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에 가려 미처 뽐내지 못한 존재감을 과시라도 하는 듯, 시야가 온통 하늘이었다. 검은 벨벳 원단 위로 남색, 보라색, 빨간색 시어 원단을 마구잡이로 겹친 듯 신비로운 색이었다.
서쪽으로는 달이, 동쪽으로는 태양이 뜨거나 지고 있었는데, 꿀에 적신 솜뭉치처럼 보이는 구름과 은파가 아른거리는 호수에 손가락을 담갔다가 확 튕겨 뿌린 듯한 별들이 여백을 가득 메운 모습이 환상적이었다.
충성스러운 두 마리 병정 벌은 여왕이 내린 명령을 완수하자마자 인사 한마디 없이 자리를 떴다. 두꺼운 나뭇잎 끄트머리를 조심조심 디딘 채 그것들이 날아가는 방향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멀리 보려고 해도 바닥은커녕 꿀벌통이 어디 달려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때? 무서워?”
“너무 높아서 오히려 안 무서워.”
으스대며 다가오는 사마귀에게 멍하니 대꾸했다. 압도적인 절경에 매혹된 탓도 있었고, 땅보다 하늘이 오히려 훨씬 가깝게 느껴지는 통에 현실감을 잊은 탓도 있었다. 심지어 몇몇 구름 조각은 내 발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래?”
내 말에 사마귀는 이를 드러내고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날개 달린 인간 올레아가 언젠가 손에 넣고자 했던 태양처럼 붉은 눈은 기묘하게 번들거렸다. 되게 배부른 짐승이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아니면 미친 사람이거나.
“그럼 떨어져도 괜찮겠네?”
“봐, 이렇게 뛰면 저 별에 닿을 수 있을 것… 뭐라고?”
문득 바람이 부나 보았다. 소매와 옷깃, 대충 여민 망토 자락으로 찬 기운이 훅 들어왔다. 나는 느리게 뒤로 걷기 시작했다.
“너… 설마… 아니지?”
“나는 어릴 적에 뱀을 엄청 무서워했거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왜인지 알아?”
“아까까지만 해도 분위기 좋았잖아. 내가 마음에 든다며… 봐주면 안 될까?”
“내 형제 중 하나가 나를 뱀 굴에 집어처넣었거든. 딱 이틀 있으니까 뱀이 내 입 속에 들어와도 소름이 안 끼치더라. 신기하지?”
“내가 하는 말 듣고 있기는 한 거야?”
“아, 세르지오. 그 새끼한테는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해. 그래서 원래는 목 자를 거 다리만 딱 잘랐지. 얼마나 너그러운 처사야? 어?”
우리는 서로를 지독하게 증오하는 사교춤 파트너처럼 움직였다. 다만 사마귀는 내가 물러나는 만큼보다 정확히 반걸음을 더 전진했다. 그래서 나뭇잎 끄트머리의 끄트머리까지 몰린 내 발뒤꿈치에 약간의 탄성과 함께 스산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할 때쯤에 걔는 나와 거의 닿아 있었다.
그녀가 발랄하게 외쳤다.
“걱정 마, 독거미. 나는 대륙 최고의 원소 마법사야!”
작지 않은 충격이 복부를 강타했다. 깜짝 놀라 내려다보자 세상에, 손도 아니고 발이었다. 깔끔한 발길질로 나를 허공에 띄운 사마귀의 모습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야, 이 또라이…!”
다급히 내뱉은 외침은 사마귀를 향해 뻗다 말고 고꾸라졌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시야가 감당이 안 되어 눈을 감고 싶었는데 이름 없는 자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나는 눈을 부릅뜬 채 구름과 나뭇잎을 찢어발기며 한참이나 떨어졌다.
아무래도 사마귀는 내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 추락 그 자체에 익숙해지길 바랐나 보다. 그녀가 뱀 굴에서 이틀을 보내는 동안 울며 겨자 먹기로 뱀과 친밀해진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사마귀의 판단이 옳았을지도 몰랐다. 정도 이상의 자극이 신경을 마비시키니, 불안이 한결 무디어진 것은 물론이요 별안간 희한한 기분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분노는 공포에서 쾌감으로 변모했다. 비명으로 이어진 욕설은 마지막 순간 감탄사가 되었다. 잔뜩 웅크린 몸 위로 선을 이루며 맴도는 별들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근데 그러자마자 엉덩이에 무자비한 고통이 내리꽂혔다. 소리를 꽥 지르고 나니 구름과 별과 거대 곤충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풀이나 흙이 아니라 돌 위로 나뒹구는 중이었고.
“되게 재밌는 시련을 겪었나 보네.”
욱신거리는 등허리를 문지르며 일어서는 내게 누가 아는 체를 했다. 이름 없는 자의 무덤은 어떤 입구로 들어가든 같은 출구로 나오게 되어 있었으므로, 타이밍 좋게 비슷한 시간에 시험을 마친 다른 학생임이 틀림없었다.
꼴사납게 자빠지는 모습을 남에게 보였다는 수치심에 주춤대다가, 목소리와 비꼬는 말투가 무지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시 둘러보자 아마도 던전 출구로 이어져 있을 외길 벽면에 기대앉은 남자가 보였다.
“거기서 뭐 해?”
언제 어디서 만나도 반가운 것이 소꿉친구였다. 나는 카일과 본격적으로 수다를 떨기 위해 그의 곁에 쪼그려 앉았다. 무너진 천장에 얼기설기 얹힌 석재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와 카일의 얼굴 반절을 비추었다. 완전 꼴이 말이 아니어서 기함을 했다.
“너 괜찮아? 땀 엄청 나!”
“안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았는데… 이제 좀 살 것 같아. 어떻게 된 게 이 짓은 매년 해도 익숙해지지 않네.”
“환각이 엄청 무시무시했어? 코넬리아가 너를 가둬 두고 천 일하고 하루 동안 자기 망상이라도 떠든 거야?”
“그거보다 백배는 끔찍했어. 넌 아마 상상도 못 할걸….”
카일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마따나 내 상상력은 너무나 빈약하여, 누이의 재미라곤 지지리도 없고 폭력적이기만 한 창의성에 끊임없이 노출되는 것 이상으로 끔찍한 무언가를 떠올릴 수 없었다.
나는 게임의 서브 캐릭터라는 죄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저주에 걸린 카일이 매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시련에 대해 캐묻는 대신 그를 곁눈질하기를 택했다.
정리할 겨를이 없었는지 아무렇게나 늘어진 앞머리 아래로 푹 꺼진 눈 밑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안쓰러웠다. 두꺼운 망토 너머로 꺼질 듯이 전해지는 온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가 앉은 쪽으로 살짝 붙었다.
“네 시험은 어땠어?”
다소의 울적함과 불안감, 어디서 기인하는지 정확히 집어내기 어려운 서먹함이 피어오르기 시작할 즈음에 카일이 대뜸 지껄였다. 나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마, 말도 마. 웬 정신 나간 여자애가 나와서 나를 막 부렸는데, 어느 나란지 몰라도 걔가 여왕이 되면….”
말하는 도중 불현듯 따끔한 감각이 귓불을 찔렀다. 무의식적으로 만지니까 울퉁불퉁한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물방울 모양으로 세공된 보석이었다. 엄지와 검지로 꾹 누르자 박동하는 듯한 움직임이 거세었다.
다음 순간 어마어마한 깨달음이 목덜미에 냅다 꽂혔다. 사마귀. 지평선을 따라 가득 펼쳐진 밀밭을 연상시키는 금발에, 군밤처럼 까무잡잡한, 내가 만난 가장 난폭한 여자애. 가끔 과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잘 어울리는 귀족적 태도와 이를 보이고 웃는 버릇. 그녀의 눈동자는 손을 대면 델 듯이 타올랐다. 마치 그녀가 소환해 낸 불꽃처럼.
“어쩌면 진짜 미치는 것도 괜찮겠지.”
메아리처럼 울림이 좋은 목소리가 기억을 비집고 나와 막무가내로 아우성쳤다.
“영혼을 약간 분리할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계시라도 받은 듯이 벌떡 일어섰다.
“맙소사. 에드가를 만나야겠어. 당장!”
농담의 달 연회 때 쌍둥이가 나눈 이야기를 떠올리면, 또 게임의 흐름이 줄곧 어떠했는지를 돌이켜 보면, 앞으로 길어 봐야 반나절 후에 에드가 라모스는 피츠시몬스에서 사라질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졸업 연회 때 눈인사나 겨우 하게 될지 몰랐다.
걔랑 끝까지 틀어진 사이로 남는 것도 문제였지만 지금 내 혀 밑을 맴도는 무언가는 그야말로 촌각을 다투는 일이었다. 귓불에서 날뛰는 귀걸이를 잡아 뺀 다음 뛰쳐나가려던 찰나였다. 무릎 뒤쪽에 무게감이 느껴진다 싶더니 바짓단이 끌렸다. 당황하여 돌아보자 카일은 호되게 혼난 애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 너 한참 기다렸어. 여기서 저기까지 가는 네 걸음, 네 시간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싶어서. 내게 그 정도도 나눠 줄 수 없는 거야? 무리한 요구가 아니잖아.”
그렇게 말할 거면 적어도 떨지나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즉시 몸을 물리거나, 반성하는 듯이 굴지도 않아야 했고.
“미안. 또 욕심냈지. 안 이러기로 했는데.”
“아니야.”
약간 짜증이 나서 도리질을 쳤다. 얘가 잠시라도 스스로를 탓하는 게 싫었다. 그러는 이유가 나라는 것도 너무 싫었다.
다소 거친 동작으로 주저앉았더니 카일은 꽤나 놀란 듯했다. 휘둥그레 뜨인 눈과 확 들린 눈썹, 미간하고 콧잔등에 얕게 잡힌 주름이 유달리 귀엽게 느껴졌다.
“아니야, 카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너는….”
나는 카일의 얼굴을 꼭 붙잡고 그의 이마에 내 이마를 마주 대었다. 따스한 숨이 서로 뒤엉켰다.
“내게 매달리지 마. 구애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야. 나를 숭배하고, 뭐나 된 것처럼 느끼게 하지 말라고. 원하는 게 있으면 뻔뻔하게 말해. 네 말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니잖아.”
“…….”
“우리는 똑같이 특별한 존재고 나는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너를 소중히 여기고 있어. 알겠어?”
“아리….”
“가자. 소중한 사람들끼리, 느긋하게. 나 에스코트 해 줘.”
‘맘에 안 드시나요, 미스터 빌라드?’ 장난스레 눈을 찡긋거리며 손을 내밀자 카일이 헐레벌떡 붙잡아 왔다. 나는 일부러 턱 끝을 더 세우고 허리를 더 비튼 다음 망토의 밑단을 살짝 들어 엄청난 귀부인이 된 듯이 으쓱댔다. 그러고 나서는 발끝을 들고 무릎을 스치며 걷기 시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식물과 으스스한 부장품들이 뿜어내는 퀴퀴한 냄새로 가득하고, 내딛는 걸음마다 돌멩이나 요만한 벌레가 치이는 던전에서, 볼품없는 천 갑옷을 걸친 채였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어차피 우리에게 중요한 건 함께 보내는 시간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