입 밖으로 내는 일은 끝내 없었다. 나의 성스러운 콘셉트가 나를 묶었다면, 언제나 블로썸을 위해 움직이던 시스템 또한 블로썸의 발에 걸리는 요소가 되었다. 그녀는 내가 어떻게 그 모든 ‘진실’을 손에 넣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으나 차마 내뱉지 못했다. 말해 봐야 강당에 가득 찬 ‘엑스트라’ 중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제 우스운 꼴이 된 것은 언제나처럼 애덤–민둥산-월시였다. 켈란의 지적대로 월시의 특수 폭행 혐의는 나의 공갈 협박 혐의보다 명백했으므로, 그는 증인으로서 충분한 정당성을 갖추지 못했다. 월시가 본전도 못 찾고 터덜터덜 방청석으로 돌아가자 켄드라의 심문 시간이 되었다.

어차피 내 논지에는 논거랄 게 거의 없어서 켄드라와 나는 신학 교재에 실린 내용들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별 영양가 없는 공방을 대충 해치운 뒤 켄드라가 블로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미케일라 메이나드. 랄프 로슨. 밀리 맥마이클스… 지젤 그리핀. 노먼 케이시. 켈리 라미레즈. 이들의 공통점을 아십니까?”

블로썸의 가녀린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켄드라가 방금 읊은 것은 블로썸이 신성력 폭주로 상처 입힌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그중 일부는 연고를 바르거나 붕대를 감은 채 방청석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케이시를 포함한 몇몇은 아직 병동에 누워 있었다. 방청석 여기저기에서 눈길이 오가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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