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55화 (155/178)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미스 블로썸은 매우 강한 축복을 지녀 성녀 에이레네의 환생이라 일컬어졌죠. 저는 여태껏 그것을 무도한 자들의 과장이라고 여겼고요. 하지만 진실은 달랐어요. 미스 블로썸은, 아니, 성녀 로즈마리는 정말로 스티아께서 우리 피츠시몬스를 위해 내린 사도였던 거예요!”

배에 힘을 주고 외쳤다. 커다란 메아리가 강당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지러이 오가던 수십, 수백의 시선이 죄다 내 입술에 쏠렸다. 내가 뭔가 떠들기 전에는 시간조차 흐르지 않을 듯했다.

지극히 내향적인 관심 종자로서, 나는 짜릿함과 다 내던진 채 도망쳐 버리고 싶은 충동을 한꺼번에 느꼈다. 충동이 짜릿함 이상으로 커지기 직전에 뒷말을 붙였다.

“그녀는 스티아의 뜻에 따라 저를 시험하기 위해 갖은 고난을 준비했답니다. 제게 상해를 입히기도 하고, 남자에 미친 탕녀라 음해하기도 하고, 마침내는 제가 그녀에게 끔찍한 짓을 자행하였다는 증거를 직접 만들어 저를 함정에 빠뜨렸죠. 본래는 선하고 상냥한 그녀이니만큼, 괴로워하는 저를 보며 얼마나 힘들었을지….”

“잠깐, 잠깐, 미스 달튼!”

퍼셀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그가 나이에 맞지 않게 주름진 이마에 비 오듯 흐르는 땀을 크라바트로 훔쳤다.

“미스 달튼이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러니까, 미스 블로썸이 자작극을 펼쳐 미스 달튼을 매도했다는 소립니까?”

“부끄럽지만,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그 무슨 얼토당토않은!”

“증명할 수 있습니다.”

분연히 고개를 끄덕이자 켄드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손에 어떤 것을 쥐여 주었다. 신경이 바짝 곤두설 만큼 차가운 쇳덩이였다. 나는 일부러 그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게끔 들고 블로썸을 쳐다봤다. 지옥 밑바닥보다 어둡게 반짝이는 그녀의 눈을, 한참이나.

그런 뒤에는 손아귀 안의 쇳덩이를 과장된 동작으로 만졌다. 다이얼을 돌려 번호를 맞추는 소리가 대여섯 번쯤 나자 퍼셀을 포함한 전부가 내가 자물쇠를 잠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는 방금 미스 블로썸의 눈에서 진실을 꿰뚫어 보았고, 그녀가 어떤 번호로 자물쇠를 잠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통에 퍼셀은 정신이 하나도 없어졌다. 그래서 그는 내게서 자물쇠를 가져다가 블로썸에게 가는 켄드라를 막지 못했다. 블로썸 역시 얼떨떨하게 켄드라가 건네는 자물쇠를 받아 들었다. 켄드라가 능글맞게 말했다.

“미스 블로썸, 풀어 보세요.”

이제 색색의 시선들은 블로썸에게 처박혔다. 그녀는 당황하여 퍼셀과 험프리스 교수를 번갈아 보았으나 어느 쪽에게도 블로썸을 구해 줄 마음은 없는 듯했다. 혹은 ‘진실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는 내 주장이 단순한 허장성세에 지나지 않는다고 확신했거나.

아무튼 나는 허세를 부린 바가 없었다. 적어도 블로썸이 그 자물쇠를 풀 거라는 자신만은 충만했던 것이다. 하릴없이 자물쇠를 조작하기 시작하는 그녀를 집중해서 봤다. 쇳조각이 어디 걸렸다 풀어지는 틱 소리가 날 때마다 심장이 튀어 나갈 것만 같았다.

‘풀렸어’라고 누가 제일 먼저 말했는지 몰랐다. 하지만 가장 크게 소리친 건 카일이었다. 나는 카일이 개오버를 떨면서 바람을 잡는 것을 보고 입가에 힘을 줬다. 그는 자물쇠라는 물건의 존재도, 그게 풀리는 순간도 난생처음 접하는 사람처럼 능청스레 굴었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켄드라가 아가리를 쩍 벌린 자물쇠를 판사석과 배심원석, 방청석에서 잘 보이도록 높이 들어 올리자 블로썸은 꽤 웃긴 꼴이 되었다. 퍼셀의 표정은 블로썸보다 열 배는 웃겼다. 내 작년 룸메이트가 방에서 두꺼비를 키웠는데, 자기 주인이 환영술 과제로 제출할 가짜 파리를 날름 삼킨 다음에 걔가 지었던 표정과 비슷했다.

“이제 아시겠나요? 제 눈에는 진실이 보입니다.”

정말 슬픈 상상을 하면서 웃음을 참았다. 상상 속에서 나는 올해 룸메이트의 마법 약 때문에 호박벌 궁둥이처럼 북슬북슬해진 턱을 졸업할 때까지 원래대로 되돌리지 못했다. 일말의 물기까지 글썽거리는 나의 진지한 눈에 퍼셀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하, 하지만 너무, 근거가….”

“스티아께서 제게 행하신 기적이 바로 근거입니다. 그리고….”

미세한, 하지만 분명한 소음이 귓불을 간질였다. 그것은 구멍이 뚫린 돔 모양의 지붕 꼭대기서부터 시작되어, 점차 강렬해지다가, 종내에는 강당을 온통 울렸다. 나는 일부러 적절한 순간에 말을 끊고 눈을 굴렸다. 핀 조명의 가느다란 빛줄기 주변을 뱅글뱅글 돌며 가까워지는 두 개의 점이 보였다.

졸업 시험을 마친 새벽에, 천재 마법사 에디가 창문으로 찾아왔다. 잠시간의 작별 인사를 위해서였다. 그는 다투고 거리를 두느라고 나를 충분히 유혹하지 못한 점에 대해 상당히 아쉬워하면서도, 동시에 ‘로’에게 하루빨리 영혼을 찾아 주고 싶어서 몸이 달아 있었다.

“켈란이면 모를까 빌라드랑은 해 볼 만할 거 같단 말이야.”

투정 부리듯이 지껄이던 모습이 떠올라서 낯이 뜨거워졌다.

화려한 공갈로 블로썸을 상대하겠다는 내 계획을 에드가는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암만 형제가 반한 여자애여도 그가 반한 여자애한테 못되게 구는 건 용납하지 못하겠다며 말이다. 또 걔한테 걸린 브라이스 나돈이 불쌍하다고도 했다. 나는 씩씩거리는 그에게서 형제의 모습을 발견하고 숨죽여 웃었다.

아무튼, 그래서 에드가는 귀걸이를 잠시 빌리는 담보로 내게 로즈마리 왕비의 다른 소지품을 맡겼다. 그건 자그마한 꿀벌 모양의 자동인형이었는데, 어찌나 정교한지 날개 치는 모습만 보면 진짜와 거의 구별할 수가 없었다.

나돈은 밀루아처럼 마과학이 발달한 나라가 아니었다. 과장 없이 모래 알갱이만 한 톱니바퀴를 황동으로 주조하기 위해 나의 친구 사마귀가 얼마나 패악을 부렸을지 눈에 선했다. 그리고 이름 없는 자의 무덤에서 있었던 일이 그녀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다시 생각해도 에드가에게 로즈마리 왕비의 귀걸이를 맡기기로 한 건 옳은 선택이었다. 걔의 손에 귀걸이를 쥐여 줄 때 나는 그게 ‘공략 증표’이고 내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었다. 다만 내 친구 사마귀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 주고 싶다고 느꼈을 뿐이다. 걔처럼 나도 아주 오래전부터 스티아가 짜 낸 실에 묶이길 거부하고 내 직감과 그것이 만들 가능성을 믿기로 한 몸이었다.

“별과 별이 이어진 자리에서 탄생한… 벌.”

꿀벌 인형의 몸체는 황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강한 조명이 황동에 반사되는 모습은 얼핏 별과 별을 이은 듯이 보일 듯했다. 퍼셀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조종간을 손에 쥔 것은 연단 뒤쪽 어디쯤 있을 켈리 라미레즈였다. 그녀는 케이시 건으로 블로썸에게 전에 없이 강한 앙심을 품고 있어서, 걔를 엿 먹이기 위해서는 못할 게 없다고 했다.

우당탕탕 연극부의 유일하게 쓸모 있는 음향 효과 담당자로서, 켈리는 두 마리의 꿀벌 인형을 동시에, 그것도 끝내주게 다루는 방법을 알았다. 나는 실감 나게 날아 다가오는 꿀벌 인형을 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곧 눈꺼풀 근처에서 약간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턱은 살짝 들었다. 오로지 이 순간을 위해 나와 켄드라는 증인을 매수하거나 증거를 조작하기에도 바쁜 시간에 강당을 찾아 모든 조명의 위치와 광도를 파악했다. 방청석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공갈 전문가 휘태커 판사는 공갈에 제일 큰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연출’이라고 했다. 블로썸처럼 공들여 빚은 듯한 외모가 아닌 까닭에, 내 연출은 오히려 실감 나게 되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내가 스티아 신전의 벽화 속 성녀 에이레네보다 성스러워 보일 것을 확신했다.

“스티아께서는 제가 그분의 힘을 빌려 난관을 헤쳐 나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쯤 하세요.”

가래 끓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끝내 좌판을 딛고 일어섬으로써 눈높이를 맞추는 데 성공한 드와이어 교수였다. 마탑 출신 교수 파벌의 비호를 받는 퍼셀과 블로썸, 비마탑 출신 교수 파벌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진-착각이지만-켄드라와 내가 붙은 만큼 제3의 세력이 중재를 해야겠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미스 달튼이 겪었다고 주장하는 ‘기적’의 진위가 쟁점이 아닙니다. 원고 측, 휘말리지 마세요.”

또한 드와이어 교수는 근본주의 스티아 신도가 아니었으므로 언제든지 나를 방해할 수 있었다. 내가 조용해지고 나서야 퍼셀은 겨우 정신을 다잡았다. 그가 축축해진 크라바트를 쥐어짜며 증인을 요청했다.

퍼셀이 부를 만한 증인에 대해서는 이미 켄드라와 철저히 파악한 바 있었으므로, 나는 온몸에 붕대를 두른 남자가 으스대며 등장했을 때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다만 월시가 농담의 달 연회 때 과연 뭐로 분장했을지 궁금했다. 저 꼴로는 미라밖에 못 할 듯한데, 멋에 죽고 멋에 사는 애덤 월시에게 만족스러웠을 것 같지가 않아서.

“저는 3년간 미스 달튼과, 반년간 그녀의 룸메이트인 미스 모슬리와 교제하였습니다. 헤어진 여자 친구의 룸메이트와 만난다는 게 저에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아마도 사랑에 상처 입은 남자만이 발산할 수 있는 가련한 매력이 미스 모슬리의….”

“그렇다면 두 사람 모두와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다고 봐도 되겠네요.”

환승 연애에 대한 자아도취형 인간의 자기변호를 더는 듣고 있을 수 없었는지, 퍼셀이 무 자르듯 월시의 증언을 잘라먹고 물었다. 그랬더니 월시는 ‘다 알고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처럼 눈썹 뼈를 들썩였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잉크로 그린 눈썹에 입체감이 하나도 없어서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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