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그녀에 비해 내가 눈에 띄는 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지난 한 달간 <피츠시몬스 타임즈>를 한 번이라도 읽었다면 내 존재를 모르기 어려울 것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발끈하게 되었다.
“‘독거미 달튼’ 몰라? ‘피츠시몬스 타임즈’ 안 봤어? 거기 내 웃긴 초상화도 맨날 실리는데. 이거 말이야.”
하나로 묶은 머리채로 얼굴을 두드리며 흰 암말의 꼬리에 얻어맞는 나를 따라 해 보았다. 그랬더니 여자애는 박수를 치며 웃었는데, 딱히 뭐를 기억하는 반응은 아니었다. 완전 뻘쭘해져서 흉내 내기를 그만두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진짜 웃기다! 그래서 네가 ‘독거미 달튼’이야? 왜?”
“‘피츠시몬스 타임즈’를 읽었으면 알 텐데… 너 정말 피츠시몬스 다니는 거 맞아?”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애를 살펴봤다.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무엇보다 블로썸이랑 아나이스 외에도 이렇게 예쁜 애가 있었다면 진작에 ‘연회의 여왕’으로 거론되었을 게 분명했던 것이다. 월시 패거리를 필두로 한 어중이떠중이가 올 초에 작성한 미녀 순위표에서도 얘 같은 애의 초상화를 본 기억이 없었다.
재빨리 몇 가지 가능성을 꼽아 보았다. 하나, 환각 마법이다. 둘, 변신에 능한 장난꾸러기 요정이다. 셋, 시스템의 농간으로 인해 내 졸업 시험에 끌려 온 다른 세계의 피츠시몬스 재학생이다. 마지막이 가장 그럴 듯했다. 사실 어느 쪽이든 그것이 내 ‘시련’임은 믿어 의심치 않아도 되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애초에 ‘피츠시몬스 타임즈’가 뭔데? 잡지 같은 거야?”
웃다가 눈꼬리에 맺힌 물기를 닦아 낸 뒤에, 여자애가 입을 열었다. 그야말로 놀라 까무러칠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아래턱을 뚝 떨어뜨리자 그녀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세계의 피츠시몬스에 직접 다녀온 입장에서 판단하기로, ‘독거미 달튼’이라는 별명이나 내 얼굴은 충분히 모를 만했다.
거기서 나는 독거미도 뭣도 아니었고, 카일의 소꿉친구로나 화두에 오르는 희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당장 나와 몇 번이나 마주쳤던 플로렌스 벨도 계속해서 내 이름을 틀리지 않았던가(솔직히 걔는 나를 열받게 하고 싶었거나 자기애가 엄청 강해서 주변이 안 보이는 것 같았지만, 아무튼.).
<피츠시몬스 타임즈>는 달랐다.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도 신문부는 있었으며 거의 모든 재학생이 크리스타 에드워즈가 선사하는 자극에 중독되어 있었다. 근데 <피츠시몬스 타임즈>가 뭐냐고? 진짜 정체가 뭐야? 5년 내내 기숙사에 틀어박혀서 은둔이라도 한 거야?
잠시 자리에 쪼그려 앉아 상황을 정리했다. 내가 이름 없는 자의 무덤에서 다른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다고 하자 여자애는 자기도 마찬가지라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녀 역시 나처럼 졸업 시험 중에 이 이상한 숲으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너도 피츠시몬스 5학년, 나도 피츠시몬스 5학년, 우리 둘 다 졸업 시험을 위해 던전에 들어왔지. 그렇다는 건 너와 내가 사는 시간대가 비슷하다는 거야. 어쩌면 같은 피츠시몬스일 수도 있고.”
“각자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지.”
“근데도 나를 모른다고? ‘피츠시몬스 타임즈’를 읽어 본 적도 없고?”
“너 뭐 대단한 사람이야?”
“아니이… 그건 아닌데에.”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민망했다. 나는 흙바닥에 손가락으로 피츠시몬스 상징 문양을 그리다 말고 머리카락을 귀에 걸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애는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쫙 폈다.
“유감스럽지만 나는 대단한 사람이야. 네가 정말 피츠시몬스 재학 중이라면 나를 모를 리가 없어. 즉 수상한 건 나보다는 네 쪽이라는 거지. 네 그 찐덕찐덕한 머리카락을 전부 태워 버리기 전에 똑바로 불어.”
아무래도 그녀의 자기애는 플로렌스 벨을 훌쩍 상회하는 듯했다. 혀를 내두르며 손바닥을 탁탁 맞부딪쳐 흙먼지를 털어 냈다.
“어쨌든 이동하자. 여기서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눈다고 갑자기 던전의 출구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니까.”
“너랑? 어디로?”
“딱 보면 몰라?”
높다란 풀과 들꽃 너머로 보이는 나무를 고갯짓했다. 정확히는 나무 둥치 말이다. 그것이 지나치게 굵고 컸으므로 모가지를 아무리 꺾어도 꼭대기가 어디쯤 있는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잔가지에 빡빡하게 난 나뭇잎들이 머리 위를 온통 뒤덮은 터라 시야가 어두운 탓도 있었다. 다만 아주아주 잘게 조각 난 하늘만이 드문드문 보였다.
“정말이지 거대한 나무로군.”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나무가 거대한 게 아니라 우리가 조그마한 거야.”
빈정거리며 핀잔하자 여자애는 나를 곁눈질로 슬쩍 보고는 코웃음을 치면서 먼저 갔다. 가소롭다는 듯한 태도였다. 거대 개미 진액에 이어 약간의 패배감에 젖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우리의 키가 꽃가루보다 약간 컸으므로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정말 성실하게 나아가야 했다. 애당초 나무까지 이어진 길이 그다지 평탄해 보이지도 않았다. 실낱같은 햇볕 줄기가 만들어 내는 그림자 방향으로 가늠해 보건대 달이 뜨기 전에 반이나 가면 다행일 듯했다.
그러나 걷기 시작한 지 십 분가량이 지났을 때 나무는 거짓말처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나무 스스로가 그러기로 결정한 것처럼 말이다. 그건 꽤나 묘한 경험이었다. 물론 이름 없는 자의 무덤에 발을 들인 이래로 묘하지 않은 경험이 없기는 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경외심에 멈춰 선 나와 달리 여자애는 휘파람을 한 번 부는 것으로 반응을 마쳤다. 이윽고 그녀가 땅 위로 드러난 뿌리를 기어올랐다. 그러고 나서는 줄기를 빙 둘러 얕게 자라난 이끼의 일부를 단단히 붙잡은 채 발을 이리저리 옮기며 디딜 만한 곳을 찾았다. 암벽을 오르는 약초꾼 같은 행동이었다.
“어쩌려고?”
“올라가야지.”
대수롭지 않게 지껄인 뒤에, 여자애는 깍지를 낀 팔을 쭉 펴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유감스럽게도 나에게는 대수로웠다.
“이제 와서 밝혀서 미안한데, 나 고소 공포증 있어.”
내 고백에 여자애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보더니만 곧 얄궂게 미소 지었다.
“좋아. 내 시련이 뭔지 알겠네. 바로 널 꼭대기까지 끌고 가서 네 공포증을 없애는 거야. 참으로 군주답지.”
“인간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이유는 하늘을 날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야. 왜 순리를 거스르려고 해?”
“말 참 많네. 빨리 와, 독거미!”
그녀가 짧은 주문을 외우자 내가 있는 곳 주변에 열기가 솟구치는 불의 벽이 생겼다. 그것은 나를 중심으로 점차 좁아지며 내 진로를 제한했다.
목양견에게 쫓기는 양이 된 것만 같았다. 머리 꼭대기서부터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에 발을 동동 구르자 명랑한 웃음소리가 귀를 때렸다.
이를 득득 갈며 여자애의 옆에 섰다. 그러자 그녀는 어지간히 잘난 체하는 말투로, 원소 마법 전문가가 함께하니만큼 혹여 나무에서 떨어진대도 내 엉덩이뼈가 산산이 부서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러면 이제 장난 전문가로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등반 요령을 설명하는 여자애의 흐릿한 금발에 거대 개미 진액을 은근슬쩍 발라 소소하게 복수했다.
***
울컥울컥 치미는 공포심과 토기를 다스리며 꾸준히 나무를 올랐다. 속도가 느려진다 싶으면 여자애가 내 발등에 진짜로 불을 놓는 바람에 꾸준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군주라던 그녀는 정말로 국가나 국민을 다스리는 방법을 잘 아는 것 같았다. 케이틀린 대제를 보면, 확실히, 군주가 지녀 마땅한 소양은 윤리나 도덕이 아니라 몰인정함과 잔인성이었다.
명색이 시련이라지만 너무 하는 거 아닌가 싶어질 때쯤 쉬어 가기로 합의를 봤다. 여자애와 나는 어느 못된 인간들이 신의 권위에 도달하고자 쌓아 올린 탑처럼 영원히 뻗은 나무의 낮은 가지에 걸터앉았다.
고도가 높아진 탓인지 아까보다는 하늘이 많이 드러났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구름 끄트머리에 주홍색이 묻은 게 언뜻 보였다. 나무를 오르는 동안 시간이 제법 흘렀나 보다.
아무리 나무 위라고 해도 밤의 숲은 결코 마음을 놓을 만한 장소라고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나는 지금 개미보다도 작아진 상태였다. 슬슬 포식자의 이빨이나 부리가 닿지 않을 법한 잠자리를 찾아야 했다. 고개를 쭉 내밀고 이곳저곳을 살피던 내 눈에 별안간 기묘한 광경이 걸렸다.
“벌이다.”
기운이 빠져서 멍하니 내뱉었다. 말마따나 북슬북슬 털이 나고 뚱뚱한 벌들이 줄을 지어 분주히 비행하는 중이었다. 꿀을 옮기고 있는 모양인지 엉덩이가 온통 꽃가루 범벅이었다.
“호박벌이네. 저 크기가 아닐 때는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내 눈에는 저 크기여도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오히려 저 크기여서 귀여운 것 같기도 했다. 거인족 혼혈인 채프먼 교수가 커다랗기 때문에 깜찍한 것처럼 말이다. 개미와 달리 호박벌은 온몸이 검은색과 노란색 털로 뒤덮여 있어서 곤충스러운 부위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호박벌의 등짝에 앙증맞게 붙은 날개는 덩치에 비하면 말도 안 되는 크기였다. 그래서 호박벌은 푸둥푸둥한 엉덩이를 띄우기 위해 다른 곤충보다 훨씬 열성적으로 날갯짓을 해야 했다.
풀잎에 맺힌 이슬보다도 작은 내가 보기에도 하찮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으므로 웃음이 나왔다. 실실대며 구경하다가, 문득 드는 위화감에 고개를 기울였다.
“저것도 호박벌이야?”
내 검지가 향한 곳에, 과장해서 다른 벌들의 반만 한 벌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주위 벌들과 달리 통통하지도 않았고, 털투성이도 아니었다. 그것의 엉덩이에는 꽃가루 대신 뾰족한 가시가 돋아나 있었다. 의아하여 묻자 여자애도 나처럼 갸웃거렸다.
“아니, 저건… 꿀벌인데. 꿀벌이 왜 저기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