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49화 (149/178)

이름 없는 자의 무덤 출구를 향해 나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편에서 오던 켈란과 마주쳤다. 블로썸과 함께 출구를 지키고 있다가, 시험이 끝나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는데 나타나질 않으니 찾으러 온 모양이었다.

‘훼방을 놓은 게 아니었으면 좋겠네.’라고 말하는 켈란의 시선은 카일의 손바닥 위에 얹힌 내 손등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잠깐 움찔했으나 손을 빼지는 않았다.

영문 모를 긴장감이 나와 나를 찬 남자애, 내가 찬 남자애의 주변을 크게 돌고 난 후에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던전 공략대가 꾸려졌다. 바닥을 비추는 빛의 양으로 미루어보아 출구에 거의 다다른 듯했는데, 한 발짝이 평생 같았다. 구정물 웅덩이가 눈에 뜨일 때마다 코를 박고 싶은 충동을 다스려야 할 정도였다.

“아리.”

불현듯 부르는 소리에 카일을 봤더니 그의 표정이 오묘했다. 아무래도 내 애칭을 입에 담은 것은 얘가 아닌 모양이었다. 경악하여 고개를 돌렸다.

“전에는 미안했어.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라서.”

즉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퍽 의미심장하게 들리기도 했다. 일순 멍하다가 속이 홧홧해졌다. 대체 얼마나 뻔뻔하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내게 그 일을 언급할 수 있는 걸까? 무슨 심산으로? 남의 덜 아문 상처를 헤집는다고 해서 볼만한 건 재미가 아니라 낭패였다.

성질을 낼까 싶었는데,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하필이면 카일 앞에서 켈란이랑 감정 문제로 싸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이를 꽉 깨물고 잠자코 있으려니 이번에는 진짜 카일이 말을 걸어왔다.

“엊그제 받은 편지에 네 이야기가 있더라. 너 우리 응접실에 모자 두고 갔어?”

“모자? 헉, 거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는데! 리시안셔스랑 시넨시스 줄기를 챙에다 빙 둘러서, 리본이랑! 뭔지 알지?”

“알지. 네가 완전 아끼는 모자잖아. 잘 보관해 둘 테니까 가져가. 계속 뒀다간 신디한테 뺏길 거야. 요새 겉멋이 얼마나 들었는지… 참, 신디 하니까, 걔가 릴루 보고 싶어서 병 걸릴 지경이라던데. 놀러 가라고 해도 돼?”

“당연하지! 매들린이 쌍수 들고 환영할걸! 평소에 저택에 사람이 없어서 적적하다고 얼마나 한탄을 하는데…”

어색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정적으로 반응하다가 돌연 매우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지금 얘 말투가 좀… 재수 없지 않나? 아니, 재수 없다기보단… 뻐기는 듯한?

“아, 매들린. 끝내주게 좋은 사람이지만 신디한테 무른 게 흠이야. 걔한테는 안 그래도 되는데 말이지. 이미 지나치게 어리광쟁이라서. 마치 ‘아가 아리’를 보는 것 같을 때가 있어. 물론 네가 훨씬 악독했었긴 한데. 티그리스호 사건 기억나? 자작 부인께서 내게 선물한 마력선 모형을 네가 두 동강 내 버렸잖아.”

열아홉 아리엘로서 아가 아리를 대변하자면 걔는 철이 많이 없었던 것뿐이지 인성에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면 티그리스호 사건은 내가 마력선 모형이 갖고 싶다고 귀에 딱지가 앉게 떠들었는데 도자기 인형 같은 거나 사 온 엄마 잘못이 컸다(당시 달튼 자작 부부는 외동딸이 선머슴처럼 구는 것이 소꿉놀이를 충분히 하지 않은 탓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또 잔뜩 뿔이 난 내 앞에서 눈치 없이 그걸 자랑했던 카일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볼에 바람을 왕창 넣고 항변을 하려는데, 전혀 기대하지 않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매들린이라면 너희 하녀장? 좋은 사람 같긴 하더라. 무엇보다 파이를 정말 제대로 구울 줄 알던걸. 인상적인 맛이었어.”

아무래도 순진한 나의 유모 매들린은 육십 평생에 처음 접하는 미모의 귀공자를 차마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켈란의 품에 오븐에서 갓 나온 사과파이를 안겨 주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혀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음을 알았다. 매들린의 사과파이는 분명히 환상적인 편에 속했으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켈란이 맛이 인상적이네 어쩌네를 판단할 수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중요한 몇 가지를 생략하고 말하니, 꼭 그와 우리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 것처럼 들렸다. 도무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가늠하기가 힘들어서 혀가 뻣뻣해졌다. 나는 켈란의 산뜻한 옆얼굴을 곁눈질하며 막 웅얼거렸다.

“그, 잘 먹었다니 다행이네. 근데….”

“매들린의 사과파이가 얼마나 훌륭한지는 내가 잘 알지. 다음에 그녀를 만나면 네 마음을 전해 줄게. 일레스티아의 황태자로부터 호평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면 되게 기뻐할 거야.”

“마음은 직접 전하는 게 실례가 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아리?”

“너네 지금 뭐 하는 건지 물어봐도 돼?”

참지 못하고 내뱉은 순간 대화가 뚝 끊겼다. 걸음도 멎었다. 돌 틈을 기는 벌레나 어슴푸레한 빛 사이를 떠다니던 먼지도 자취를 감추어서, 꼭 불편한 분위기 속에 영영 박제되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나는 내가 찬 남자애를 쳐다봤다. 걔의 손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내 손이 저려 왔기 때문이다. 카일의 시선은 나를 찬 남자애에게 향했다. 유치한 난리에 얽힌 적 따위는 결코 없다는 듯이 전방을 응시하는 켈란의 눈꼬리는 기분 좋게 휘어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켈란의 입술이 아주 살짝 열렸다. 그것의 움직임에 집중하려는 찰나,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어디로 이끌리는 듯한 느낌이 났다.

이윽고 외마디 괴성이 내 귀를 파고들어 왔다. 남자 소리였다. 조금 더 긴 여자 비명이 뒤를 따랐다.

“출구 쪽이야.”

속삭임과 동시에 땅을 박차고 달렸다. 다급한 발소리가 따라붙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다들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인가 보았다. 켈란이 나와 카일을 찾아 이름 없는 자의 무덤에 발을 들이고 나서 출구에는 공교롭게도 로즈마리 블로썸만이 남았다.

신의 축복이라는 별칭이 무색하게, 근래에 들어 그녀가 지닌 신성력은 누군가를 치료하기 위해서보다 상처 입히기 위해 쓰이곤 했다. 물론 아직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 적은 없었다지만… 방금 울린 비명은 얼핏 듣기에도 불길했다. 자꾸만 드는 나쁜 예감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발을 재촉했다.

좋은 예감에는 숱하게 배신당할지언정 나쁜 예감은 으레 예감에 그치지 않기 마련이었다. 단순히 기절한 것 같은 켈리와 달리 피 웅덩이를 베고 누운 케이시의 상태는 척 봐도 가혹했다.

두 사람의 가운데쯤에서 익숙한 금발이 물결쳤다. 지긋지긋한 금발이기도 했다.

나는 블로썸과 적어도 6년 이상 함께 아카데미를 다녔으나 그녀와 마주쳤을 때 즐거움을 느낀 적은 맹세코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언제나 우리 중 한 사람은 유쾌하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대개는 나였는데 가끔은 블로썸이었다. 이번엔 둘 다였다.

“나는, 나, 나는… 내가 한 게… 케이시가 멋대로….”

머리카락을 그러쥐고 허우적거리는 블로썸의 발끝은 지면을 디디고 있지 않았다. 눈과 입에서는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호박 등 토피를 스무 개는 삼킨 듯한 광량이었다. 마법에 대한 지식이 빈약해도 블로썸이 스스로의 힘을 통제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음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소용돌이 형태로 날뛰는 대기에 섞여 던전의 일부를 이루던 돌조각이 튀어 올랐다. 일부는 바람에 깎여 뭉툭했으나 더러는 아주 뾰족했다. 그것들이 마구잡이로 날리며 치맛단 아래 허벅지와 종아리에 가느다란 선이 생겼다.

하지만 그깟 실낱같은 자상으로 블로썸을 멈추기란 불가했다. 애초에 블로썸이 폭주하는 이유는 치트로 얻어 낸 압도적 신성력을 능숙하게 다루지 못해서였다. 일반적으로 신성력은 원소 마법보단 치료술에 쓰였고. 상처가 나는 속도보다 아무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올 정도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검은 닭의 배를 가르고 나온 악마를 조아리게 만든 케이틀린 대제나, 감히 스티아의 현신이라 일컬어지는 볼턴도 블로썸의 발끝에나 겨우 닿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야!”

동시에 두려운 광경이기도 했다. 블로썸의 부자연스러우리만큼 아름다운 이목구비는 신성력이 발산하는 희끄무레한 빛과 어우러져 그녀를 인간이 아니라 무슨 조각상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절절한 절망이 느껴지는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얼굴에는 감정이 거의 드러나 있지 않아서 더 그랬다. 불투명한 막을 씌운 듯한 눈동자에서 굴러떨어진 물방울이 뺨에 튄 핏자국과 섞이니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야. 내가 아니야. 내 잘못이….”

숫제 미친 사람처럼 되뇌는 블로썸을 찬찬히 살폈다. 뺨뿐만이 아니라 머리카락과 옷에도 꽤 큼지막한 핏자국이 도드라졌으나, 정작 몸에는 이렇다 할 상처가 없었다. 말인즉슨 저 많은 피가 켈리와 케이시에게서 나왔다는 건데… 거기까지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켈리!”

친구의 이름을 외치며 뛰쳐나가려다, 카일에 의해 저지당했다. 허리를 붙들고 확 끌어당기는 동작이 드물게 난폭했다. 나는 난폭한 짐승을 가두듯 단단히 둘리어진 카일의 팔을 꼬집고 때리며 발버둥 쳤다.

원래 카일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이겨 먹지는 못했다. 반면 나는 꽤 많은 상황에서 그를 이용해 먹을 줄 알았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카일을 뿌리치고 켈리에게 향했다.

블로썸은 내가 흙먼지에 뒤엉킨 켈리를 부둥켜안았을 때 겨우 나의 존재를 인지한 듯했다. 죽은 나무처럼 앙상한 검지가 득달같이 나를 가리켰다.

“너 때문이야! 저, 전부 다 너 때문에, 너만 아니었으면…!”

블로썸이 분노함에 따라 그녀의 주변을 둘러싼 소용돌이가 몸집을 키웠다. 손가락질이 아니라 마법진이라도 그린 모양새였다.

덕분에 블로썸과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무릎을 대고 앉은 내게도 돌조각이 왕창 날아들었다. 광대뼈 부근이 따끔거렸다.

“따, 따지고 보면 다 네 짓이나 다를 게 없다고….”

더듬더듬 내뱉는 억지에 논리가 요만큼도 없었다. 안 웃겨서 비웃을 수도 없었다. 다만 약간 두려웠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뇌까리는 모습이 꼭 어디쯤 망가진 애 같았다.

아무튼 위험하다고 느껴서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그랬더니, 블로썸은 주절거리다 말고 뭔가 깨달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곧 언제 울었냐는 듯 해사한 미소가 만면에 떠올랐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급격한 변화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