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36화 (136/178)

“순진하구나. 긍정적이고. 네 그런 점을 좋아해. 하지만 내가 너를 속인 건 오로지 너를 믿을 수 없어서야.”

“켈란….”

“찰나의 충동에 사로잡혔지. 검증되지 않은 가능성에 흔들린 거야. 오래도록 고민했어. 그런데 안 되겠더라.”

켈란은 나를 정말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거듭해서 거절했지만 ‘안 되겠다’고 단언한 적은 없었다.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나더러는 포기하지 말라고 해 놓고, 스스로는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었나 보다. 억울해서 목이 멨다.

“확실히, 피츠시몬스에서 믿을 만한 사람의 이름으로 목록을 만든다면 아리엘 달튼은 뒤에서 찾는 게 빠를 거야. 신뢰를 담보로 걸 만한 것도 내 목숨뿐이고. 그렇지만 노력할게.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그러니까, 나를….”

전에 없이 비굴하게 매달리는 내 볼을 켈란이 가볍게 받쳐 쥔 다음 살살 문질렀다. 지나치게 살가운 행동이었다.

“나는 네 살에 유모가 건네준 독을 마셨어. 여섯 살에는 숙부가 선물한 말을 탔다가 목이 부러질 뻔했고. 열두 살에 참여한 사냥 대회에서는 사촌 형제가 내 허벅지에 대고 활시위를 당겼지.”

“…….”

“피츠시몬스에 입학한 이래로는 줄곧 어머니가 보낸 암살자에게 시달렸어. 미래가 필요하지 않으니만큼 후계자를 둘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지. 얼마 전에는 죽이는 것보다 나은 쓸모를 발견했는지 이상한 약을 먹이더군. 내 부관을 써서 말이야.”

내가 흘리는 슬픔의 양은 너무 많아서 손바닥 두 개로는 받아 내기가 어려웠다. 켈란의 망토와, 소매와, 마침내는 옷깃에 짙은 자국이 생겼다.

“대답해 봐, 아리엘 달튼. 이런 상황에서도 내가 너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이 미약하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감정에 기대어?”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로 켈란의 가슴팍을 적시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우리의 입장이 반대였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그렇게 했을 거다. 왜냐면 내가 그에게 가지는 감정을 결코 미약하거나 나약한 무언가로 치부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건 내가 여태껏 느껴 온 감정 중 가장 강한 것이었다. 외뿔소 기름으로 담금질한 아다만티움같이 단단하고, 뉴필만 연안에 이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것이었다. 브레넌을 겸손하게 만들고, 엘리자베스를 무모하게 만들고, 제이든을 울리고, 에드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만한. 그러나 켈란의 감정은 나와 영 다른 모양이었다.

“네 추측은 일부 맞아. 너를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분명히 있었지. 로즈는 로슨 교수의 발가락 열 개 중 여덟 개를 문드러지게 할 정도로 강한 데다가 불안정하니까. 하지만 그 마음의 근간도 결국은 같아. 네 가능성을 믿지 않아.”

“…….”

“나는 아무도 안 믿어, 아리. 로즈도, 너도, 마르퀴즈도, 어머니도, 심지어는 나 자신마저.”

머리 위로 퍼부어지는 말들은 단호한 만큼 잔인했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불현듯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팔에 힘을 주어 켈란을 밀쳐 내었다.

할 만큼 했어. 아리엘 달튼의 오십 가지 그림자 중 가장 끈기 있는 그림자가 뇌까렸다. 할 만큼 했어, 아리엘. 부딪치고, 따지고, 매달려 봤어. 충분히 용기를 냈지.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는 거야.

“있잖아, 켈란… 네가 질색할 말 하나만 할게.”

눈물이 너무 많이 났다. 당장 그치지 않으면 내일쯤엔 눈두덩이가 이따만해질 지도 몰랐다. 근데 너무 화가 나고 속이 상해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손바닥 아랫부분으로 눈을 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한심스러울 만큼 떨렸다.

“정말 불쌍하다, 너….”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서, 켈란은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가짜이고 오로지 나만이 진짜이기 때문에 나를 기다린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의 켈란에게 나는 진짜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그 자신마저도.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무엇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

처참하게 망해 버린 연애 사업과 뾰족가시 달팽이 점액 때문에 도서관을 찾은 목적에 도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또 계속 눈물이 났다. 내가 훌쩍거리며 <말싸움 무패 신화>를 비롯한 열두 권의 책을 빌리는 동안 미스터 브래드쇼가 저주 같은 걸 중얼거려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하는 수 없이 책들을 끌어안고 기숙사 방문을 열었을 때 서글프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브리아나 모슬리는 나에 대한 미안함으로 나흘째 하루에 한 끼만 먹었다. 만일 퇴학을 당하게 되면 돌아갈 곳이 없는 브리아나로서는, 책임을 지겠다는 소리는 도무지 안 나오나 보았다.

조금 괘씸한 것과 별개로 이해는 되었다. 바보 같은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감당하기엔 일이 너무 커졌던 것이다.

웬만하면 위로해 주었겠으나 기분이 너무 엉망이어서 그러지 못했다. 나는 브리아나에게 뭔가 우스꽝스러운 말을 건네는 대신 침대에 뛰어들어 경쟁하듯 울었다.

당연하겠지만 책에는 손도 못 댔다. 달이 지고 해가 뜰 때쯤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고 나서는 오전 내내 옷장을 뒤져 정신 산만한 무늬가 새겨진 숄하고 테가 굵은 안경을 찾았다. 얼굴을 감싸는 형태로 숄을 두른 뒤 안경을 쓰니, 심각하게 부어오른 눈두덩이를 가리는 동시에 누군가를 미행하기에 제법 걸맞아졌다.

거짓말은 거짓말로 상대해야 옳았다. 나는 꽤 나쁘지 않은 거짓말쟁이였으나, 그보다 훨씬 뛰어난 거짓말쟁이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내 편을 들어 나를 위한 거짓말을 해 주기만 한다면 블로썸과의 여론전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불행하게도, 피츠시몬스에서 가장 훌륭한 거짓말쟁이, 크리스타 에드워즈는 블로썸만큼 나를 싫어했다. 원래 싫어했지만, 내 실수로 카일에게 빠져 버린 뒤로는 더 싫어했다. 나의 존재가 그녀의 사랑을 방해한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실은 너무도 적절한 판단이어서 억울하지도 않았다. 카일은 나를 엄청 사랑했으니까. 매정하기 그지없는 아리엘 달튼을 수렁에서 건져 내기 위해 마음에 없는 여자애랑 데이트할 정도로 말이다.

내가 하도 징징거리는 바람에, 카일은 서브 캐릭터로서 블로썸의 호출에 응하거나 마녀의 길을 들쑤시며 시스템의 약점을 찾기도 바쁜 토요일에 에드워즈를 만나기로 했다. 분위기를 한껏 띄운 다음 걔가 가장 즐거울 때 나를 들먹여 보기로 한 것이다.

적어도 에드워즈가 얽힌 사건에 있어서는 내 잘못이 명백했으므로, 원래는 나서지 않고 행운이나 빌어 줄 심산이었다. 흑마법 제단에 일곱 마리의 무당벌레와 새끼 솔부엉이의 솜털을 말발굽 편자 모양대로 올리고 네잎클로버를 삼킬 준비를 했다. 하지만 좀이 쑤셔서 도무지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카일 빌라드의 주둥이가 기름칠한 뱀 꼬리보다 매끄러운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나의 계획에 있어 카일이 맡은 역할이 여간 막중한 게 아니었다. 그가 에드워즈를 회유하기는커녕 갖은 헛소리로 걔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까봐 걱정이 되었다. 숄과 안경과 자기 합리화로 무장한 채 기숙사를 나섰다.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커피 하우스는 빵집을 겸하는 곳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갓 구워진 빵 냄새가 나를 습격했다.

변장을 하느라고 아침 식사를 걸렀더니 자극이 장난이 아니었다. 벽에 딱 붙어 은밀하게 이동하는 동안 침을 몇 번이나 삼켰다.

카일은 어디서나 눈에 띄는 편이었다. 나는 그와 에드워즈가 앉은 테이블을 금방 찾았다. 거기서부터 기둥 두 개를 끼고 대각선 방향에 놓인 테이블이 지켜보기에 딱 좋아 보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이미 선객이 있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맞은편에 앉았다.

“실례합니다. 합석 좀 할게요… 차베즈?”

곱슬곱슬한 앞머리를 이마에 딱 붙인 남자는 퍽 익숙한 생김새였다. 에드워즈의 오른팔로 통하는 신문부의 글렌 차베즈였다.

“달튼?”

상대 쪽에서도 나를 알아본 모양인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인상을 구기자 코허리에 박힌 주근깨들이 얼굴 가운데로 모였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너?”

짜증스레 묻는 차베즈의 목소리가 매우 작았다. 시선은 자꾸만 기둥 두 개를 끼고 대각선 방향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모가지는 쭉 뺀 채였다. 참으로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결정적으로, 다리를 계속 떨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것 같았다. 안 들키게 히죽거리며 놀라는 시늉을 했다.

“맙소사, 글렌 차베즈! 에드워즈 뒤를 밟은 거야? 너 그거 범죄다?”

따지자면 나도 카일의 뒤를 밟은 셈이었지만 어차피 말싸움도 몸싸움과 비슷해서 목소리 크고 선빵 잘 치는 애가 유리했다(<말싸움 무패 신화>의 저자 휘태커 판사가 그랬다.). 내 말에 차베즈의 귓불이 검붉어졌다. 그가 빠르게 속삭였다.

“크리스타는 그렇게 보여도 엄청 순진한 애라고. 어쩌다 이상한 자식한테 걸려 버리면 어떡해?”

“아빠야, 뭐야. 그리고 카일은 이상한 자식 아니거든. 완전 좋은 자식이거든.”

“닥쳐. 그러는 너야말로 빌라드를 감시하러 온 거잖아. 제발 부탁인데 걔 좀 놔줘라.”

“아-니-라-고. 나한테는 이 데이트의 진행 상황을 확인할 의무가 있어. 내 삶에 있어 무지하게 중요한 사건이란 말이야.”

테이블 위에서 입으로 공방을 벌이는 동안에 테이블 아래에서는 서로의 발등을 짓이기기 위한 전투가 치열했다. 거의 모든 연회에서 파트너의 발을 못 쓰게 만든 경험이 다수 있는 미스 달튼에게는 그야말로 전문 분야였다. 춤을 출 때 내가 어떻게 했던가를 돌이키며 움직이니 차베즈의 나약한 발등은 금세 아작이 났다.

“너 빌라드 좋아하냐?”

발을 부여잡고 고통을 참던 차베즈가 씩씩대며 내뱉었다. 나는 잠시 합죽이가 되었다가, 이내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굴었다. 그가 유치하게 나온다면 나로서도 받아 칠 수밖에 없었다.

“너 에드워즈 좋아해?”

그러자 차베즈는 눈에 띄게 허둥거렸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던 그가 천정에서 늘어뜨린 조명 기구에 이마를 세게 박았다.

사람들의 주목을 끌 만큼 큰 소리가 나서, 차베즈를 붙잡고 재빨리 몸을 숙였다. 그를 놀리는 것보다 은밀하게 있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우리 사이에는 희미한 평화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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