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41화 (141/178)

생각에 잠긴 내 어깨를 툭 치고, 켈리가 말했다. 그녀는 내 바로 전 시간대에 시험을 치른 케이시에게 시비를 털기 위해 나와 같이 ‘이름 없는 자의 무덤’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걔의 망토 안쪽에서 비죽 튀어나온 플래카드에는 ‘그리폰 크리켓 역사 상 최고의 뜬공 제조기’라고 쓰여 있었다. 켈리는 일전의 그리폰 크리켓 친선전에서 그녀가 케이시에게 채워 준 팔찌들이 지대한 공적을 세웠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충분히 고마워하지 않는 케이시의 태도를 괘씸하다고 느꼈다.

솔직히, 내 친구인 만큼 내가 켈리를 지지하지 않는 경우는 없을 테지만, 얘는 엄청 변덕스럽고 성가신 애가 맞았다. 가끔은 자기가 차 버린 케이시에게 미련이 남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사사건건 집요하게 굴 리가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훑어 내리는 켈리에게 어깨를 으쓱여 주었다. 짚이는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얘한테 밝히기는 애매했다.

“오, 가여운 레이디 라미레즈. 너도 독거미 달튼의 무시무시한 마법 거미줄에 걸려 버렸구나!”

짐짓 장난스럽게 속삭이자 켈리가 토하는 시늉을 했다. 나는 억지로 깔깔 웃으며 귀에 매달린 커다란 루비를 만지작댔다.

남들의 눈에도 매력 수치의 변화가 바로 보인다는 게, 신기한 동시에 소름 끼쳤다. 공략 대상의 증표 같은 아티팩트를 써서 이 정도인데, 그게 없이도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치트란 대체 얼마나 대단한 마법인 걸까? 치트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블로썸은?

잊을 때쯤 되면 고개를 드는 두려움을 도리질로 떨쳐 낸 뒤에 발을 재촉했다. 곧 졸업 시험장의 입구를 안내하는 커다란 입간판 곁에 선 커다란 제이든 스펜서가 보였다. 졸업 시험 안내 팸플릿을 잔뜩 쥐고 있는 볼턴도 말이다. 나는 반갑게 손을 흔드는 볼턴을 무시하고 빨리 걸었다.

졸업 시험 도우미는 학생회가 도맡은 지독하게 많은 업무 중 하나였다. 아마 다른 애들도 이름 없는 자의 무덤 여기저기에 흩어져 수험자들을 인솔하고 있을 것이었다. 켈리는 나를 계속 흘끔거리는 볼턴과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던전의 출구를 지키고 있다는 로즈마리 블로썸을 찾아 사라졌다.

“좋은 아침, 아리엘.”

망연자실 늘어진 볼턴을 지나쳐 나와 눈이 마주친 제이든이 덤덤하게 인사했다.

“귀걸이 잘 어울린다. 에드가가 준 거지?”

이어지는 말투가 꽤나 묘했다.

제이든이랑 나랑 에드가 사이에 최근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면, 오늘 내 치장은 어떠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듯했다. 하지만 내가 에드가의 선물을 착용한 까닭은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던전을 무사히 공략하기 위해서였다.

고심하다가 가방을 뒤져 제이든에게서 받은 펜던트를 꺼냈다. 망토를 여민 끈에 꿰고 단단히 묶었더니 눈앞이 번쩍이며 몇몇 능력치가 변했다. 체력과 매력, 항마력이었다.

원래 이그나스의 펜던트가 가진 부가 효과는 체력에만 적용되었다. 미미한 위화감이 사고를 침범하려는 찰나, 제이든이 미약한 힘으로 소매를 잡는 통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북동쪽 입구는 이 방향이야.”

그가 수줍게 웃으며 나를 이끌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만족스러운 모양이니 다행이었다.

제이든의 도움을 받아 던전의 북동쪽 입구에 다다랐다. 내 키보다 세 뼘 정도 큰 석관이 반쯤 무너진 돌벽에 파묻혀 있었다. 낑낑거리며 뚜껑을 열었더니 고대인의 유해 대신 웬 복도가 나타났다. 대륙 최고의 마법 학교에서 장장 5년 동안 수학한 마법사의 역량을 판가름하기에는 언제 봐도 조촐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 소박한 복도 끄트머리에 정말로 물리적으로 가당치 않은 규모의 무언가가 있는 것을 알았다. 브리아나의 경우에는 잊혀진 고대 도시였고, 엘리자베스에게는 광산이었다. 나의 경우에는 넓디 너른 바다였다.

정말로 신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조차 이름 없는 자의 무덤이 실제로 얼마나 거대한지 밝히지 못했다. 입구에서 좀 헤매다가 환각 마법에 시달리고 나면 출구로 떨어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혀를 내두르며 석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다소 안온하게까지 느껴지는 습기가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

그 좁디좁은 석관과 이어진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걸었다. 문득 얼굴에 강한 바람이 느껴져 눈을 감았다 뜬 순간 눈앞의 풍경이 일변했다. 나는 갑자기 숲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전처럼 배 위가 아니었다.

의아하여 두리번거리자 묘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이를테면 신발코에 걸리는 흙 알갱이가 매우 굵었고, 풀이나 꽃의 키가 지나치게 컸다. 잎도 무지 넓었다. 거기 맺힌 이슬방울마저 큼지막해서 몸을 던지면 헤엄이라도 칠 수 있을 듯했다. 마치 픽시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어쩌면 픽시보다도 작아졌을는지 몰랐다.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멍하니 있다가 엉덩이가 붕 뜨는 감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발밑으로 검붉은색에 약간 반질반질한 것이 보였다. 잠시 기다리자 가느다란 나뭇가지 같은 게 흙을 헤치고 올라왔는데, 다름 아닌 개미의 더듬이였다. 그것도 엄청나게 큰!

“으아아아악!”

“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거대 개미의 등에서 굴러 내려갔다. 그러자 개미 역시도 발작을 일으키며 더듬이를 떨어 댔다. 수없이 많은 낱눈이 나를 향하고, 세로 방향으로 맞물린 주둥이가 바짝 벌어진 다음에는 사뭇 애처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 사, 살아 있잖아! 오, 안 돼! 나는 사냥에는 소, 소질이 없는데!”

“맙소사, 지금 말한 거야? 개미가? 개미 주제에?”

뒤로 넘어진 채 경기하자 개미는 불쾌하다는 듯이 입을 오므렸다. 그러더니 여섯 개 다리 중 몸통의 비교적 앞에 달린 두 개로 나를 조심조심 만지기 시작했다.

위협적인 톱니 모양의 가시와 듬성듬성 박힌 털이 배에 닿은 순간,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검을 빼 들고 크게 소리쳤다.

“징그러워!”

“아야!”

냅다 자르는 건 너무한 것 같아서 검집으로 쳐 냈다. 개미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몸을 웅크렸으나 기세를 꺾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한 말 때문에 더욱 화가 난 듯했다. 그것이 연약하게 외쳤다.

“네가 더 징그러워! 다리도 네 개밖에 없으면서!”

“두 개야!”

“헉, 완전 이상해!”

한참 씩씩거리고 나서도 대치가 이어졌다. 내가 검 끝으로 개미의 가슴과 배를 나누는 마디쯤을 겨누며 무수한 낱눈 중 정확히 어느 것을 노려봐야 하는지 헷갈려 하는 동안, 개미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고민에 빠졌다. 그것이 연신 중얼거렸다.

“아아, 어떡하지… 사냥이 너무 무서워… 하지만 너무 간만에 발견한 먹이고… 벼, 별로 안 세 보이는데….”

“오지 마! 나 겁나 세거든! 마법도 쓰거든!”

내가 마법진을 그리는 시늉을 하자 개미는 여섯 개의 발 중 네 개를 물렸다. 하지만 마법진에서 주먹보다 살짝 큰 불씨가 튀어나오니 도로 세 개를 들이밀었다. 그것이 단어 하나를 내뱉을 때마다 턱에 달린 돌기가 점점 가까워졌다. 진짜 너무 끔찍했다.

“오늘도 허탕을 치면 다들 나를 무시할 거야… 제발 어떻게 안 될까? 다리 한 짝이라도?”

“싫어!”

공황에 빠진 상태에서 막무가내로 휘둘러 봐야 개미의 딱딱한 껍질에는 어떠한 타격도 주지 못했다. 짧게 숨을 들이쉰 후에 양손으로 검을 고쳐 잡았다. 거대 개미와의 싸움에서 졌다는 하잘것없는 이유로 유급을 하고 싶진 않았다. 이를 꽉 물고 그것의 배 아래쪽 연한 살과 마디가 이어진 부분을 단번에 베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게 갈라진 틈바귀에서 찐득한 진액이 쏟아졌다. 나름대로 잽싸게 피한다고 했는데도 발끝에 약간 묻었다. ‘으.’ 손바닥만 한 잔디를 조금 떼어서 신발을 닦았다. ‘드러워.’

“아파! 아파 죽겠어!”

문지를수록 번져만 가는 진액 얼룩을 수습하기 위해 여념이 없던 찰나였다. 산 채로 배가 갈라지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날뛰던 개미가 전에 없이 빠른 동작으로 내 등을 덮쳤다.

“으악!”

고통은 안 클지언정 충격은 컸다. 거대 곤충의 배 아래 깔려, 숫제 짝짓기 상대라도 된 듯한 엿같은 기분은 별것도 아니었다. 허리와 옆구리에 문질러지는 더듬이의 감촉과 얼굴을 타고 흐르는 개미 진액의 톡 쏘는 냄새에 그만 머리가 어질어질해져 왔다.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았다. 그리고 반격을 위해 몸을 돌렸는데, 쩍 벌어진 주둥이랑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은 낱눈, 바르작거리는 여섯 개의 다리가 바로 목전이었다. 인간의 상상력이 짜낼 만한 어떤 것보다 토 나오는 광경이었다. 나는 거의 무아지경으로 허둥거렸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불덩이가 개미의 머리통을 강타했다. 곧 밀밭에 기름을 부은 듯이 불이 번졌다.

썩은 고기를 굽는 듯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 때쯤 거대 개미의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타다가 떨어진 살점 조금과 진액으로 범벅된 머리카락을 짜내며 구역질하는 내 앞에 손 하나가 나타났다.

“괜찮아?”

낯선 여자애였다. 큰 키에 탄탄한 몸, 건강하게 그을은 피부, 무엇보다 어깨가 떡 벌어져 있어서 꽤나 당당한 인상을 주었다. 굵게 말린 연한 금발은 말끔하게 귀 뒤로 넘긴 채였으며, 몸에 딱 달라붙는 가죽 갑옷 위로 걸친 망토는 내 어깨에 걸린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의 상징 문양이 수 놓여 있었다는 뜻이다.

“피츠시몬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더니 그녀가 놀란 듯이 눈을 부릅떴다. 이윽고 날카로운 시선이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괜히 민망해져서 주춤주춤 발을 물렸다.

“본 적 없는 얼굴인데.”

금방 판단을 마쳤는지, 여자애가 턱을 치켜들고 거만하게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