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 자 숙박비까지 벌어 둬야 하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더니만 여왕벌은 대자대비하게도 자기가 모은 꿀을 우리에게 반씩 나누어 주었다. 성하지 않아도 날개와 대롱을 지녔으니 또 모으면 된다고 하면서 말이다.
“이게 바로 군주지… 아야!”
호박벌 왕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신이 나서 까불다가 사마귀에게 등짝을 맞았다. 어찌나 교묘하게 때렸는지 손이 잘 닿지도 않는 곳이 따끔따끔해서 성질이 났다. 씩씩거리며 걷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와중 충동적으로 말이 나갔다.
“있잖아, 사마귀.”
“왜, 독거미.”
“네가 꿀벌을 돕는 이유는 시련 때문이야? 내 말은, 어제부터 네가 약간… 이 일에 어떤 의미를 두는 것처럼 느껴졌거든.”
문득 사마귀의 표정이 확 변했다. 물론 좋은 방향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즉시 아차 싶었으나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당장이라도 후려갈기고 싶다는 듯이 노려보던 그녀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잘도 내 신변을 캐려고 드는구나.”
“딱히 그런 의도는….”
“뭐, 상관없어. 나는 네가 꽤 마음에 드니까. 일단 웃기잖아.”
언제 괄괄하였냐는 듯 갑자기 서글서글해져서 황당했다. 나는 지금껏 켈리만큼 변덕이 심한 애는 피츠시몬스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얘가 이겼다.
“나는 여왕이 될 거야. 희망 사항이기도 하고, 절대적 진리이기도 해. 쟁취하고자 하는 것을 놓쳐 본 적이 없거든.”
내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마귀가 내뱉었다. 꽤나 당돌한 발언이었다.
“내 피에 대한 나의 긍지는 듀마이어 요새보다도 견고해. 만일 꿀박벌에게 있었던 일이 내게도 벌어진다면, 그리하여 끝내 나의 날개가 뜯기고 만다면, 나는 팔과 다리와 이와 잇몸을 써서 엉겅퀴 덤불 위를 걸어 왕좌를 차지하겠어.”
그녀는 다리에 힘을 줘서 단단히 선 채, 주먹을 쥐고 있었다. 대중 앞에서 웅변이라도 하는 양 자신감 넘치는 태도였다. 나뭇가지를 타고 미끄러진 바람이 긴 머리카락을 극적으로 날렸다.
또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실낱같은 햇살은 그녀만을 비추는 조명 같았다. 나는 어떤 발코니나 연단에 선 사마귀의 모습을 쉽게 상상했다.
“나의 신실한 친구 케이트가 알았다간 경을 칠 소리지만… 나는 스티아와 그가 안배한 운명을 믿지 않아. 내 직감과 그것이 만들 가능성을 믿을 뿐이지. 그리고 내 직감은 지금 다른 어느 순간보다 강하게 외치고 있어. 쟤를 도우라고. 추후 어떤 형태로든 내게 돌아올 것이라고.”
이윽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혼잣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사마귀에게는 언제나 모두가 그녀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이는 버릇이 있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토씨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귀에 담을 수 있었다.
“미물에게도 배울 점이 있군. 미친 체하는 건 적을 방심시키기 위해 택할 법한 썩 좋은 수단이야. 어쩌면 진짜 미치는 것도 괜찮겠지. 영혼을 약간 분리할 수만 있다면….”
영혼을 분리한다라.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이야기에 생각에 골몰한 찰나 사마귀는 상념을 잘라 내듯 손뼉을 크게 친 뒤 화제를 바꾸었다. 별안간 기분이 들떠서는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불쏘시개로나 대우하던 동행인을 아낌없이 칭찬하는 짓 말이다!
그녀는 내 귓불에 매달린 귀걸이가 매우 아름답다고 호들갑스럽게 떠들었다. 그러더니 내 눈동자가 칙칙한 푸른빛만 아니었으면 루비가 가진 매력을 몇 배는 살릴 수 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이를테면 뇌쇄적인 붉은색이라든가. 그러면서 애교를 부리듯 눈을 깜빡이기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깨달았다.
아주 날강도가 따로 없었다. 순진한 척 고맙다고나 하면서-왜냐면 얘는 진짜 너무 무서웠다-묶었던 머리를 가슴 앞으로 내려 사마귀의 시야에서 귀걸이를 가렸다. 밤에는 잠자리에 결계라도 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호박벌 감독관에게 모아 온 꿀을 건네고, 전날 먹다 남은 육포를 모조리 해치우고 나니 여왕벌이 돌아왔다. 세 명분의 노동을 하려니 그새 수척해진 것 같았으나 애써 외면했다.
묵직하게 흐르는 꿀 강과 밀랍 다리를 지나 벌통의 거의 반대편까지 갔다. 연립 주택이 대강 붙은 틈새에 가파른 비탈길이 있었다. 거침없이 나아가는 여왕벌 뒤에서 나와 사마귀는 자꾸 움츠러드는 등을 의식해서 폈다.
밀루아는 솔직히 부유한 나라라고 할 수 없었다. 땅덩어리만 넓지 자원은 희박해서 가공 기술만 발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샌크릭은 여유롭지 않은 지역으로 꼽혔다. 무역 시장의 흥망에 따라 들쭉날쭉하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일정한 수익이 나오는 달튼이나, 영지민들이 성실하고 영주가 부지런한 빌라드 정도가 그나마 먹고살 만은 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샌크릭에도 빈민가가 있었다. 천방지축 날뛰는 자작가 영애가 한 번쯤 구경하고 싶다고 조를 만큼 가까운 위치에. 돌이켜 보면 얼마나 귀족스러운 발상이냐 싶긴 한데, 철은 없고 호기심만 넘치는 시기여서 그랬다. 단어라도 ‘구경’이 아니라 ‘시찰’이나 ‘정탐’, ‘견학’ 같은 걸 쓸 것을.
아무튼, 나는 샌크릭의 빈민가를 본 기억이 있지만 그게 당장 목전에 펼쳐진 호박벌 왕국의 빈민가보다 처참하지는 않았다. 부상을 당했거나 너무 늙어 노동에서 배제된 벌들이 문드러진 몸뚱이를 이끌고 구걸하러 나온 모습은 아무래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사마귀도 마찬가지로 충격을 받은 듯했다. 더구나 얘는 고작 하위 귀족에 불과한 나와 달리 왕족이기까지 했다. 그녀가 내 어깨를 짚고 속살대었다.
“인간의 빈민가도 비슷해?”
“이거보다는 나아. 근데 내가 빈민가를 접한 적이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딱 봐도 돈 없는데 사고 잘 치게 생겼잖아. 의복이나 가방도 싸구려 같고. 끼니때마다 웬 나무껍질 같은 거 뜯어 먹고.”
너무 여상스러운 태도여서 화도 안 났다. 가난한 게 거만한 것보다 낫다고 일갈할까, 아니면 육포는 나무껍질이 아니며 훌륭한 보존식이라고 따질까 고민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목적지에 거의 다 온 듯했기 때문이다.
톱밥을 접착제 같은 것으로 뭉개어 세운 간이 건물에 네모난 구멍이 문이랍시고 나 있었다. 문간에는 드레스의 가슴팍이나 손톱에 잘게 붙이는 가짜 보석들을 꿰어 만든 발이 드리워진 채였다. 그걸 젖히고 들어가니 흡사 오크 서식지처럼 어질러진 방에 테이블만 잔뜩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딱 봐서 용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잡동사니들이 뒹구는 중이었다. 뜻밖의 난장판에 멍하니 있자 잡동사니 사이에 머리를 박고 있던 호박벌 한 마리가 우리를 쳐다봤다.
안면부를 빙 두른 보안경과, 날개 아래로 늘어뜨린 흰색 천이 특이했다. 자세히 보니 그건 누군가 잃어버린 손수건이었다.
“쟤는?”
“호박벌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공학자야.”
온 종일 줄을 당기느라고 누적된 피로가 몰아서 왔다. 자고 일어나면 팔이 똑 떨어져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왕족이라고 고통이 덜한 건 없어서, 사마귀는 식사 내내 왕실 공학자라는 벌을 만나면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며 이를 갈았다.
“야, 이거 네가 만들었냐?”
여왕벌의 소개를 듣자마자, 사마귀는 등에 멘 비행 장치를 벗어 내팽개치고 마구 화를 냈다.
“그따위 멍청한 물건은 안 만들어.”
그러나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공학자는 건들거리는 사마귀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도리어 그녀의 발언에 불쾌해진 듯했다. 특이한 차림새만큼 담도 큰 모양이었다.
“공학자라며? 가장 뛰어난?”
“공학자? 맞아. 가장 뛰어난 것도 맞고. 그 비행 장치를 설계한 건 훨씬 덜떨어진 자식이니까.”
“가장 뛰어난데 왕실 공학자가 아니야?”
“너희들이 하고자 하는 말은 알겠어. 하지만 그게 사실이야. 예를 들어 이건 내가 발명한 비행 장치지. 거추장스러운 도르래와 팔을 혹사하는 당김줄 없이 버튼 하나로 떠오를 수 있도록 제작되었어.”
“대박!”
공학자가 내미는 비행 장치를 신이 나서 받아 들었다. 바로 착용하려다가 멈칫했다. 등에 맞닿는 부위, 어지간해서는 눈치채기 힘든 위치에 작은 글씨로 경고 문구가 쓰여 있었다.
주의 : 열에 노출되면 파열되거나 폭발 가능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