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피츠시몬스 타임즈’는 ‘일간 달튼’이 되었다. 유례없이 불티나게 판매되는 신문의 기사 대부분이 나를 헐뜯고 있었다.분노한 크리스타 에드워즈의 마법 깃펜은 아리엘 달튼의 모든 허물을 캐내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듯했다. 그리하여 내 뒤통수에 쏟아지는 험담의 종류는 다양해졌다. 내 외모, 성적, 성격, 신분…
내게 흠잡을 거리가 많다는 점이 유감스러웠다. 또 나는 주인공도 아니어서 블로썸처럼 비이성적인 지지를 받지도 못했다. 불공평한 세계를 저주하며 카일에게 제발 부탁이니까 가만히 있어 달라고 말했다. 에드워즈의 속내를 까발리고 싶은 충동은 가까스로 눌렀다. 그녀가 내 눈엣가시인 것과는 별개로 그건 엄연히 에드워즈의 몫이었다.
사실 갈등을 타개할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나는 카일의 소꿉친구였고 걔의 거의 전부를 꿰고 있었다. 우연을 가장하여 에드워즈를 카일과 몇 번 만나게 하기란 식은 수프를 마시는 것보다 쉬웠다.
하지만 카일이 얼마나 오랜 시간에 걸쳐 얼마나 단단한 감정의 성을 쌓아 왔는지 아는 이상, 그건 에드워즈에 대한 기만이자 카일에 대한 기만이었다.
어쩌면 나를 기만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애초에 나 스스로도 별로 내키지 않았으니까. 딱히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안 그러고 싶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자 아나이스는 고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아리엘….”
“어떻게든 되겠지. 네가 말한 것처럼 어느 쪽이든 증거가 없기도 하고… 나야 뭐, 사교계로 진출할 것도 아니고, 졸업하면 땡이니까.”
“…….”
“켄드라가 문제기는 한데, 선대위에서 빠지고 당분간 거리 두면 괜찮지 않을까?”
일부러 발랄하게 지껄이니 아나이스는 더욱 수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나는 요사이 슬슬 걱정이 될 만큼 폭력을 맹신하기 시작한 아나이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자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어차피 궁금한 것이 있기도 했다.
“그보다, 아나이스. 학생회 애들이랑 친하지?”
“어렸을 때나 그랬지, 지금은 네가 더 친할걸. 왜?”
빌라드 백작가 차남의 소꿉친구가 달튼 자작가 영애라면, 스펜서 공작가 후계자와 나돈 왕자의 소꿉친구는 오브라이언 공작가 영애였다. 거의 한 핏줄처럼 자란 우리와 달리 몸이 커지면서 지리적, 정치적 한계로 인해 데면데면해졌다고는 해도, 함께 어울리던 시절에는 꽤나 사이가 좋았다고 들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아나이스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결 좋은 갈색 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혹시 제이든하고 쌍둥이하고 싸운 적이 있어?”
농담의 달 연회에서, 나는 에드가와 그의 형제가 태어날 적엔 반대의 입장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원래는 에드가 라모스였던 지금의 브라이스 나돈이 계승 후보자로 나서게 된 배경에 제이든 스펜서가 있다는 것도.
그러고 보면 에드가와 제이든에게는 내가 모르는 동안 맺어진 약속이 있었다. 상호 간섭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한. 막연히 흩어져 있던 의문들이 불현듯 서로 닿았다.
“싸웠다기보다… 갑자기 어색해졌어. 전에는 정말이지 어딜 가나 붙어 다녔거든. 세쌍둥이라도 된 듯이 말이야.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잠시 입을 다물고, 아나이스는 해묵은 기억의 책장을 뒤지듯이 먼 곳을 봤다. 그러더니 곧 검지로 스스로의 입술과 턱끝 사이 오목한 부분을 톡톡 두드렸다. 호수에 아른거리는 은파처럼 우아한 동작이었다. 내가 저러면 잃어버린 아래턱뼈를 더듬어 찾는 스켈레톤 같을 텐데.
“음… 내가 아무리 네 추종자라지만, 더는 어렵겠어.”
아나이스가 말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있되 떠벌리기는 곤란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확실히, 쌍둥이와 제이든, 아나이스의 위치를 고려하면 그들의 과거를 마냥 개인사라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나는 충분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나이스는, 내가 원하는 바를 들어 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는지, 내게 씌워진 누명을 벗을 방도를 찾아보겠노라고 힘주어 선언했다. 엘리자베스도, 브레넌도 그렇게 했다.
남의 불행을 너무 즐긴 것 같다며 사과하는 포크너의 입매는 퍽 엄숙했다. 됐다고 하려다가 웃고 말았다. 뭐가 어찌 되었든 고마운 건 고마운 거였다.
***
알바라도 교수가 피츠시몬스에 부임한 이래로 많은 학생의 금화 주머니가 홀쭉해졌다. 그래서 마력선 장만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진짜로 장기 빼고 다 파는 중이던 스테판 커크패트릭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피츠시몬스-칵스위턴 그리폰 크리켓 경기를 두고 벌어진 노름판에서 크게 걸었다가 왕창 잃은 뒤로는 더욱 초조해진 듯했다.
라고는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헛웃음을 삼키며 광장 한켠에 마련된 커크패트릭의 가판대로 갔다. 빳빳한 차양에 겨우살이 가지가 듬성듬성 매달려 있었다. 겨우살이 아래에서 입 맞춘 연인은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는 미신이 있어서, 겨울에 한몫을 잡으려면 그만한 품목이 없기는 했다.
달튼 상단에서도 12월이 되면 거의 모든 물건에 겨우살이를 끼워 팔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11월이었다.
“11월에 겨우살이는 이르다고 생각하지 않냐?”
“그 레프러컨과 고블린의 잡종 같은 여자가 ‘입맞춤을 부르는 겨우살이 꼬임 머리띠’ 같은 걸 팔기 전에 선수를 쳐야… 헉, 달튼!”
“헉은 무슨 헉이야. 잠깐 나 좀 보자.”
새로운 겨우살이 가지에 보존 주문을 걸다 말고 나를 발견한 커크패트릭이 손을 마구 휘저었다. 내가 자기 업장에서 뭉개고 있으면 장사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간만에 청개구리 심보에 불이 붙었다. 나는 끈적한 동작으로 커크패트릭에게 다가가 그가 다듬던 겨우살이를 뺏어 들었다. 머리 위로 들고 살짝 흔들자 커크패트릭이 기겁을 했다.
“내 생각에 우리가 여기서 키스를 진하게 하면 네 겨우살이가 불티나게 팔릴 거 같은데.”
“봐 주라….”
커크패트릭의 안색이 여러 색으로 물들었다. 근래 ‘학생회의 공주님’과 ‘피츠시몬스의 여왕’ 이상의 유명 인사로 급부상한 ‘독거미 달튼’과 치정으로 얽힐 생각을 하니 정신이 혼미한가 보았다.
소리 내어 웃으며 몸을 물렸다. 나랑 입술 못 맞대서 안달인 애들이 수두룩한데, 참으로 건방진 자식이 아닐 수 없었다.
“별건 아니고, 너희 새어머니랑 얘기를 하고 싶어서.”
어차피 나라고 해도 악명에 악평을 보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곧바로 본론을 꺼내자 커크패트릭은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 귀를 후볐다. 그러고 나서는 되물었다.
“어머니?”
“전 미스 프록터, 현 커크패트릭 자작 부인, 메이브 커크패트릭.”
나돈의 전 첩자이기도 했다. 에드가가 흘리듯 말한 바에 따르면 그녀는 커크패트릭 자작과 불같은 사랑에 빠지면서 스스로를 버리기로 했다. 진짜 이름과 진짜 나이, 진짜 신분까지. 어쩌면 기억도 버렸을 수 있었다. 내가 본 어떤 책에서 첩자들은 은퇴하기 위해 반드시 기억을 지우는 약을 마셔야 했다.
더구나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나돈 왕족의 과거였다. 은퇴를 한다고 있던 충성심이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았다. 만에 하나 기억이 남아 있더래도, 솔직히 그녀가 나에게 유의미한 정보를 넘길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하지만 지레 겁을 먹고 시도조차 않는다면 0에 수렴하는 게 아니라 그냥 0이 되는 거였다.
“그건 나한테 묻는 것보다 정식으로 편지를 보내서….”
“은밀하게.”
“뭐?”
“둘이서만.”
“무슨 꿍꿍이야?”
이제 커크패트릭은 아버지가 오랜 독수공방 끝에 찾은 사랑이 독거미의 거미줄에 걸렸을까 봐 두려워진 모양이었다. 그가 도주로를 파악하듯 자꾸만 뒤를 봤다.
나는 가능한 가장 무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망토 안쪽에서 꺼낸 것을 커크패트릭에게 건네었다. 돌돌 말아 가죽끈으로 묶은 종이였다.
손톱만 한 봉납을 떼고 엉성한 매듭을 풀어내면 기하학적인 문양이 나타날 것이다. 내가 1학기 때 마법 인형 암살자의 잔해를 뒤적이다 발견한 마나 서명 말이다. 본 지가 오래되어서 정확한 형태는 아니어도 얼추 비슷하기는 하겠다고 확신했다.
에드가는 그걸 보자마자 적의 정체를 알아챘다. 그만큼 특징적이라는 뜻이었다. 커크패트릭 자작 부인에게 첩자로서의 기억이 남아 있다면 몰라볼 리가 만무했다.
“그냥 이걸 전해 주기나 해. 그럼 그쪽에서 나를 만나려고 할 테니까.”
“전하기 싫으면?”
“‘독거미 달튼’이 학생회 다음으로 목표 삼은 게 미래의 마력선 조종사면 진짜 재미있겠다, 그치.”
“지독하기는… 감히 그 착한 블로썸한테 못된 마음을 품은 악인답다.”
커크패트릭이 눈을 가늘게 뜨고 비아냥거렸다. 배배 꼬인 말투에서 느껴지는 맹신에 다만 어깨를 으쓱거렸다. ‘희대의 탕녀’나 ‘질투에 미친 못난이’가 아니라 다만 ‘지독하다’고 표현하였음은 나름대로 고마운 점이었다.
한편으로는 나를 가리키는 상반된 별명들을 곱씹자니 하나만 하지 싶어서 열이 받았다. 남자애들이랑 놀아난다고 욕하고도 싶고, 빵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주제 파악 못 한다고 비웃고도 싶고, 어쩌자는 건지.
“내가 좀 위대하긴 하지.”
일부러 뻐기듯이 말하자 커크패트릭은 더는 대꾸하고 싶지 않아졌나 보았다. 도날드 왕자의 마나 서명이 커크패트릭의 주머니로 사라졌다.
“좋아, 네 부탁을 들어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
“…슬리.”
이번엔 내가 귀를 후빌 차례였다. 턱을 살짝 들고 눈썹을 올렸더니 커크패트릭의 이마가 새빨개졌다. 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브리아나 모슬리랑 다리 좀 놔 줘. 너 걔랑 친하잖아.”
“말도 안 돼! 너 같은 수전노한테도 실은 관심 있는 여자애가 있다고? 그리고 그게 내 룸메이트라고? 내 말은, 다들 네가 금화와 사랑에 빠진 줄 알고 있단 말이야!”
“조용히 해!”
내가 폭소하자 커크패트릭은 마구 윽박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길길이 날뛰는 커크패트릭을 눈으로 훑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