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33화 (133/178)

번쩍거리는 잉크로 새겨진 홍보 문구가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다가오는 주말까지 방문한 고객님께는 절인 배와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을 얹은 커스터드 크림 파이를 증정합니다!’

“엄청 맛있겠다, 파이.”

홀린 듯이 중얼거리자 제이든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깊이 가라앉은 이끼색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스며 있었다.

어제 산 것처럼 뽀송뽀송한 토끼털 담요가 쌍두지네의 턱니 옆에서 발견되었다. 그것을 가방에 욱여넣는 동안, 과연 과자점의 개점 행사를 놓치기 싫어하는 제이든이랑 함께 가고 싶은 곳을 미리 생각해 둔 제이든 중 어느 쪽이 더 깜찍한지를 가늠했다. 난제가 아닐 수 없었다.

***

지긋지긋한 험프리스 교수로부터 지긋지긋한 호출이 있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열심히 오르는 동안 상태 창에 표시된 나의 체력 수치는 7에서 8이 되었다. 어쩌면 내 능력치 중 체력만 무지하게 높은 건 험프리스 교수 탓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러 부조 장식이 어지럽게 붙은 문짝을 열었을 때 로즈마리 블로썸은 이미 험프리스 교수와 함께 있었다. 고개를 약간 수그렸으나 허리는 꼿꼿이 편 채로, 미동도 없이. 혀를 내두르며 의자를 빼었다.

기분 탓인지 험프리스 교수의 사무실이 전보다 화려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특히 포도 넝쿨과 작은 새가 그려진 고급 찻주전자는 분명히 여태껏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알바라도 교수 채용 건처럼 또 무언가 돈이 되는 사업을 진행 중인가 보았다.

“네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꽤 좋아한단다, 달튼.”

엉덩이가 좌판에 채 닿기도 전에, 험프리스 교수가 입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활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영광입니다, 교수님.’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하려 노력했으나 평소와 딴판이라서인지 오히려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니 솔직히 말해 줬으면 좋겠다.”

콧대의 툭 튀어나온 부분에 폭이 좁은 삼각 테 안경이 걸려 있었다. 안경알 너머로 나를 보는 눈빛이 꽤나 날카로웠다. 반면 목소리는 어린애를 어르듯 했다. 나는, 방금 영광 운운한 것은 일말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라고 답하려다가, 그녀가 내 말투를 트집 잡는 게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즉시 깨달았다.

이윽고 테이블에 몇 가지 잡동사니가 올라왔다. 착한 제이든의 기특한 쓰레기 자루에 담겨 있던 물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들이었다. 오물이 묻은 천 쪼가리와 너덜거리는 결계술 교재, 그리고 신문이나 잡지에서 글자를 오려 붙여 작성한 듯한 협박 편지. 블로썸이 주장하는 나의 부정을 뒷받침할 증거물.

블로썸의 교재는 다소 독특하게 난도질이 되어 있었는데, 칼이나 가위로 잘린 것이 아니라 송곳 같은 것으로 찢긴 듯했다. 묘한 광기가 느껴져 소름이 끼쳤다.

피 같은 것에 거의 절여진 교복 치마에서는 썩는 냄새가 진동해 두 배로 섬뜩했다. 흑마법이나 부패 방지 약 조제에 사용되곤 하는 구울 피를 들이 부은 모양이었다. 일전에 켈란과 험프리스 교수가 마법 약 교실에서 사라진 구울 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지나가며 들었다.

반면 협박 편지에서는 그리 대단한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두 가지가 없었다면 장난이라 치부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 편지는 일레스티아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매년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고 지금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상 7일 안에 떠나야 합니다. 이 편지를 포함하여 7통을 행운이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 주셔야 합니다. 고대 밀루아의 오스왈드 2세는 이 편지를 받았지만 그냥 버렸습니다. 결국 9일 후 그는 가마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뭔가 이상했다. 저렇게 소소한 협박 편지를 써 내릴 만한 사람이 구울 피를 훔쳐 블로썸의 교복과 교재를 망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감성의 차이가 너무 컸던 것이다. 괴롭힘에도 감성이 있냐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또한 협박 편지에 사용된 글씨가 지나치게 익숙했던 것이다. 평소 활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내가 아는 매체라고는 <피츠시몬스 타임즈>나 <월간 피니건>이 전부겠으나 두 쪽 다 아님은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기회와 희망, 진실과 믿음을 내세우는 피츠시몬스이니만큼 평민 특례 입학생에 대한 부당한 대우는 좌시할 수가 없겠더구나.”

잘 갈린 칼처럼 뾰족한 말이 상념을 가르고 들어왔다. 나는 고민하기를 멈추고 험프리스 교수를 똑바로 봤다. 어쨌든 내게 씌워진 혐의는 누명이었다.

“제가 아니에요.”

“꾸며낸 말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알지 않니. 변명해 봐야 소용없어. 네가 평소에도 블로썸을 위협한 것을 목격한 학생이 차고 넘쳐.”

험프리스 교수의 태도는 기이할 만큼 단호했다. 내가 뭐라고 주절대건 듣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말이다. ‘안 그랬어요. 위협한 적도 없고, 공격한 적도 없고, 유치한 편지를 쓰지도 않았어요.’ 몇 번이고 거듭 말해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벽에다 대고 떠드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이미지 쇄신을 위해 들여온 특례 입학생인 블로썸에게 아카데미가 쏟는 관심은 그야말로 지대했다.

이를테면 아카데미장인 마담 바틀렛은 매달 심리 상담가와 기자를 대동하여 블로썸을 만났다.

난데없이 푸른 피와 함께 수학하게 생긴 평민 학생의 고충을 듣고자 함이 하나의 이유였고, 평민 학생을 살뜰히 챙기는 면모를 과시하고자 함이 그보다 큰 이유였다.

그러나 그녀의 꿍꿍이속이 어떻든 간에 그것이 일반적인 귀족 아카데미에서 평민에게 베풀 법한 혜택이 아님은 다들 알고 있었다.

다행히 내 소중한 사람들은 나를 의심치 않으나 그들을 제외한 모두가 나를 삿대질했다. 어려울 거라는 예상은 했다. 다소의 명예는 버릴 각오도 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했다. 험프리스 교수에게 기회주의적인 면모가 있기는 해도 진실을 호도할 정도는 아니라고 여겼는데, 꿋꿋이 자백을 종용하는 모습이 퍽 낯설었다.

“위협은, 그러니까 걔들이 과장한 거예요. 기껏해야 말다툼에 불과하다고요. 사소한 말다툼으로 앙심을 품을 만큼 제 인성이 파탄 난 것도 아니고요!”

“블로썸의 입장은 다른 것 같던데.”

깜짝 놀라 블로썸을 쳐다보자 그녀는 내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다만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눈 아래로 그림자를 드리워 음울하고 가련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대체 무슨 소릴 한 거야, 너?”

“달튼.”

“제발요, 교수님. 블로썸과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왜 제 말은 믿지 않으시는 거예요?”

“정말이지 실망이구나. 장난을 좋아할 뿐 성정이 비뚤어진 것은 아니라고 봤는데… 어쩌면 에드워즈가 너를 제대로 평가했을지도 모르겠다.”

크리스타 에드워즈가 내 평판을 걸레짝으로 만든 이래로 나는 걔 이름만 들어도 화가 치밀어서 기절할 것 같아졌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았다.

“하지만 증거가….”

“없지. 그래도 네 말을 믿어 주시진 않을 테지만.”

“블로썸!”

갑자기 낭랑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블로썸이었다. 냉소로 입매를 비튼 채였다. 조금 전까지 고수하고 있던 피해자 콘셉트는 집어치우기로 했나 보았다.

당황하여 험프리스 교수를 곁눈질하니 그녀는 우리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 듯이 서류에 뭐라고 끄적이고 있었다. 지나치게 태연한 모습에 불현듯 견디기 힘든 충동이 차올랐다.

나는 붉은 천에 들이박는 황소처럼 우악스럽게 험프리스 교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손에 쥔 깃펜을 뺏어 던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험프리스 교수의 손은 계속해서 글씨를 쓰는 것처럼 움직였다.

잘 보니 애당초 그녀가 쥔 것은 서류가 아니라 그냥 백지였다. 머리카락이 바짝 솟았다.

“교수님은 내가 그녀를 무시해도, 비난해도, 하다못해 지금 당장 여기서 뺨을 갈겨도 내 편을 들어 주실 거야. 왜냐면 이 세계는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니까. 고작 서브 캐릭터의 마음을 얻었다고 네가 뭐나 된 줄 착각했다면 유감이야.”

내게는 항상 인중에 똥이 달린 듯한 표정만 지어 보였던 블로썸치고는 드물게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가 노래하듯 말하는 동안에도 험프리스 교수는 백지에 투명 깃펜으로 알 수 없는 내용을 적었다.

나는 지독한 패배감에 젖어 테이블 아래를 구르는 깃펜을 집어 들고는 험프리스 교수의 방황하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

“뭐?”

“네 계획이 내 계획과 얼마나 다르든지 간에 훼방을 놓은 건 맞으니까.”

꽤나 오래도록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원래 블로썸에게 향해야 했던 에드가와 제이든의 호감을 내가 가로챘음은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케이틀린 대제를 도발하여 스티아 신의 티아라마저 습득하지 못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내가 블로썸이어도 두 번쯤은 내 목을 조르고 싶을 듯했다.

“또 네 입장이 되어 보니 얼마나 거지 같은지 알겠어. 그러니까, 1학기 때 말이야. 학생회 애들이 너를 도울 걸 알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방관했던 사실이 변하지는 않잖아. 게다가 너는 나보다 훨씬 많은 5학년을 보냈고….”

“…….”

“하지만 너도 알고 나도 알다시피 우리의 목적은 결코 합치될 수 없지. 그래서 너도 나한테 이렇게 개같이 구는 거일 테고. 그러니까 이건 네가 들을 최초이자 최후의 사과가 될 거야.”

“…….”

“미안해, 블로썸.”

아까만 해도 아름답게 휘어 있던 눈꼬리가 확 굳었다. 유리구슬에다가 제비꽃을 짓이긴 듯한 동공에서 빛이 사라졌다. 이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블로썸이 중얼거렸다.

“네가 그럴 때마다 소름이 끼쳐. 네 머리통에, 가슴에, 진짜로 영혼 같은 게 들어 있는 듯이 굴 때. 혹시 나는 정말로 미쳐 버린 걸까?”

“하지만….”

블로썸이 미쳤는지 어쨌는지는 몰랐다. 창작물의 등장인물이 영혼을 가지는 게 가능한 건지도 미지수였다. 내가 아는 건 내게도 영혼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약간 더듬거리며, 그러나 명확한 발음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나는, 살아 있는걸….”

그러자 블로썸은 잠깐 동안 아주 끔찍스러우며 두려운 괴물을 보듯이 나를 쏘아봤다. 그런 다음에는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턱을 살짝 기울이고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전지전능한 주인공이 자취를 감춘 자리에 못돼 처먹은 ‘독거미 달튼’의 수작질에 상처 입은 ‘학생회의 공주님’이 나타났다.

“불명예스럽게 쫓겨나는 것보다는 자퇴가 나을 거야.”

혐오감이 가득 담긴 보라색 눈동자가 빡빡한 속눈썹에 완전히 가려지기 직전에, 블로썸이 문득 지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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