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그녀가 양손을 입가에 대고 커다랗게 소리쳤다.
“야, 꿀벌!”
그러자 꿀벌을 제외한 거의 모든 벌이 우리를 쳐다봤다. 다들 아주 대경한 표정이었다(물론 곤충에게는 인간과 같은 이목구비가 없었으므로 그들의 감정을 판단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했으나, 어쩐지 그렇게 느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는 다소 당황스러워졌다. 여자애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녀는 손가락을 튕기고 박수를 쳐 가면서 끝끝내 꿀벌의 주의를 끄는 데 성공했다. 꿀벌이 가느다란 다리를 마구 흔들어 답했다.
“나?”
“그래, 너! 왜 호박벌 무리에 끼어 있어?”
“호박벌이니까?”
“아냐! 꿀벌이잖아, 누가 봐도! 덩치도 작고, 엉덩이도 매끈하고!”
여자애가 단호하게 소리치자 꿀벌은 겁에 질린 듯 더듬이를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더니 곧 제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며 날기 시작했다. 삐뚤빼뚤한 궤도로 비틀거리는 꼴이 영 시원치 않았다. 잘 보니 그것의 날개는 가장자리가 매우 너덜너덜했다.
“내 엉덩이 매끈해?”
꿀벌이 울먹거리며 근처의 호박벌에게 물었다. 그러자 모든 호박벌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완전 북슬북슬해!”
“말도 안 돼!”
“좀 작긴 해도 너는 훌륭한 호박벌이야!”
“털도 없고 날개도 없고 다리도 네 개뿐인 징그러운 애들 말은 듣지 마!”
“두 개야!”
대체 이놈의 빌어먹을 곤충들은 왜 하나같이 팔과 다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다. 짜증스레 정정하자 꿀벌을 둘러싸고 나와 여자애의 험담을 하던 호박벌 중 한 마리가 가까이 왔다. 그것이 애교스러운 앞다리로 우리의 가슴팍을 번갈아 찌르며 으름장을 놓았다.
“불쌍한 애야. 괴롭히지 마.”
“불쌍한 애라니?”
“쟤한테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약속할게.”
굳게 맹세한 직후 여자애는 나를 보면서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건 방금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지킬 생각이 전무하다는 신호였다. 순진한 호박벌에게 유감을 표하고 똑같이 했다.
“나도 약속해.”
“좋아. 우선, 너희가 지금 있는 곳은 호박벌 왕국이고, 조금 더 올라가면 꿀벌 왕국이야. 저기 난리 치는 애들 보이지?”
호박벌이 가리키는 곳에 꿀벌 너덧 마리가 모여 있었다. 꿀을 딸 만한 꽃이라도 발견했는지 비스듬한 8자를 그리며 나는 모습이 춤을 추는 모양새와 비슷했다. 넋을 놓은 채 구경하고 있노라니 호박벌이 불쾌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말로 하면 될 것을 항상 저리 천박하게 군다니까… 아무튼, 얼마 전에, 꿀벌 한 마리가 갑자기 호박벌 왕국으로 떨어졌어. 처음에는 침략자인가 했는데, 체포한 다음에 살펴보니 엄청 다쳤더라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길래 치료해 줬지.”
“와! 되게 착하다, 너네.”
“몸이 크면 심장도 큰 법이야.”
뽐내듯이 말하는 털투성이 벌은 다른 곤충들에 비하면 제법 볼 만한 편에 속했다. 나는 호박벌이 주목하지 않는 사이에 여자애와 짧은 미소를 교환했다.
“실수로 떨어졌거나 어떤 범죄의 피해자라고 판단해서 급한 조치만 마친 뒤에 꿀벌 왕국으로 돌려보내려고 했어. 그런데, 이럴 수가! 살리고 나서 보니까 여왕벌이었던 거야!”
“여왕벌이라고?”
“그래. 딱 봐도 귀티 나 보이잖아. 저 길쭉한 날개하며, 날씬한 몸매에… 더듬이가 뻗은 각도도 고상하고.”
“그렇구나….”
“정찰병에게 듣기로는, 꿀벌 왕국에서 최근에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된 모양이야. 야심을 품은 병정 벌들이 일벌한테 로열 젤리를 몰래 훔쳐 먹였대. 너희들도 알다시피, 로열 젤리를 먹고 자란 일벌은 공주 벌이 되잖아?”
나도 여자애도 벌들의 생리에는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설명하는 뚱땡이 호박벌이 매우 사랑스러웠으므로 대충 고개를 끄덕여 호응해 주었다.
경청할 준비가 된 관중들 덕분에 이야기꾼은 매우 신이 난 모양이었다. 잔뜩 흥분한 호박벌이 가슴과 배를 잇는 자루마디를 살짝 비틀고 빠르게 날갯짓하자 우리의 시야가 그것의 토실토실한 엉덩이로 가득 찼다.
“어린 여왕벌이 반역을 일으키면 늙은 여왕벌로서는 날개를 뜯긴 채 추락할 수밖에 없어. 보통은 호박벌의 영역까지 떨어지는 건 머리통이나 다리 한 짝이 다인데, 그걸 생각하면 쟤는 정말 운 좋은 거지. 안타깝게도 정신을 좀 놓긴 했는데.”
“그래서 자기가 호박벌인 줄 아는 거구나.”
“그것도 있고, 솔직히 호박벌이 되기 싫어하는 곤충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호박벌은 야만적인 꿀벌에 비해 아주 관대하고 선량하다고. 이 바다처럼 너른 엉덩이를 봐.”
“너처럼 매력적인 엉덩이를 가진 벌은 확실히 못돼 먹을 수가 없지.”
“털도 없고 날개도 없고 다리는 두 개뿐인데 말은 잘 통하네! 우린 이제 친구야!”
“좋아, 친구!”
피츠시몬스의 그 누구도 거대 호박벌과 악수해 본 적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카일이나 애들한테 자랑할 무용담이 생겼다는 생각에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와는 별개로 거대 호박벌의 털 난 앞다리가 손에 닿는 감각은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다. 실은 약간 소름 끼쳤는데, 티를 냈다간 나의 첫 곤충 친구가 상처받을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친구’. 털도 없고 날개도 없고 다리도 두 개밖에 없는 이 불쌍한 친구들은 오늘 당장 잘 곳이 없어. 관대하고 선량한 호박벌이라면 친구를 외면하지 않겠지?”
“물론이지! 여왕님께서도 나만큼 매력적인 엉덩이를 지니고 계시거든. 분명히 너희를 받아 줄 거야! 따라와!”
분위기가 훈훈해진 틈을 타 여자애가 건넨 제안을, 호박벌은 고민도 않고 덥석 받았다. 나는 차츰 어둑해지기 시작한 주변을 슬쩍 본 뒤에 콧노래를 부르는 호박벌과 함께 나무줄기를 오르기 시작했다. 잔가지 두 개 정도를 건너면 도달하는 굵은 가지에 입이 떡 벌어지는 규모의 벌통이 매달려 있었다.
“어, 그런데, 여왕님께 너희를 어떻게 소개해야 하지?”
별안간 떠올랐다는 듯이, 앞서가던 호박벌이 우뚝 멈춰 서더니 물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여자애가 냉큼 대답을 가로채었다.
“얘는 독거미고, 나는 사마귀야.”
“‘독거미’랑 ‘사마귀’란 말이지… 끔찍한 외모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이름이네. 불쌍해라!”
원래 한번 귀엽기 시작하면 뭘 해도 귀여운 법이었다. 상냥하게 실례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호박벌에게 생글생글 웃어 주고 나서, 태평스레 뒤를 따라 오는 여자애와 보조를 맞추었다.
“왜 하필 사마귀야?”
“제일 좋아하는 곤충이야. 완전 세잖아.”
“무슨 열 살배기 남자애처럼 말하네.”
혀를 내두르자 사마귀는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세게 찔렀다. 장난에 손속을 두지 않는 편인지,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다. 어쩌면 진짜로 팔에 가시가 돋쳐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
그 누구도 벌통 내부에 이리 섬세하고 아름다운 데다 문명화되기까지 한 건축물들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호박벌 왕국에 발을 들이자마자, 나와 사마귀는 주위를 둘러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잘 닦인 길 양극단에 어마어마하게 높은 연립 주택이 세워져 있었다. 정확히는, 벽 자체가 연립 주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완전히 동일한 육각형 구조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졌는데, 호박벌들도 그것을 알았는지 발코니마다 밀랍으로 된 조각이나 화분 같은 걸 놓아 집 주인의 개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연립 주택 사이에 군데군데, 귀족의 타운 하우스처럼 호화로워 보이는 집도 있었다. 길을 안내해 주는 호박벌에게 묻자, 장군 벌이나 공주 벌, 혹은 여왕의 반려 벌이 지내는 곳이라고 했다. 밀랍으로 된 분수에서 꿀이 흐르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날개 없는 곤충, 혹은 인간이 여왕을 알현하기 위해서는 벽 한쪽에 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했다. 나도 사마귀도 어딜 더 오르는 것은 질색이었으나 사다리로 가는 길에 펼쳐진 광경이 워낙에 장관이어서 마음이 풀렸다.
여왕벌의 늠름한 엉덩이가 실감 나게 조각된 다리 아래로 꿀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묵직한 흐름 일부를 가르며 튀어 오르는 밀랍 물고기의 움직임은 살면서 본 신기한 것 중에 손으로 꼽을 만했다. 호들갑을 좀 떨었더니 길 안내 호박벌은 뽐내듯이 왕실 공학자의 솜씨를 자랑했다.
왕실 공학자라고? 벌한테? 도무지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끝도 없이 이어진 사다리를 밟으면서 시련을 마치고 던전 바깥으로 나갔을 때 벌한테 안 쏘이고 벌통을 갈라 볼 계획을 세웠다. 거기에도 아기자기한 꿀 강과 손톱보다 작은 밀랍 물고기가 있다면 하나쯤 가지고 싶었다.
호박벌 왕국의 여왕은 다른 호박벌들처럼 친근하고 깜찍스러웠다. 걔는 갑자기 나타난 징그러운 생김새의-호박벌 관점에서-생명체에게 그다지 놀란 것 같지도 않았다. 티타임을 갖자고 계속 조르기에 거절하느라 진땀 좀 뺐다. 내가 아무리 단 걸 좋아해도 벌의 식습관을 따랐다간 제 명에 못 살 게 분명했다.
연립 주택이 포화 상태여서, 피치 못하게 다른 손님과 방을 같이 써야 한다고 안내를 받았다. 나도 사마귀도 몇 년을 기숙사에서 살았으므로 공동생활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수긍한 다음 배정된 주택으로 이동했다.
이층 침대 두 개만이 덜렁 놓인 방에 선객이 있었다. 우리의 룸메이트였다. 색소가 들어간 꿀로 문짝에 ‘환영해’라고 쓰고 있다가 인기척에 놀라 나자빠지는 모습이 퍽 익숙했다.
“안녕, 꿀… 박벌!”
아까 봤던 꿀벌, 그러니까 전 꿀벌은 상대가 나와 사마귀라는 것을 깨닫자 숨어 있던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왔다. 그것이 발랄하게 떠들었다.
“안녕, 사마귀랑 독거미! 너희 이야기를 들었어! 나무 꼭대기로 올라갈 거라면 꿀벌들을 조심해! 무시무시하게 포악하니까!”
“꿀벌을 만난 적이 있어?”
“아니이, 나는 겁이 너무 많거든. 걔네랑 마주치는 상상만 해도 너무 무서워서 오줌 쌀 것 같아….”
여섯 개 다리 전부를 바들바들 떨어 대는 꿀박벌이 안쓰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