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개월들을 반추해 보았을 때, 내 시련이라는 것은 항상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에서 내가 가지는 입지처럼 하잘 것이 없었다.
아마 올해도 나는 작은 선원 요정 클라바우터만이 되어 유령선의 항해를 도울 것이었다. 대충 나가 두엇을 해치우고 솜을 적셔 귀에 꽂은 다음에 세이렌의 주둥이를 두들겨 주면 되었다.
어쨌든 그랬다. 지금 내게 있어 중요한 건 졸업 시험보다 학생 자치 법정이었다. 더구나 나는 상법이 아닌 법에 대해서는 거의 까막눈이었다. 여태껏 꿀 수업이라 소문이 자자한 수업들만 들어 온 탓에 법학을 담당하는 가르시아 교수와는 5년 동안 안면을 겨우 텄다.
무슨 책을 얼마나 뒤져야 하는지 몰랐다. 나는 ‘교재·참고서’ 코너에서 왼쪽으로 돌아 ‘법학’ 코너로 갔다. 그리고 손에 닿는 책들을 거의 다 꺼내었다.
<스티븐스 행정법>, <법은 주먹보다 가깝다>, <말싸움 무패 신화 : 동네 주점의 허풍선이가 밀루아 왕실 법정에 서기까지>, 어떤 것은 제목만 읽어도 하품이 나왔고 다른 것은 꽤나 흥미로워 보였다.
책장에 등을 기댄 채 <말싸움 무패 신화>의 표지를 넘긴 찰나였다. 가까운 곳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만 정수리에 미지근한 게 닿았다.
이윽고 이마를 타고 걸쭉한 액체가 흐르기 시작했다. 코를 찌르는 군내와 따끔거리는 감각으로 미루어보아 뾰족가시 달팽이의 점액 같았다.
인기인의 숙명은 가혹한 법이었으므로 얌전하게 살기가 어려웠다. 요새는 비슷한 일이 진짜 숨 쉬듯이 있어서, 어디서 아리엘 달튼의 장난 마법 숙련도 향상을 위한 지령이라도 받았나 싶을 정도였다.
“뾰족가시 달팽이 점액을 마법 약 교실 바깥으로 반출하는 건 교칙 위반이야.”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는데, 불현듯 따스한 손이 마법진을 그리던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전하!”
“그걸 다른 학생에게 뿌리는 건 심각한 교칙 위반이고.”
“그, 저희는…!”
“도서관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도 교칙 위반이야. 변명은 방과 후에 학생회실에서 들을게.”
켈란이 나를 보호하듯 앞서 있었으므로, 나는 그의 얼굴을 조금 뒤에서 쳐다봤다. 바로 옆에서 볼 때보다 곡선이 많아져서인지 더욱 미끈한 느낌이었다.
광대뼈에서 입꼬리까지 흐르는 실루엣과, 귓바퀴의 둥근 부분, 이마 가장자리를 덮은 머리카락의 작은 움직임마저 고상했다. 또 입매에 걸린 미소는 가벼웠으나 내 손에 실리는 무게감은 약하지 않았다.
진짜로 활자를 비집고 빠져나와도 이러지 않을 듯했다. 나는 로맨스 소설을 정말 많이 읽었지만 그 어느 책에도 얘처럼 완벽한 남자 주인공은 없었다.
“일부러 매번 극적으로 등장하는 거야?”
‘독거미 달튼’의 악성 팬들이 꼴사나운 비명과 함께 사라진 직후, 나도 모르게 입이 떨어졌다.
“뭐가?”
“됐어. 그보다 저런 자식들쯤은 내가 처리할 수 있는데.”
“임기도 얼마 안 남았는데 너를 위해 이 정도 권력은 남용할 수 있게 해 줘.”
2학기 들어서 다정한 켈란을 접할 일이 드물었으므로 그에 대한 면역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 나는 소금을 맞은 뾰족가시 달팽이처럼 쪼그라들었다. 그러자 켈란은 엄청 부드러운 손수건으로 내 이마와 뺨을 닦아 내었다. 그가 말했다.
“학생 자치 법정 소식 들었어.”
“말이 나와서 말인데, 퍼셀 좀 어떻게 해 주라.”
제럴드 퍼셀은 학생 자치 법정에 나를 고발하며 검사 역할을 자처했다. 법학에 일가견이 있는 그로서는 나름대로 활약할 기회라 여긴 듯했다.
하기는 그리폰 크리켓 경기 이후 우드의 지지율이 폭등했을 때 무지하게 배 아파 했다고 들었다. 그럴 만도 한 게, 경기를 성사시킨 장본인이 퍼셀이었으니 수프 끓여 개나 준 꼴이었다.
여론이 움직이는 방향을 보고 유리하다고 느꼈는지, 퍼셀은 요사이 퍽 엿 같이 굴고 있었다. 오늘 자 ‘일간 달튼’, 그러니까 <피츠시몬스 타임즈>에는 피고인석에 앉은 나를 망신시킬 서른여섯 가지의 방법을 설명하는 퍼셀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꿍얼꿍얼 불평하려니 켈란은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다.
“대중 앞에서 로즈와 갈등하는 건 네게 승산이 없어. 방청석에 앉은 모두가 그녀의 말을 믿을 거야. 사실이든 아니든 말이야.”
약간 애매한 소리였다. ‘학생회의 공주님’으로서 블로썸이 가지는 영향력을 언급하는 걸까? 아니면 불가해할 만큼 ‘주인공’인 블로썸에게 후한 세계를 언급하는 걸까? 귓불을 긁적이자 켈란이 말을 이었다.
“로즈는, 사람들 앞에서 진심으로 사과하면 받아 줄 거야. 그러면 퍼셀도 더는 걸고넘어지지 않겠지. 장소는 교실이나… 광장이 좋겠어. 최대한 많은 목격자를 만들어. 그게 중요해.”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사과해?”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냐, 아리엘.”
타이르듯 하는 태도에 열이 확 받았다. 나는 스스로 듣기에도 엄청나게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자존심 세운다고 하지 마.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좋아하는 사람한테 떳떳하고 싶으니까!”
에드가가 형제의 피를 껄끄럽게 여긴 까닭은 다름 아닌 나였다. 그의 마음을 절절히 이해했다. 나는 도서관의 천장과 벽에 내 목소리가 울리든 말든, 우울병에 걸린 드워프 사서 미스터 브래드쇼가 입술에 검지를 올린 채 나타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외쳤다.
“사과를 하려면 내 것이 아닌 잘못을 인정해야 하잖아. 그러기는 싫어. 누명을 쓴 상태와 그것을 받아들인 상태는 완전히 다르다고!”
“…….”
“자존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나는 네 기억에 계급주의자로 남고 싶지 않을 뿐이야. 절대로 사과 안 해!”
그리고 내가 사과한다고 해서 얘네 로즈가 받아 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이미 갈림길에서 너무 멀리 왔다는 것을 험프리스 교수 사무실에서 느꼈다.
이를 악물고 씩씩거리는 나를 켈란이 빤히 봤다. 볕이 잘 들지 않는 도서관에서 마주한 금안은 다소 혼탁하였으며 뾰족가시 달팽이의 점액처럼 끈기가 있었다. 곧 그가 작은 손짓으로 드워프 사서를 물린 뒤 주변에 방음 결계를 쳤다.
어차피 신발 밑창에 붙은 껌 같은 드워프 말은 아무도 안 듣는다는 둥, 노움을 가혹하게 지배하였으니 인간에게 가혹하게 지배당하는 것 따위는 별것도 아니라는 둥, 불편하기 짝이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며 가는 드워프의 뒷모습이 요만한 점이 되었을 때 약간 차분해졌다. ‘있잖아.’ 따지듯이 들리지 않길 바라며 말했다.
“주말에 뭐 했어?”
“응?”
“그리피스 전시관 앞에서 네 시간이나 기다렸어. 저녁도 안 먹고. 추워서 죽는 줄 알았어. 너한테 잘 보이려고 예쁜 옷을 입었거든. 날다람쥐를 보낼 시간이 없었어? 블로썸이 로슨 교수의 발을 얼음덩이로 만들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웃기지 마. 이거 네가 썼잖아.”
농담의 달 연회 이래로 내 블라우스의 가슴 주머니에는 항상 켈란의 쪽지가 들어 있었다. 나는 쪽지를 쥔 주먹으로 켈란의 가슴을 쳤다. 그러자 그가 한 손으로 내 손목을 잡고 다른 손으로 손가락을 펴기 시작했는데, 되게 느릿하고 은근한 동작인지라 숨이 턱 막혔다.
항상 생각하는 건데 내 심장은 눈치가 별로 없었다. 두근대는 기분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었으므로 즉시 주먹을 풀었다. 하도 들여다본 탓에 무지하게 너덜거리는 종잇조각은 켈란의 커다란 손바닥 위에서 상당히 애처로워 보였다.
이내 언젠가의 뿔메뚜기 구이처럼, 켈란의 마음을 짐작할 마지막 실마리가 신성력에 휩싸여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 책 먼지에 섞여 허무하게 흩어지는 빛무리가 야속했다.
한편으로는 강렬한 확신에 사로잡혔다. 그 쪽지는 비열한 수작도 음모도 아니었으며 틀림없이 켈란이 쓴 것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언제나 침착하고 차분한 켈란 일레스티아가 이토록 지나친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정신이 확 들었다.
“글쎄. 누군가 내 글씨를 흉내 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
“틀렸어.”
깨닫는 것과 깨달음을 확인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피가 도는 감각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의도보다 훨씬 격정적인 목소리가 나갔다.
“틀렸어, 켈란. 이 쪽지를 네가 쓴 게 아니고, 이 티켓을 네가 보낸 게 아니고, <패치 노트>에 대해 아무런 기억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네가 제일 먼저 했어야 하는 질문은 어떻게 네 글씨를 알고 있는지야.”
“…….”
“중정에서 만났을 때는 분명 시스템이 너를 지배하고 있었어. 다시 버그가 생긴 거야? 언제부터? 왜 진실을 숨겼어? 나한테는 말할 수 있었잖아. 방학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나를 찾아왔는지, 블로썸이나, 케이틀린 대제나, 게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 줄 수 있었잖아. 우리가 나누었던 교감을 부정하지 않아도 되었단 말이야.”
“…….”
“기만할 거면 철저하게 하지, 왜 자꾸 흔들었어? 왜 애매하게 굴었어? 나 기대하라고? 그래도 되는 거야? 근데, 너, 일요일엔 걔랑 있었잖아….”
계속 주절거리다 보니까 울적한 기분이 되었다. 나는 입가에 힘을 주고 눈을 부릅떴다.
“만일 내가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라면, 정말 괜찮다고 하고 싶어. 월시 아예 발라 버리는 거 봤지? 나 완전 세. 운도 되게 좋고.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데 결국은 살았다고. 또, 뭐더라? 맞다. 상처도 쉽게 안 받아. 뾰족가시 달팽이 점액 같은 건 진짜 아무것도….”
“아리엘.”
허둥지둥 아무 단어나 주워 삼키는 나를 켈란은 단 세 음절로 제압했다. 깜짝 놀라 눈을 깜빡이자 물기가 있었다. 수치스럽고 신경질 나서 속이 홧홧했다. 또 미련스레 질질 짜고 있구나. 카일의 말마따나 우는 건 빌라드 저택의 울보 도련님 몫인데 말이다. 얄미운 켈란 일레스티아. 진짜로 얘 때문에 평생 울 것의 반은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