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일은 나와 달리 단 음식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가 슬라임 푸딩에 환장하는 건 오로지 그걸 뺏겼을 때 내가 엄청 원통해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두 사람의 테이블엔 마카롱이나 컵케이크 대신 햄과 치즈가 들어간 크루아상 샌드위치가 놓였다.
점원이 칼질에 서툴렀는지, 반으로 나뉜 샌드위치의 한쪽에는 햄이 안 들어 있었다. 처음에 카일은 자연스럽게 햄이 빠진 쪽을 그의 앞으로 끌고 왔다. 그러자 에드워즈는 얼굴을 붉히고 뭐라 화를 내더니 그녀와 카일의 접시를 바꾸려고 했다.
귀여운 실랑이 끝에 햄을 차지한 것은 크리스타 에드워즈였다. 내 손바닥 아래 차베즈로부터 끙끙대는 소리가 났다. 아픈 것 같기도 했고 심통 난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도 눈꼴이 시어서 이해를 했다.
샐러맨더의 무지개 비늘에 맹세코, ‘이타적인’은 ‘에드워즈’에게 붙을 수 없는 수식어였다. 기분이 완전 묘했다. 커크패트릭도 그렇고, 차베즈도 그렇고, 졸업할 때가 되니 다들 난리구나. 요사이 내가 제일 즐겨 하는 머리 장식인 겨우살이 가지를 더듬다 보니 간사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카일 빌라드, 제이든 스펜서, 에드가 라모스. 켈란에게 눈이 멀어 모두 밀어냈다지만 단언컨대 앞으로 그만큼 괜찮은 애들을 만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되었다. 인생사 새옹지마인데 괜히 단칼에 거절했나 싶었다. 여지라도 남길 것을. 에드워즈의 새침 떠는 표정과 차베즈의 처참한 표정을 번갈아 살피는 동안 계속해서 입술을 비죽였다.
곧 쿡쿡 쑤시는 느낌이 좀스러운 회한을 밀어냈다. 가슴 어디쯤을 마구잡이로 쥐어짜는 감각은 애틋하게 여기는 여자애가 다른 남자애 앞에서 숙맥처럼 구는 걸 보다 못한 차베즈가 가게에서 뛰쳐나가고 나니 더욱 강해졌다. 내 생각에 그게 쥐어짜는 건 양심이었다.
차베즈의 우울한 뒷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지자 나도 도망치고 싶어졌다. 엉덩이를 자리에서 세 번쯤 떼었다가 그만두었다. 일종의 책임감이었다. 모든 사달을 누가 냈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오른손으로 왼 가슴을 두드리며 카일과 에드워즈가 떠들다가, 웃다가, 장난치는 모습을 지켜봤다. 거리가 애매하게 먼 탓에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했다.
정말이지 평생 같던 삼십여 분이 흐르고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나는 의자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걸친 채였다. 퍼뜩 놀라 잽싸게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에드워즈는 메뉴판을 거꾸로 보는 정체불명의 손님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세심하게 말아 내린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잠시 기다리자 맞은편에서 인기척이 났다. 곧 다소의 공방을 거쳐 얼굴을 가린 메뉴판이 넘어갔다.
“안녕, 친구. 이제 우리끼리 대화할 차례야.”
“언… 제부터, 알았어?”
“네가 웃긴 꼴로 저 문을 열었을 때부터. 아침 안 먹었지? 뭐 먹을래?”
혼이 쏙 빠져 멍하니 있는 동안 청포도 알이 통째로 박힌 마카롱 두 개와 무화과잼이 들어간 다쿠아즈 두 개가 테이블에 올라왔다. 이윽고 가련히 튀어나온 눈두덩이를 보호하던 안경이 눈 깜짝할 새 자취를 감추었다.
“너 울었어?”
“아이 씨, 내놔.”
“싫어. 왜 울었어?”
카일 빌라드는 피츠시몬스와 칵스위턴을 통틀어 민첩하기로는 따를 자가 없는 자식이었다. 작정하고 빼앗으려고 드니, 기사들의 풋워크를 일부 배운 것이 전부인 나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한참 허우적거리다가 포기하고 다시 메뉴판을 집었다.
“말 안 해.”
“어차피 켈란 때문이겠지. 그러게 왜 쉬운 길 놔두고 어려운 길로 가?”
엄지로 스스로를 가리키면서, 카일이 혀를 되게 찼다. 나는 민망한 마음에 괜히 더욱 꿍얼거렸다.
“시끄러워. 이제 안 울 거야.”
가까스로 낚아챈 안경을 대충 펼쳐 콧잔등에 얹었다. 그러자 네모진 안경테가 액자처럼 시야의 일부를 가렸는데, 가운데로 슬쩍 미소 짓는 카일이 보였다. 각진 턱과 시원한 입매, 깊게 팬 볼우물이 이루는 선이 그림 같았다.
만일 얘의 말마따나 쉬운 길을 갔다면 내 눈두덩이는 멀쩡했겠지. 숨어서 흘끔거리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함께 앉아서 크루아상 샌드위치를 나누어 먹는 상상을 해 봤다. 악우로 지낸 세월이 워낙 길어서, 만일 그가 내 의자를 빼 주고 나에게 햄을 양보한다면 무지 어색할 듯했다.
하지만 사랑의 생김새는 각자 달랐으며 고작 햄 쪼가리로 그의 마음을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카일이 나에게 애정을 쏟는 방식은 불편한 신발을 바꿔 신어 주는 거였으니까.
가방을 무겁게 만드는 회중시계의 존재감을 곱씹으며 카일을 빤히 봤다. 그러자 그는 뚱뚱한 마카롱을 눈에다 대고 내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즉시 웃음이 터졌다.
“그나저나, 에드워즈랑 무슨 얘기 한 거야? 재밌어 보이던데.”
“내가 아무리 달변가라지만 단번에 원하는 바를 얻어낼 수는 없어. 전지전능한 블로썸도 그 고생을 하는데.”
“그래서? 다음에 또 만나기로 했어?”
“적어도 세 번은 더 봐야 할 것 같은데… 시간이 없으니까, 노력해야지.”
카일이 가늠하듯 손을 꼽는 동안 다쿠아즈 하나를 입 안에 던져 넣었다. 초콜릿이 뿌려진 시트, 무화과잼, 우유 향이 풍부하게 나는 버터크림이 잇새에서 마구 부서졌다. 어쩐지 별로 달게 느껴지지 않아서 희한했다.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뭘?”
진짜로 궁금해서 되묻자 카일은 미간을 좁히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곧 테이블에 엎드리듯 기댄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말썽 피우는 꼬마 같은 표정에 안색은 유달리 환했다. 목소리엔 짓궂은 감이 있었다. 귀를 기울이면 긴장한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아리, 나 어떻게 할까?”
“그걸 왜 나한테…”
“계속 만나?”
다음 순간 목덜미에 뭐가 스쳤다. 간지러워서 어깨를 움츠리는 찰나 머리를 약하게 당기는 느낌이 났다.
이윽고 빨간 열매가 다섯 개나 달린 겨우살이 가지가 햇살이 입 맞춘 듯 살짝 그을린 손가락에 걸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동그랗고 단단한 열매, 잘 다듬어진 손끝이 차례대로 내 볼을 쓰다듬었다.
“만나지 마?”
이상하게 말이 안 나왔다. 뭐라고 대답해야 맞는 건지 확신이 안 섰다. 혹은 뭐라고 대답하고 싶은 건지. 뭐가 어찌 되었든 내 짝사랑 상대는 켈란 일레스티아였고 카일 빌라드는 내가 오래전에 딱 잘라 거절한 소꿉친구에 지나지 않았다.
켈란에게 세 번째로 차인 지 하루가 겨우 지났을 뿐인데 벌써 다른 남자애한테 흔들리는 스스로가 비열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뭐가 어떠냐는 생각도 들었다. 한참 약해진 마음에 훅 들어오는 카일이 잘못한 거였다. 또 온 피츠시몬스가 내 뒤통수에 탕녀 소리를 갈기는 와중인데 갑자기 절개를 지키는 것도 웃겼다.
“이거로 봐줄게. 다음부턴 제대로 말해 줘야 돼.”
한 손으로 겨우살이 가지를 윗옷 주머니에 갈무리한 카일이 다른 손으로 마카롱을 집어 들었다. 곧 입술에 부드러운 게 꾹 눌렸다.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려 그가 들이미는 마카롱을 받아먹었다. 알맞게 구워진 꼬끄가 혀에 달라붙는 느낌이 좋았다.
필링으로는 다쿠아즈랑 똑같은 버터크림에 청포도만 들었는데 맛이 완전히 달랐다. 포도알을 굴려 송곳니 아래에 두고 약간 누르자 감탄이 나올 정도로 다디단 과즙이 입천장에 마구 퍼졌다. 진짜로 살면서 그만큼 단 음식은 처음이었다.
***
일요일엔 되게 바빴다. 토요일도 바빴지만 더 바빴다. 우선 커크패트릭 자작 부인과의 약속이 오전 중에 있었다. 그녀가 정말로 로날드 왕자의 마나 서명을 보고 나를 부른 것이었다.
커크패트릭 자작령은 오스먼드 자유시를 끼고 피츠시몬스와 거의 맞닿아 있었으므로 거추장스러운 입출국 절차가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신분증명서와 일레스티아 입국 허가서 대신 그녀에게 물어볼 것들을 수첩에 잔뜩 적어서 겉옷 안주머니에 넣었다.
유감스럽게도, 나에게 수첩을 펼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대륙 어디에서도 유행한 적이 없을 법한 드레스를 걸친 커크패트릭 자작 부인은 저택의 입구까지 나를 맞으러 와서는 ‘어쩜, 미스 달튼!’이라고 외쳤다. 그런 다음에는 차기 상단주라더니 감각이 뛰어나네 어쩌네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어안이 벙벙해서 가만히 있었더니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스테판 커크패트릭에게 들려 보냈던 쪽지를 들이밀며 하는 말이, 달튼 상단에서 납품할 원단에 수놓을 문양 견본이 아니냐는 것이 아닌가!
고심 끝에 무릎을 쳤다. 새로운 투명 옷감과 함께 도착한 편지를 통해 엘프제 나염 원단의 납품처를 찾았다고 뻐기던 아빠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커크패트릭 자작 부인의 미감은 나보다도 처참한 모양이었다.
혹시나 해서 몇 번 떠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나돈의 첩자로서 살아온 그녀의 삶은 스스로조차 알지 못하는 어둠 속에 묻힌 것이 분명했다. 적당히 수습하고 도망쳤다. 아무리 악성 재고 처리가 시급해도 도날드 왕자의 마나 서명을 팔아먹기란 언감생심이었다.
커크패트릭 자작가의 응접실을 빠져나간 직후에 눈을 어마어마하게 빛내는 스테판 커크패트릭과 마주쳤다. 룸메이트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전에 선수를 쳤다.
조만간 달콤한 만남이 성사될 예정이라고 말하니까 커크패트릭은 매우 즐거워했다. 꿀에 절인 배와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을 얹은 커스터드 크림 파이를 먹으러 가야 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약속 시간보다 십오 분은 이른 시각이었다. 나의 성실성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밀루아의 영웅을 상상하며 과자점에 들어섰는데, 볕이 잘 드는 창가에서 손바닥보다도 작은 파이를 깨작이고 있는 제이든 때문에 김이 팍 샜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털레털레 걸어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파이 접시 옆에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데운 우유가 있었다. 반쯤 녹은 채 둥둥 떠 있는 마시멜로가 퍽 절박해 보여서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계속 키득거리니까 제이든도 따라서 목을 울렸다. 눈꼬리가 살풋 접히자 애굣살이 앙증맞게 잡혔다.
“기대돼서.”
“커스터드 크림 파이가?”
“아니, 네가.”
장난스러운 물음에 너무 순순히 대답하기에 좀 낯부끄러워졌다. 나는 일부러 내 몫의 커스터드 크림 파이를 나르는 점원에게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