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나 다를까, 불가해한 현상이 일어났다. 놀라서 허둥거리던 니콜스가 불현듯 다리를 딱 붙인 채 꼿꼿이 선 것이었다. 팔은 양쪽으로 펼친 채였다. 극단적으로 홉뜨인 눈은 비렁뱅이의 세숫물처럼 흐릿했다. 기묘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아리엘 달튼이.”
“아리엘 달튼이.”
블로썸이 조용히 읊조리는 말을 니콜스가 그대로 따라 했다.
“로즈마리 블로썸을.”
“로즈마리 블로썸을.”
목소리의 높낮이나 각 음절의 길이마저 완전히 같았다.
“계단 아래로 떠밀었어.”
“계단 아래로 떠밀었어.”
멍한 표정을 지은 조던 니콜스는 스스로 블로썸의 말을 옮기고 있다는 자각이 없는 듯했다. 그녀가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뇌리에 단단히 새기려는 듯이 말이다.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직감했으나 동시에 이미 늦었다고 느꼈다. 허공에 못 박힌 채 하관에 실이 달린 목각 인형처럼 뻐끔거리던 니콜스는 눈 깜짝할 사이 정신을 차렸다. 이윽고 그녀가 목구멍이 보이게 입을 벌려 외쳤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쩌렁쩌렁했다.
“아리엘 달튼이 로즈마리 블로썸을 계단 아래로 떠밀었어!”
만면에 미소를 담은 블로썸의 얼굴은 내 위치에서만 보였다. 아주 법석을 떠는 니콜스로부터 약간 떨어진 모퉁이 너머에서 몇몇이 웅성이기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발이 움직였다.
누가 봐도 수상한 행동이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아리엘 달튼이 로즈마리 블로썸을 계단 아래로 떠밀었어!’ 나는 그림자보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니콜스의 목소리를 피해 멀리 도망쳤다. ‘아리엘 달튼이 로즈마리 블로썸을 계단 아래로 떠밀었어!’ 손바닥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욱신거렸다.
***
블로썸의 문자 그대로 온몸을 내던진 투혼 덕분에 모두가 케이시와 켈리에게 일어난 참사에 대해 까맣게 잊었다. 아침이 밝자 대중의 눈과 귀는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학생회의 공주님’과 ‘독거미 달튼’에게로 돌아갔다.
심지어 크리스타 에드워즈의 깃펜도 그렇게 되었다. 아마도 그쪽이 걔의 기준에서 사업성이 있었나 보다. 짜증 나서 죽을 거 같았다. 쫄딱 망해서 달튼 상단의 말단 직원으로 취직한 그녀를 갈구는 상상을 하면서 기숙사를 나섰다.
학생 자치 법정이 열리는 강당으로 가는 동안 씹던 캐러멜뿐만 아니라 돌이라도 맞지 않을지 노심초사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의 룸메이트와 그녀가 금화로 산 충성이 나를 든든히 경호했기 때문이다.
깜찍한 파티마는, 삶에 부침이 있는 평민 꼬마애만이 입에 담을 법한 공용어 단어들로 내게 손가락질하는 귀족 애들의 기를 팍 꺾어 놓았다. 속이 후련한 한편 신분을 내세워 패악질하는 행위를 엄금하는 피츠시몬스이니 망정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일반적으로 모욕에 쓰이지 않는 손가락을 모욕적인 방법으로 들어 올리는 파티마에게 딴 데 가서는 절대 귀족한테 대들어선 안 된다고 단단히 일렀다.
강당에 들어서니 방청석이라고 쓰고 관중석이라고 읽는 자리를 가득 채운 인파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적당히 세어도 수확의 달 연회 시상식보다 많은 사람이 모인 듯했다.
연단에는 다양한 높이의 테이블이 네 개 놓였고, 벤치 의자가 같은 수로 있었다. 각각의 테이블에는 ‘재판장석’, ‘피고석’, ‘원고석’, ‘배심원석’이라고 쓰였는데, 물통이나 주전부리를 부지런히 옮기던 학생들이 나를 보고 수군거렸다.
걔네들은 내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켄드라를 붙잡고 늘어지며 솟아날 구멍을 찾지 않아서 의아한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의 계획은 이미 지나치게 완벽해서 재고할 필요가 없었다. 머리를 긁적이고 피고석에 앉았다.
배심원석 근처에 마련된 서기 자리에는 엄청 긴 모자를 쓴 딜레이니 우드가 앉아 있었다. 원래라면 학생회에서 도맡을 일이었으나 원고가 학생회의 일원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방청석을 살피며 익숙한 얼굴들을 찾았다. 모르는 애의 머리통을 겨드랑이에 낀 제이든과 끈적한 슬라임을 소환하는 카일이 바로 보였다. 독거미 달튼의 악성 팬을 관리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니 퍽 만족스러워졌다.
손톱을 마구 물어뜯는 볼턴과 언제나처럼 깔끔한 미소를 입가에 띤 켈란을 지나 양손을 맞잡아 쥐고 기도하는 브리아나를 발견했다. 나는 걔가 불안을 덜길 바랐으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입 모양으로 브리아나의 이름을 외치다 말고 손을 흔들었더니 애꿎은 볼턴이 화답했다. 진짜 눈치도 지지리 없었다.
“지금부터 피츠시몬스 아카데미 1287호 재물 손괴 및 공갈 협박 사건에 대한 학생 자치 법정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우드의 엄숙한 목소리에 연단을 비추는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나는 볼턴 외의 사람과 인사하길 포기하고 자세를 고쳤다.
곧 연단 뒤에서 휴스턴 교수와 험프리스 교수, 드와이어 교수가 나타나 재판장석에 차례대로 착석했다. 땅딸막한 드와이어 교수는 인간의 키에 맞추어진 의자를 타고 오르느라고 벌써부터 지쳐 버렸다.
다음으로는 프릴이 주렁주렁 달린 크라바트를 나풀거리며 퍼셀이 등장했다. 퍼셀이 멋 부리려고 걸친 녹색 재킷은 슬프게도 그를 평소보다 더욱 두꺼비처럼 보이게 했다.
두꺼운 종이 뭉치를 쥔 켄드라는 퍼셀의 뒤에서 나타나 내 곁에 앉았다. 그녀가 배심원석과 방청석을 향해 여유롭게 손 인사를 날리자 많은 여자애들과 소수의 남자애들이 단내 나는 탄식을 내뱉었다.
마지막에 모습을 보인 것은 놀랍지도 않게 안쓰러운 꼴을 한 블로썸이었다. 허리와 다리에 걸음 보조기가 달린 채였고, 팔에는 부목이 대어졌다. 또 전날만 해도 멀쩡했던 입술에는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나를 욕보이기 위해 입술 거스러미를 쥐어뜯는 블로썸을 떠올리고 혀를 내둘렀다.
“정말 보통은 아니네요.”
켄드라가 질린다는 듯이 속삭임과 동시에 험프리스 교수가 나무망치를 나무판에 두드렸다. 그녀가 이번 사건의 쟁점을 설명한 후에 퍼셀과 켄드라, 배심원 대표인 4학년 남자애가 오른손을 들고 선서문을 낭독했다.
나와 블로썸도 스티아의 신성한 이름 아래 숨기거나 보태지 아니하고 거짓을 말할 경우 성화에 혀를 불태울 것을 약속했다. 나는 스티아의 실체가 한낱 물레라고 여기는 와중이었으므로 건성건성 선서했다. 왼손을 들고 발음을 잔뜩 뭉갰더니 험프리스 교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재밌었다.
내가 법정 모독죄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다음에는 채프먼 교수가 쿵쿵거리며 트롤리를 밀고 들어왔다. 지긋지긋하게 봤던 교복 치마와 교재, 협박 편지가 투명한 봉투에 담겨 있었다.
변론 시간이 주어지자 퍼셀은 우선 그것들을 하나하나 들어 보이면서 내가 얼마나 잔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는지 배심원에게 각인시켰다. <피츠시몬스 타임즈>를 통해 내 ‘죄’에 대해서는 빠삭할 텐데도, 배심원은 퍼셀의 발언 하나하나에 과장되게 반응했다. 완전 꼴 보기 싫었다.
“이상 세 가지 혐의에 대해 인정합니까?”
“아니요.”
그래서 퍼셀의 물음에 더욱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되는 타이밍인 탓이기도 했다. 물러설 길 없는 피고의 돌발 행동에 방청석 군데군데에서 소란이 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미아 페터슨의 맑은 광기를 떠올리며 시종 눈을 깜빡였다.
“실은 어젯밤, 신묘한 꿈을 꿨습니다. 목 위로 별이 빛나는 누군가가 제게 손짓하더군요. 자애롭고 자비로운 스티아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습니다.”
내가 듣기에도 퍽 뜬구름 잡는 말이었다. 퍼셀의 표정이 기묘하게 비틀어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볼살이 미쳤냐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가까스로 걔를 비웃지 않고 몸 앞으로 손을 모았다. 스펜서 저택에서 겪은 바가 있었으므로, 얌전한 자작가 영애를 흉내 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가 이르길, ‘너를 위해 기적을 내리겠노라.’ 곧 별과 별이 이어진 자리에서 벌 두 마리가 태어나 제 눈두덩이에 앉았죠. 그런 뒤에 잠에서 깨었더니, 맙소사, 눈알을 뽑아내어 닦은 다음에 다시 집어넣기라도 한 듯이 시야가 깨끗하지 뭡니까!”
재판장석에서 침음성이 났다. 흘끗 보니 이마를 짚은 휴스턴 교수가 보였다. 드와이어 교수는 다소 높은 테이블 너머로 내 얼굴을 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험프리스 교수는 의사봉을 쳐야 하는지 아닌지 고민 중이었다.
신실한 스티아 신도인 그녀로서는 하필이면 스티아를 운운하는 내 발언을 함부로 끊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녀가 믿는 근본주의 신앙에 따르면 누군가 신의 이름을 입에 담을 때 그것을 중간에 끊기란 심각한 신성 모독에 속했다. 발화자가 신성 모독자여도 말이다.
퍼셀은, 그 또한 근본주의 신도였으나, 그에게 있어 신앙보다 중요한 것이 학생회장의 영예인 듯했다. 나를 저지하기 위해 다가오는 그에게 손바닥을 쫙 펼쳐 보았다. 그건 열한 살짜리 할머니 고양이 릴루나 걔와 맞먹는 겁쟁이들을 제압하기에 매우 효과적이었다.
“더 들어 보세요. 제 말은, 스티아께서 제 눈을 뜨이게 했다는 거예요. 비로소 저에게는 물 빠진 하늘과 회색 구름을 가르는 햇살뿐만 아니라 진실이 보이기 시작했답니다.”
“진실?”
“처음엔 알 수 없었어요. 대체 블로썸은 내게 무슨 원한이 있길래 그토록 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걸까. 얼간이 같은 착각을 했죠. 모든 것이 스티아께서 안배한 바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어조를 격하게 하면서 고개를 천천히 돌려 재판장석과 방청석, 배심원석을 훑었다. 다들 혼이 쏙 빠진 표정이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다. 마지막에는 블로썸을 봤다. 누구에게든 호감을 줄 법한 각도로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는 하단이 약간 찌그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