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말을 얹지 않고 이층 침대의 아래층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거기 놓인 네 칸짜리 사다리마저 밟고 싶지가 않았다. 사마귀도 비슷하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다른 침대의 아래층을 들여다봤다.
새털과 거미줄로 짜인 매트리스 위로 꿀박벌의 짐이 흐트러져 있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마귀는 그것들을 위층에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난데없이 봉변을 당한 침대의 주인이 쳐다보자 ‘왜? 넌 날개 있잖아.’라고 지껄였다. 정말 가차 없는 애였다.
“정말 불쌍하다. 한때는 꿀벌 왕국을 호령하는 여왕이었는데, 하루아침에 호박벌들의 동정심에 기대어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다니….”
뻔뻔하고 위협적인 태도에 겁을 집어먹은 꿀박벌이 누가 봐도 부자연스럽게 저녁 약속을 핑계 대며 나간 뒤, 우리도 식사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나는 제이든으로부터 던전 공략의 필수품으로 추천받은 육포를 씹으며 웅얼거렸다. 온통 단 것뿐인 공간에 있어서인지 짜디짠 육포가 되게 맛있게 느껴졌다.
“불쌍한 게 아니라 한심한 거야.”
사마귀의 가방에서는 소금 알갱이가 박힌 크래커가 나왔다. 질리지도 않는지, 사마귀는 발코니에 놓인 물뿌리개에서 꿀을 좀 가져다가 크래커에 치덕치덕 발랐다. 그녀가 잇새로 꿀을 튀기며 거칠게 내뱉었다.
“내가 쟤라면 저 꼴로는 못 살아.”
“야, 무슨 말이 그래? 군주답네 어쩌네 하더니 자비도 없냐?”
사마귀가 별로 정 없는 애라는 건 그녀와 두어 마디만 섞어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고 대하는 데다 안쓰러운 사연까지 있는 꿀박벌을 매도할 정도인 줄은 몰랐다.
다소 비난조로 대꾸했더니 사마귀는 화가 난 듯했다. 남은 크래커를 모조리 입에 털어 넣고 나서, 그녀는 그것을 꼭꼭 씹어 삼키는 내내 나를 물끄러미 봤다. 입술의 움직임에 따라 뾰족한 이가 보였다 말았다 했다. 눈꺼풀은 한순간도 닫히지 않았다.
타오르는 불꽃의 중심부를 연상시키는 다홍빛 눈동자가 나를 꿰뚫기라도 할 것처럼 반짝였다. 지지 않고 쏘아 보았으나 금방 한계에 다다랐다. 손등으로 거칠게 눈을 비비고 나니 사마귀는 어느새 침대에 드러누운 채였다. 물 빠진 금발이 비좁은 매트리스를 비집고 나와 아무렇게나 흐트러졌다. 꼭 침대 옆면에 굴곡진 폭포가 흐르는 것 같았다.
상대가 이렇게 나오는데 혼자 흥분해서 따지고 드는 것도 웃겼다. 약간의 허무감에 젖어 침대에 몸을 실었다.
이미 북슬북슬한 털이 전신을 감싸고 있는 호박벌은 푹신한 매트리스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편이었다. 그래서 걔들의 침대는 인간 기준으로 딱딱한 편에 속했는데, 온종일 몸을 혹사한 탓인지 편안하게만 느껴졌다. 먹다 남은 육포를 가방에 갈무리할 겨를도 없이 잠에 빠졌다.
***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우리의 호박벌 친구가 찾아왔다. 그것의 품에는 나뭇가지와 송진, 꽃과 풀의 잎을 이리저리 엮어 만든 마도구 같은 것이 잔뜩 있었다.
“그게 뭐야?”
“너희처럼 날개와 대롱이 없는 일꾼들을 위해 왕실 공학자가 만든 비행 장치와 흡수 장치야. 이걸 어깨에 메고 이 줄을 계속해서 당기면 공중에 뜰 수 있고, 이 바늘을 꽃의 꿀샘에 꽂고 여기 이 레버를 내리면….
“설명은 됐고, 이걸 왜 우리한테 주냐고.”
“맙소사, 친구! 아무리 막역한 사이여도 빌린 건 갚아야지! 설마 이 근사한 연립 주택에 아무런 대가 없이 묵을 수 있을 거라고 여긴 건 아니겠지!”
으르듯 하는 사마귀의 말에 호박벌이 귀여운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뭐? 안 돼! 우리는 늦기 전에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그렇담 더욱 빨리 일을 해야겠네! 그래야지 빨리 끝나지!”
명랑하게 소리를 높이며, 호박벌은 앞다리를 마구 흔들었다. 응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성가신 파리를 쫓아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의도는 같았다. 우리는 매우 시무룩해져서 비행 장치와 흡수 장치를 받아 들었다.
왕실 공학자가 심혈을 기울인 결과물이라고 한껏 뻐기던 발명품들은 영 엉터리였다. 나는 꿀이 풍부한 꽃을 찾아 나는 동안 추락하지 않기 위해 진짜로 쉴 새 없이 줄을 당겨야만 했다. 고룡 이그나스의 비늘로 체력 수치가 보정된 상태가 아니었다면 진작 고꾸라졌을 게 틀림없었다.
흡수 장치 또한 상태는 비슷했다. 흡수구에 달린 바늘은 모기에게서 떼어 낸 것이라고 했는데, 견고하기는 했지만 너무 가늘어서 꿀통에 꿀이 차는 속도가 지극히 느렸다.
이래서야 대체 어느 세월에 숙박비를 갚고 벗어날 수 있을지 막막했다. 사마귀에게 혼나 가며 나무를 오르던 시절이 그리워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활짝 벌어진 꽃잎 가장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근방에서 나와 같이 농땡이를 치는 중인 사마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붉은 시선은 유유히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꿀박벌에게 꽂혀 있었다.
기를 써서 날아다니는 호박벌에 비해, 꿀박벌의 비행에는 여유와 우아함이 있었다. 날개를 다친 터라 궤도는 엉망이었지만 말이다. 여왕벌이라고 듣고 나서 보니 정말로 보라색 피의 위엄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야, 꿀벌.”
말릴 새도 없이, 사마귀가 대뜸 지껄였다. 우렁찬 목소리와 똑똑한 발음, 못 되어 먹은 말본새, 상당히 그녀다웠다. 꽃에 처박혀 꿀을 따다 말고 머리를 치켜든 꿀박벌이 내게로 다가와 지극히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있잖아, 독거미. 네 친구 사마귀는 기억력이 좀 안 좋은 것 같아….”
“너는 긍지도, 자존심도, 하다못해 밸도 없는 거야? 아니면 그런 척을 하는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사마귀는 몰아치듯 말을 이었다. 매우 강한 기세였다.
“네 짐 중에 인장 같은 게 있었어. 가방 깊숙이 잘도 숨겨 놓았더군. 내 추측이 맞는다면 그건 네가 여왕벌이었을 때의 소지품일 듯한데. 여기 여왕도 비슷한 걸 쓰더라고.”
사마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가슴팍을 봤다. 직사각형과 꼬리가 뾰족한 동그라미 몇 개로 벌을 묘사한 문양이 시야에 걸렸다. 어제 호박벌 여왕은 각진 팔찌 형태의 인장을 녹인 밀랍과 함께 우리의 옷깃에 눌러 찍음으로써 허가된 방문자임을 표시했다.
만일 꿀박벌에게 여왕으로서의 기억이 없다면 그걸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입을 떡 벌린 채 고개를 돌리자 꿀박벌, 아니 꿀벌은 제자리에서 가만히 날갯짓했다. 항상 방방 떠 있는 호박벌을 모방한 나사 빠진 분위기는 온 데 간 데가 없었다.
“머리통도 조그마한 주제에 셈만 빠르기는.”
잠깐의 침묵 후에 여왕벌이 입을 열었다. 차분하고 단조로우면서도 저변에 깔린 분노가 뼈저리게 와 닿는 말투였다.
“비겁한 기습이었어. 거의 모든 가신이 배신에 가담했더군. 전투 기술이 얼마나 뛰어나든, 엉덩이에 박힌 침이 얼마나 단단하든 그 상황에서는 날개를 뜯길 수밖에 없었을 거야. 게다가 그 어리석은 일벌의 건방진 꼬락서니 하고는… 먹다 남긴 로열 젤리를 입에 좀 처넣는다고 정말로 여왕의 자격을 갖출 것이라 여기는 건가? 키는 비슷해질지언정 천한 출신의 썩어 빠진 정신머리에 군주의 긍지가 깃들 수는 없지.”
여왕벌이 숨 한번 쉬지 않고 빠르게 내뱉었다. 오래도록 담아 뒀던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는 사마귀에게로 가 그녀의 얼굴 가까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위협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짐작되는 행동이었다.
“돕지 않을 거라면 입 다물어. 방해는 가만두지 않겠어. 나는 반드시 내 자리를 되찾을 거야.”
“도울게.”
“뭐?”
“널 돕겠어. 네 자리를 되찾을 거야. 맹세하지.”
덤덤히 대꾸하며, 사마귀는 일전 호박벌 사기꾼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를 보고 눈을 찡그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 맹세는 보탤 것 없는 진심인 모양이었다. 어차피 나도 그녀와 같은 마음이었으므로 입가에 미소를 걸기나 했다.
탐색하듯이 사마귀를 훑어보던 여왕벌은 어느 순간 그대로 멈췄다. 무수한 겹눈으로 이루어진 곤충의 눈은 흰자위와 검은자위의 구별이 없어서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사마귀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고 직감했다. 당장이라도 불티가 튈 것만 같은 붉은 눈동자를.
잠자코 기다리자 여왕벌이 환희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사마귀의 당당한 태도와 진지한 눈빛에서 확신을 얻은 모양이었다.
“아, 완벽한 때에 등장한 도움의 손길이라니! 드라이어드께서 내게 선물을 내린 것만 같아. 물론 너희가 정말 독거미와 사마귀였다면 훨씬 좋았겠지만….”
“웃기시네. 나는 그따위 곤충보다 훨씬 유능해. 독거미는 몰라도.”
사마귀가 자기를 모욕하지 말라고 발끈하며 나를 모욕했다. 이윽고 꽃술 중앙에 기다란 불기둥이 솟았다.
“나, 나도 저거 할 수 있어…!”
묘한 경쟁심에 헐레벌떡 그린 마법진에서는 주먹보다 조금 큰 불덩이가 튀어나왔다. 로즈마리 왕비의 귀걸이 덕분에 이룩한 장족의 발전이었다. 되게 뿌듯해져서 쳐다보자 사마귀는 비스듬히 웃었고 여왕벌은 성의 없이 환호했다. 입이 썼다.
“좋아. 나는 원소 마법은 잘 못 쓰지만 장난 마법에는 자신 있어. 적들의 날개 밑에서 쇠똥구리보다 구린 냄새가 나게 해 줄게.”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 같긴 한데, 고마워.”
“쟤 은근히 튼튼해. 몸으로 때워야 하는 일에는 충분히 써먹을 수 있을 거야.”
띄우겠다는 건지 깎아내리겠다는 건지 잘 모르겠는 투로, 사마귀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여왕벌은 애매하게 웃더니 일과가 끝나면 동료를 소개해 주겠노라고 했다. 어차피 밤이 되기 전에 나무를 오르기는 글렀으므로 흔쾌히 수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