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말을 곱씹으려는 찰나 시간의 틈새에 갇혀 있던 험프리스 교수가 깨어났다. 눈 깜짝할 순간에 기운이 다 빨리기라도 한 듯이 무력한 얼굴이었다. 이윽고 딱딱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학생회장 후보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모양이더구나. 퍼셀이 학생 자치 법정 회부를 건의했다. 공판 기일은… 졸업 시험 이후로 생각하고 있다. 예정대로라면 이달 말이 되겠지.”
‘괜찮겠니?’ 사뭇 상냥한 태도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블로썸이 소극적으로 끄덕이자, 험프리스 교수는 내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서류에 서명을 갈겼다. 몇 분 전까지 백지였던 그것은 이제 퍼셀이 작성한 건의서로 변해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 머리를 맞대고 모인 세 사람 중 피고석에 설 누군가의 의견이 궁금한 사람은 나뿐인 모양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노골적이라서 억울하지도 않았다.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는 대신 물었다.
“만일 거기서 제 무고함이 밝혀지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시험을 무사히 치렀다고 가정했을 때, 너와 너의 악마적으로 귀여운 고양이는 졸업 앨범의 표지 바로 다음 장에 실리게 될 거란다. 네 미래에 내리는 축복이나 다를 것 없는 위치지.”
“그… 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요. 진심으로요. 지면요?”
“피츠시몬스의 신념에 위배되는 행위를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는 학생을 아카데미가 수용해야 할 이유는 없다.”
엄숙한 퇴학 선언이었다. 그제야 블로썸이 한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혼비백산하여 고개를 돌리니 장미 꽃잎으로 빚은 듯한 입술에 띤 연약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고 있으려니 다시금, 얘랑은 세상이 멸망해서 단둘만 남는다 해도 못 친해지겠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다.
험프리스 교수는 내가 정말 떳떳한지는 학생 자치 법정에서 드러날 것이라고 했다. 적어도 내가 떳떳한 것만은 보탤 것 없는 사실이었으므로 나는 험프리스 교수의 사무실을 벗어나 지독하게 많은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내내 꽤 당당하게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계단참에 발을 내디뎠을 때 불현듯 무시무시한 깨달음을 얻고 말았다. 무시무시하게 절망적인 깨달음 말이다. 쉴 새 없이 달음박질을 쳐서 기숙사까지 갔다.
방 안은 어두컴컴했고 음울한 분위기를 짙게 풍겼다. 내 침대에는 아침에 내던져 두었던 침구와 심심풀이용 장난감, 발이 시릴 때 신는 뜨개 양말이 그대로 있었으며 룸메이트의 침대에는 이불 덩어리가 있었다. 쿡 찌르자 이불 덩어리가 사람 말을 했다.
“하지 마….”
“저녁 안 먹어?”
“속이 안 좋아서….”
“어제도 안 좋았잖아.”
내 기억에 브리아나는 애덤 월시와 정말 지저분하게 싸우는 동안에도 하루 이상 식사를 거르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걱정되어서라고 해도 이쯤이면 이상했다.
본관 1층의 계단참에서 아득하게 느꼈던 불안이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대답 없이 꿈틀거리기나 하는 이불 덩어리를 무시하고 그녀의 침대 옆에 놓인 콘솔을 뒤졌다.
서랍이 열리는 소리가 퍽 요란했다. 브리아나–폭신폭신-모슬리가 기겁하는 모습은 더욱 요란했다. 유례없이 날랜 동작으로 이불 밖으로 뛰쳐나온 그녀가 물었다.
“뭐, 뭐 찾아?”
“너 공용어 철자 말하기 대회 준비할 때 썼던 단어장 어디 갔어?”
대륙에는 경이로운 변태가 많아서, 서른두 음절의 공용어 단어를 외는 정도로는 어디 가서 아는 척을 하기 어려웠다. 이디스가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브리아나는 공용어 철자 말하기 대회 본선에서 아쉽지도 않게 탈락했다.
수확의 달 전후로, 그녀는 그 단어장을 정말로 자식처럼 품고 다녔다. 또 브리아나의 자식은 내 자식이나 다름이 없었다. 행운의 편지를 장식한 글씨들이 내 눈에 익었던 것은, 그러므로, 당연하기 그지없었다.
“그, 그, 그거? 버, 버렸을걸…?”
거짓말을 내뱉는 입술과는 달리 눈가는 벌써부터 축축했다. 착잡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브리아나의 베개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아카데미에 도사린 위험을 헤쳐 나가기 위해 마련한 단검 옆에 손바닥만 한 책이 있었다. 조금 넘겨 보았다. 구멍투성이였다.
“미안….”
“맙소사, 브리아나 모슬리! 대체 왜 그런 거야!”
“나, 나는… 네가, 너무 슬퍼하니까… 근데, 아무리 그래도, 행운의 편지를 황태자한테 보낼 수는 없잖아… 그래서….”
아, 브리아나 모슬리. 나의 사랑둥이 룸메이트는 실연으로 상심한 나를 대신해 블로썸을 원망하기로 했나 보았다. 그녀가 기특한 동시에 골이 마구 아파졌다.
세 개 국가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모인 아카데미니만큼, 피츠시몬스의 학생 자치 법정은 ‘학생’자가 붙었다고 만만히 봐서는 안 됐다. 외부의 개입 없이 오로지 아카데미 내에서 모든 과정을 거침에도 그 파급력이 대륙을 거의 아울렀던 것이다.
가령 방과 후 활동 부서가 수확의 달 연회에서 벌어들인 활동비를 횡령하여 학생 자치 법정에 회부된 선배를 예로 들 수 있었다. 그는 유죄 선고를 받고 졸업한 뒤에도 사교계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한다.
로즈마리 블로썸이 행운의 편지를 받은 것은 공금 횡령처럼 큰 사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피츠시몬스에 적을 두어선 안 되는 이유를 만들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험프리스 교수가 단언한 대로, 어떻게든 무죄를 받아 내지 못한다면 나는 즉시 불명예를 떠안고 아카데미에서 쫓겨날 것이었다.
훌쩍거리는 브리아나의 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블로썸은 험프리스 교수의 테이블에 증거물들이 놓일 때 행운의 편지를 일부러 내 앞으로 가져왔다. 그녀가 괴롭힘과 나를 연결 지을 고리를 발견하였음은 분명한 듯이 보였다. 브리아나 모슬리 말이다.
아마도 블로썸으로 하여금 허무맹랑한 주장을 그토록 꾸준히, 그리고 강하게 관철하게끔 만든 원동력이 바로 그것인 모양이었다. 나와 아주 가까운 인물의 허물. 행운의 편지를 브리아나가 썼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누구라도 지저분한 교복과 찢어진 교재에서 나를 연상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다. 험프리스 교수의 사무실에서 만났던 블로썸의 언행을 돌이켜 보면, 그녀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과정을 상상해 봤다. 눈엣가시인 나를 죽이지 못해 끙끙대던 블로썸은 우연하게도 행운의 편지를 쓴 범인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러자 불현듯, 내 목숨은 살려 두면서 눈앞에서는 치워 버릴 수 있는 절묘한 해결책이 떠올랐다.
후작가 영식이 자작가 영애를, 왕족이 후작가 영식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피츠시몬스는 가까스로 벗어난 줄만 알았던 오명을 다시금 뒤집어썼다. 그런 와중에 아카데미의 유일한 평민 학생이 곤란에 처한다? 명성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마담 바틀렛으로서 예민하게 대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시스템을 뒤흔들 만큼 많은 양의 치트를 사용한 블로썸은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에서 여느 때보다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약간의 시늉만 해도 극단적인 지지를 얻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마침 귀족들이 부릴 법한 치졸한 수작에 대한 지식을 체득한 상태였다….
만일 이와 같은 경우라면 공판 과정에서 내 누명이 벗겨질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행운의 편지는 브리아나 모슬리의 소행이고, 교복과 교재는 그녀 스스로 한 것일 테니 유의미한 증거를 남겼을 리 없었다.
얼핏 절망스럽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퇴로가 닫힌 이상 내게 주어진 길은 전진뿐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총력을 다해 나아가야 했다.
블로썸이 선동과 날조로 승부하겠다면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 생각에 블로썸보다는 내가 거짓말을 잘했다. 또 어차피 다들 나를 병적인 거짓말쟁이라 믿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믿음에 물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내 평판은 이미 바닥에 떨어져 있어서 대중 앞에서 얼마나 추한 꼴을 보이든 별 타격이 없었다. 반면 로즈마리 블로썸은 잃을 게 많았다. 다가올 재난을 어떤 식으로 준비해야 할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
며칠 동안 도서관에 박혀 살았다. 졸업 시험과 학생 자치 법정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피츠시몬스의 졸업 시험은 지금까지의 시험과 전혀 달라 준비할 게 적었다. 내 생각에는 2학기에도 나의 과외 교사가 되어 주기로 한 제이든에게서 약간의 도움을 받는다면 충분할 듯했다.
제이든 스펜서는 열네 살에 왕실 기사가 되었다. 전쟁을 겪은 적은 없대도 마물 토벌대나 던전 공략대에는 속해 봤을 나이였다. 아마도 몇몇 약초의 구별법이나 던전 내에 도사린 함정을 감지하는 방법, 덫 해제법쯤은 전수받을 수 있을 것이다. 경험은 책으로는 못 배웠다.
타메니강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꽤 널찍한 지하 무덤이 있었다. 무덤 주인의 신분을 추측할 만한 조각상이나 명패도 없고, 겉보기에는 상당히 초라하였으나, 대개의 던전이 그렇듯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신비가 도사리는 곳이었다.
이를테면 어떤 도굴꾼은 무덤에 묻혀 있을 보물들을 노리고 던전을 찾았는데, 탐욕스러운 고블린들의 술수에 당해 속옷 바람으로 매질을 당한 뒤 쫓겨났다고 했다.
또 아픈 어머니의 약을 구하기 위해 던전에 들어갔다가 노파의 모습을 한 드라이어드를 만난 효자도 있었다. 어머니가 떠오른다는 이유로 초면의 노파를 극진히 대하기로 마음먹은 효자는, 나무 요정 드라이어드의 무리하고 무례한 몇 가지 부탁을 들어 준 결과 묘약으로 알려진 로열 젤리를 손에 넣었다.
마탑의 점검 보고서에 따르면, 이름 없는 자의 지하 무덤은 발을 들인 자를 그에 걸맞은 시련으로 인도하는 곳이었다. 미성숙한 마법사들에게 아카데미를 벗어날 자격이 있는지를 확인하기에는 적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고대의 유산에 익숙한 난나 교수가 던전 주변을 돌며 몇 가지 안전 주문을 왼 이래로, 피츠시몬스의 모든 5학년은 반드시 이름 없는 자가 선사하는 시련을 통과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