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시몬스 아카데미의 5학년 여자애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비공식 설문-켈리 라미레즈의 공책을 통해 이루어졌다-에 따르면, 모나한 교수 다음으로 연애와 거리가 먼 사람이 커크패트릭이었다.
그래서 나는 커크패트릭의 첫사랑이 여장한 남자라던 에드가의 폭로도 사실 반만 믿었다. 현재 대륙에 통용되는 금화에는 스티아의 사도 중 ‘외빈’이 양각되어 있었고, 그는 양성구유였으므로, 끼워 맞추면 또 그럴싸했다.
하지만 길버트 모나한에게도 결국엔 여친이 생겼다. 스테판 커크패트릭이라고 못할 건 없었다. 외모. 모나지 않았다. 성적. 괜찮았다. 자작가의 첫째도 아닌 자식이라지만 애초에 브리는 준귀족이었다. 또 마력선 조종사의 벌이를 감안하면 그럭저럭 쓸 만했다.
인색한 것은 큰 단점이었으나 브리가 알아서 처리할 수준은 되었다. 황금알을 낳는 오리의 존재를 차치하고서라도 걔가 어디 가서 굶을 애는 아니었다.
잠깐. 생각하다 보니까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스테판 커크패트릭은 돈에 환장했다. 브리아나 모슬리는 돈이 아주 많았다. 이 자식, 이거, 완전히 꾼 아니야? 나는 아까 그가 했던 것처럼 새우 눈을 뜨고 쏘아붙였다.
“어쩌다가 브리를 좋아하게 된 거야? 그러니까, 걔는 분명히 반해 마지않을 깜찍이지만, 뭔가 계기가 있을 거 아냐.”
“내가 미쳤다고 그걸 너한테….”
“싫으면 말아. 다만 브리아나가 월시를 차고 자유의 몸이 된 건 어디까지나 내 덕분이라는 거 알아 둬. 걔의 허무맹랑한 주장대로 사령술을 쓰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좋아, 말해 줄 테니까 절대 웃지 마. 수확의 달 연회 때, 공용어 철자 말하기 대회에서 우승했잖아. 멋지다고 생각했어.”
“맙소사, 너 진짜 취향 독특하다!”
내 기준에서 브리아나–사랑둥이-모슬리가 가장 덜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바로 그 하품 나오는 대회에서 서른두 음절짜리 공용어 단어를 말할 때였다. 진심으로 감탄스러웠다.
너무 웃겨서 배를 잡았더니 여간 성질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입꼬리에 힘을 딱 준 채 웃는 거 외에 다 했다. 추잡한 노래를 짓고 온갖 사물에 브리의 이름을 붙이며 지독하게 놀려 댔다는 뜻이다. 그러자 커크패트릭은 완전 동그랗고 엄청 빨간 열매가 세 개나 달린 겨우살이 가지를 줄 테니 제발 사라져 달라고 빌었다.
장난꾸러기의 영혼은 그깟 겨우살이 가지에 죽지 않았다. 단호히 고개를 저은 뒤에, 나는 열매 다섯 개가 달린 가지를 가리켰다. 그게 더 예뻤다.
***
주인공과 공략 대상과 게임과 시스템이 어떻게 꼬이든 간에 배경 인물들은 각자의 삶을 살았다. 그걸 확인할 때마다 나는 불현듯 주체할 수 없는 행복감에 휩싸이곤 했다.
그리고 나는 꽃이 피지 않는 식물도 아주 좋아했다. 잘 땋은 머리카락에 커크패트릭에게서 갈취한 겨우살이 가지를 꽂으니 하루를 즐거이 보낼 자신이 생겼다. 오늘만은 누가 내 면상에다 씹던 캐러멜을 뱉어도 ‘하하, 개자식, 귀엽기는. 갑자기 엿같이 굴고 싶어졌구나?’ 하면서 봐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사물함은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를 잇는 복도 구석탱이에 처박혀 있었다. 왔다 갔다 하기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으므로, 나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 사물함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특히나 근래 들어서는 자꾸만 소지품이 사라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던 것이다. 교재나 과제처럼 중요한 건 가방에 보관하는 편이 현명했다.
하지만 가을도 막바지에 이르자 날이 너무 싸늘해졌다. 특히나 보호복에 딸린 기능으로 체온을 유지하는 난나 교수의 교실은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추웠다. 이대로라면 숙면은 어림도 없었다. 재작년엔가 사기는 했는데 당최 얻다 두었는지 가물가물한 토끼털 담요를 찾아야 했다.
긴 복도 끝까지 가서 모퉁이를 돌 즈음에 무시하기 어려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슬쩍 보니 누군가 내 사물함에서 미적거리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도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익숙한 사람, 아니 용이었다. 다가가서 아는 체를 하자 돌아오는 반응이 꽤나 격했다.
주춤대며 발을 물리는 거대한 몸 뒤로 웬 자루가 흔들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얼핏 보기에 쓰레기가 담긴 듯했는데, 욕설이나 저주가 담긴 편지들이 분명했다.
‘학생회의 공주님’이나 ‘피츠시몬스의 여왕’과는 달리 ‘독거미 달튼’의 팬은 지독한 자식투성이였다. 내 사물함 자물쇠는 망가진 지 좀 되어서 아무 번호로나 열렸으니까, 굳이 제이든처럼 반쯤 인간을 벗어나지 않아도 충분히 접근 가능했다.
하도 후미진 자리여서 뭔 짓을 저지른들 목격될 가능성도 적었다. 비뚤어진 팬심을 표출하기에는 그야말로 최적의 조건이라 할 수 있었다.
제이든의 목적은 전혀 다른 것처럼 보였다. 커다란 손아귀에 꼭 쥐인 헝겊 조각에 더러운 것을 닦은 듯한 흔적이 있었다. 여분의 망토와 넥타이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또 쓰고 남은 마법 약재료들을 원소별로 분류한 솜씨는 처음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었다.
“요새 사물함이 왜 이리 깔끔한가 했더니, 너였구나. 난 또 나한테 몽유병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뭐야.”
아니면 청소를 좋아하는 꼬마 요정 브라우니라도 붙은 줄 알았다. 꿀 바른 빵이나 과자라도 놓아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다.
“미안해.”
“왜?”
“네가 바라는 게 이깟 게 아닐 텐데….”
당연히 아니었다. 나라고 해서 탕녀 소리를 듣는 상황이 만족스러울 리가 없었다. 게다가 블로썸이 비슷한 괴롭힘을 당했을 때 제이든이나 학생회 애들이 어떻게 반응했던가를 떠올려 보면 야속하지 않기가 어려웠다. 올해도 페드로 캔트렐은 블로썸을 욕하고 다닌 죄로 제이든의 목검에 이마뿐만 아니라 별 데를 다 맞았다.
엄밀히 말하면 블로썸이 당했던 괴롭힘과 내가 당하는 괴롭힘이 다르기는 했다. 밟으면 꿈틀은 무슨 지랄을 하는 지렁이여서인지 내게 가해지는 공격은 블로썸을 향한 것보다 훨씬 과격했다.
또 블로썸을 괴롭히던 소수의 계급주의자와 달리 나를 괴롭히는 다수의 일반 학생들에게는 악인을 응징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실제로, 블로썸의 절친인 미케일라 메이나드는, 별안간 전이된 구정물을 맞고 목욕하러 가는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쌤통이라고 외쳤다.
고오귀한 백작가 후계인 캔트렐과 클리블랜드, 케이틀린 대제와 연줄이 있는 월시에게 하지 못 할 말이나 행동을 상인의 딸에게는 할 수 있었다. 준귀족인 메이나드가 캔트렐에게도 쌤통이라고 외쳤을 것 같지는 않았다. 메이나드뿐만 아니라 내게 손가락질하는 대부분이 그러겠지.
알 만은 했다. 게임의 주인공인 블로썸에게 가지는 막연한 호감과 가련한 평민 소녀를 향한 연민, 만만한 상대에게만 발휘되는 선택적 정의감. 취하기 쉬운 감정들이었다. 하지만 샐러맨더의 무지개 비늘에 맹세코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다.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얄미운 메이나드의 식사에 브리아나 모슬리표 발모제를 탄다고 한들 내가 받는 상처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가끔은 진짜 미아 말대로 다 뒤집어 버리고 싶어졌다. 간밤에 블로썸의 머리카락을 죄 뽑고 에드워즈의 눈썹을 밀어 버린 뒤 자퇴 신청서를 땔감으로 아카데미에 불을 지르는 꿈을 꿨다.
당장의 고통을 해소하고자 하는 충동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서 참았다. 블로썸이 수면 위에서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건 그만큼 안달이 났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었을 때, 나는 나를 쳐다보는 룸메이트의 슬픈 눈에다 대고 야한 꿈을 꿨다고 둘러대었다.
내가 걱정되어서인지, 브리도 안색이 통 좋지 않았고 식사도 걸렀다. 작은 소음에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했다. 눈 밑이 퀭하고 볼이 홀쭉한 상태에서 연애 사업의 성사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졌다. 어제 커크패트릭의 순정은 나의 혀끝을 벗어나지 못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가만히 있는 모습이 화난 듯이 보였나 보았다. 안절부절못하며 내 안색을 살피던 제이든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도, 더욱 나서서 네 편이 되어 준다면….”
“블로썸과도 친하니 어쩔 수 없지. 이해해.”
아마 제이든 스스로도 더욱 적극적으로 나를 변호할 마음이 들지 않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을 거다. 실에 매이지 않은 카일마저도 주기적으로 ‘사랑하는 남자’ 스위치를 켜고 블로썸과 친밀하게 굴었다. 버그로 인해 운명에서 일부 벗어났다고 해도 블로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임의 영향을 받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세계가 그 모양으로 생겨 먹은 것을, 누구를 탓하리오.
적당히 손을 저어 제이든을 안심시켰다. 그러고 나서는 나의 착한 친구가 불가피한 죄책감에 고통 받기 전에 보다 건설적인 화제를 입에 담았다.
“내 기분이 나아지길 바란다면, 제이든. 브라우니처럼 몰래 사물함을 청소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있거든. 바로 친구들끼리 따뜻한 우유를 마시면서 수다 떠는 거야.”
겸사겸사 쌍둥이와 스펜서 공작가 간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캐묻고 말이다.
‘좋아.’ 다소 음흉한 의도로 제안하니 너무 덥썩 받길래 털 난 양심이 조여들었다. ‘얼마든지.’ 입꼬리는 미세하게 우묵해졌다.
일부러 발랄하게 굴며 제이든의 손아귀에서 쓰레기 자루를 받아 들었다. 유감스럽게도, 그가 쓰레기로 치부한 몇 가지는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물건이었다.
이를테면 어디서 어떻게 봐도 짐승의 똥처럼 생긴 덩어리는 직접 만든 흙 골렘이었다. 다 먹은 과자 포장지는 거기 그려진 고양이가 릴루와 닮아서 보관하고 있었다. 대충 그런 것들을 있던 자리에 도로 놓으며 물었다.
“가고 싶은 데라도 있어?”
내 말에, 제이든이 눈썹을 살짝 늘어뜨렸다. 곧 너른 품에서 꺼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자그마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은밀한 사랑을 속삭이는 편지마냥 잔뜩 눌러 접은 종이는 엄지손톱보다 약간 컸다. 두툼한 손가락으로 그것을 펴기 위해 제이든은 제법 오래도록 꼼질거렸다.
“이번 주까지만 행사한대.”
밀루아의 용기사와 작은 종이 간의 전투는 퍽 지난했다. 쓰레기와 소중한 쓰레기를 분류하며 기다리니 마침내 피니건 거리에 위치한 과자점의 개점 안내 전단지가 손아귀에 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