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이쯤이면 오기였다. ‘켈란이 온다’와 ‘오지 않는다’를 가늠하는 머릿속 줄다리기는 이미 한쪽으로 쏠린 지 오래였다. 고개를 흔들어 줄을 끊어 내고 쪼그려 앉았다. 종아리가 깨질 거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타원을 여러 개 겹쳐 만든 꽃봉오리 부조가 바닥에 점점이 도드라져 있었다.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일부 꽃잎에 땡땡이 무늬가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까, 아, 그건 내 눈물이었다. 비참하고 초라하고 절박한 동그라미. 목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불현듯 커다란 그림자가 동그라미들을 삼켰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더니 카일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명한 녹색 눈에 일렁이는 아지랑이가 나로 하여금 회중시계에 새겨진 늑대를 떠오르게 했다.
또 그리폰 크리켓 경기가 있었던 어느 날을. 켈란이 아닌 남자애와 키스할 뻔했던 순간.
“바보야, 왜 울어?”
땀이 흥건한 얼굴을 웃옷으로 문대고 나서, 카일이 내뱉었다. 사나운 어조와 반비례하여 내 볼에 닿는 손가락은 사뭇 온순했다. ‘전에도 말했잖아. 너는 울면 못생겼으니까 항상 웃어야 된단 말이야.’ 찡그린 콧잔등에 채 못 닦아 낸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네가 어떻게….”
“식당에 안 보이길래, 모슬리랑 엘리자베스한테 물었더니 약속 때문에 나갔다고 하잖아. 드레스까지 빌려서. 너를 그만큼 신경 쓰게 만들 사람이라고 하면 하나뿐인데, 걔는, 음… 바쁜 것 같았으니까….”
카일이 말끝을 얼버무렸다.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켈란의 이름을 꺼내는 대신 무릎에 이마를 세게 박았다. 이마가 아팠다. 마음은 더 아팠다.
“블로썸이 새로운 사고를 쳤어. 말려든 로슨 교수님이 다치는 바람에 상황이 심각해졌거든.”
로슨은 원소 마법 방어술 담당 교수였다. 마탑 출신 마법사들에게서 나타나곤 하는 성격적 결함을 빠짐없이 보유하여, 도무지 정을 붙이기 어려운 인물이었다(이를테면 그의 능력주의 교육은 작년에 원소 마법 방어술을 수강 인원 부족으로 폐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나는 우스꽝스러운 걸음 보조기에 매달린 로슨 교수를 상상하고 짧게 웃었다.
그러나 곧장 울적해졌다. 질리지도 않고 또, 블로썸에게 패배했다. 내가 켈란이었다면 로슨 교수의 발을 얼어붙게 만든 블로썸의 뒤처리를 하는 동안 적어도 한 번은 그리피스 전시관에서 자신을 기다릴 여자애를 의식할 것 같았다. 직접 움직이지 않더라도 부하나, 하다못해 날다람쥐를 보낼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하기는 주인공한테 난리가 벌어졌는데 배경 인물 따위를 신경 쓸까. 절로 비뚤어진 생각이 들었다. 블로썸은 내가 그녀를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내 입장에서는 엄연히 반대였다. 허벅지가 축축해졌다.
끝도 없이 땅을 파는 사이 카일은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브리나 엘리자베스에게 행선지를 정확히 밝힌 바가 없었다. 그리피스 전시관에 다다르기까지 카일이 얼마나 많은 골목길을 뒤지고 다녀야 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아무튼 확실한 건 그의 체온이 여느 때보다 높았다는 거다. 부드럽게 이끄는 힘에 의지해 일어나다가 좀 휘청거렸다. 격식 차리는 연회 때나 챙길 굽 높은 구두를 신었더니 적응이 덜 됐나 보았다.
내 발목과 무릎과 얼굴을 번갈아 보는 카일의 시선이 뾰족했다. 이어지는 말에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차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나 화났어, 아리엘 달튼. 꼴이 이게 뭐야?”
“영 별로야? 솔직히 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문제야. 알지도 못하면서.”
그가 벤치로 나를 데려가 앉혔다. 이윽고 거침없는 손놀림에 의해 구두가 벗겨졌다. 맨발이 찬 공기에 드러나자 좀 부끄러워졌다. 카일이 그것을 만지기 시작해서 더 그랬다.
상처 때문에 울긋불긋한 발을 쥐고 살피는 표정이 진지했다. 그가 손을 대는 어떤 부분은 쓰라렸고 어떤 부분은 찌릿하게 아렸다. 어디는 쓰라리지도 아리지도 않았다. 나도 모르게 오므라든 발가락을 펴며 주절거렸다.
“나는… 그냥… 바뀔지도 모르겠다고 느꼈어. 그러니까, 나름대로는, 근거도 충분했고….”
“응.”
“안 좋은 일도 있었으니까… 위로를 받으면 좋을 것 같았단 말이야.”
“유감이네.”
“진짜 싫었다고, 그 초상화… 막 이렇게 찌그러져 가지고… 그거 보고 나서 포크너가 나만 보면 웃어.”
“귀엽던데, 나는.”
“귀여워? 그게?”
“엄청.”
황당해서 눈물이 멎었다. 나는 긍정적인 편이었고 스스로에게 한없이 관대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의 꼬리에 얻어맞는 초상화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런 미친, 카일 다미앙 빌라드. 너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 거야.
“울지 마, 아리. 우는 건 내 몫이잖아. 너는 웃었으면 좋겠어.”
되게 다정한 목소리였다. 속절없이 훌쩍대다가 문득 드는 충동에 다리를 흔들었다. 곧 아담한 태슬 장식이 달린 구두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았다. 턱 아래를 간질이며 물어 오라고 말했더니 카일은 어처구니없어 하다 말고 그럴싸하게 짖었다. 크리스타 에드워즈가 얘한테 왜 반했는지 알 것 같았다.
기숙사로 돌아갈 적에, 내가 카일의 신발을 신고 그가 내 구두를 신었다. 우리의 발 크기가 많이 달랐으므로, 나는 깔끔한 가죽 장식이 달린 코인 로퍼를 질질 끌면서 갔다. 반면에 카일은 내 구두에 발끝을 겨우 넣었다. 까치발을 하고 어기적거리며 걷는 꼴이 웃겨서 참기가 힘들었다. 적어도 피니건 거리가 떠나가라 깔깔거리는 동안 나는 켈란을 떠올리지 않았다.
***
소문은 이례적으로 빨랐다. 브리아나–확성기-모슬리가 중간에 끼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하기는 다들 어렸을 때 동화책을 읽었을 테니, 선량하고 아름다운 공주님을 위협하는 마녀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사감과 거짓부렁이 듬뿍 담긴 신문이 발간되고 나흘이 채 지나지 않아 나는 피츠시몬스의 명실상부한 역적으로 자리매김했다.
아나이스와 인기를 양분하고 있는 블로썸을 건드렸으니만큼 어느 정도 각오를 했다. 하지만 복도를 지날 때마다 종이 뭉치 같은 걸 맞을 정도의 각오는 없었다.
적어도 씹던 캐러멜을 뱉어 낸 자식이 누군지는 알고 싶었는데, 슬프게도 내 뒤통수에는 눈이 없었으며 내 민첩성은 그것을 던진 순간을 포착하기에 충분치 않았다. 내가 돌아봤을 때는 이미 여러 명이 시시덕대는 중이었다.
하릴없이 모두에게 공평히 겨드랑이로 방귀가 나오게 하는 마법을 걸었다. 그건 방귀 마법 전문가인 이디스 빌라드가 힌리치로 돌아가기 전에 나에게 전수한 장난 주문이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었다. 학생회장 선거일이 금방이고, 졸업 시험도 있으니 열흘가량만 인내하면 사그라들 거였다. 어차피 교실에 있을 때는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카일은 나 이상으로 장난 주문에 뛰어났으며 에드가가 월시를 태우는 장면은 모두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제이든은, 그가 뭔가 위협적인 움직임을 보인 적은 물론 없었으나, 어쩐지 걔의 옆자리에 앉을 때 나는 여느 때보다 안전했다. 공략 대상들과 시간표를 맞춘 보람을 여기서 느낄 줄은 몰랐다.
솔직히, 좀 친해졌던 메건 클리블랜드나 몇몇 애들이 인사를 받아 주지 않았을 때는 충격이 컸다. 펼쳤던 손바닥을 도로 접어 벌레를 잡는 척해서 가까스로 비참하지 않을 수 있었다.
또한 브레넌은 그와 엘리자베스가 차지한 테이블에 내 식판이 자리하자 약간 움찔거렸다. 하지만 여자 친구가 발길질로 응징하니 얌전해졌다.
“죄다 주술에라도 걸린 것 같아. 사령술 운운은 너한테 하기 전에 에드워즈나 블로썸한테 했어야 했다고. 멍청한 애덤 월시.”
엘리자베스가 투덜거렸다. 나는 큰 동작으로 긍정했다. 주술 같은 효과가 나기는 할 거다. 켈란이 말한 대로, 이 세계는 로즈마리 블로썸을 위해 만들어졌으니까.
지지리도 질긴 고기완자를 씹으면서 켈란 생각을 조금 했다. 그리고 바로 지워 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에게는 서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해, 완전 삐졌다.
카일의 도움을 받아 기숙사로 돌아온 뒤에도 켈란으로부터 날다람쥐 한 마리 받지 못했다. 그는 콧대 높고 신경질적인 로슨 교수를 달래느라고 나와의 약속 같은 것은 깡그리 잊어버린 듯했다.
너무 납득이 안 되어서 최초의 추측대로 블로썸이나 케이틀린 대제가 꾸민 짓일 가능성을 가늠했다. 볼턴을 찾아가 바른대로 불라고 협박해 봤는데,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영원한 맹세용 트롤 깃펜을 들이댔음에도 말이다.
실은 아는 듯이 굴었어도 의심스러웠을 거다. 적어도 농담의 달 연회에서 날다람박쥐 집배원이 내게 전달한 쪽지는 켈란이 쓴 것이 확실했으니까.
믿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냥 알았다. 켈란은 그 쪽지와 티켓으로 내게 어떤 사실을 알리고자 했다. 아마도 근래의 끔찍하게 애매한 태도를 설명할 만한 무언가를.
만일 블로썸에게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래서 켈란이 그리피스 전시회에 왔다면, 들을 수 있었겠지. 어쩌면 기름에 갠 물감보다도 불투명한 그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지 몰랐다. 어쩌면 우리의 거리가 아주 가까워졌을 수도.
하지만 켈란은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발의 옆 날과 뒤꿈치에 까진 상처를 얻었다. 속이 들끓었다.
“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안 했다는 증거도 없고… 예상보다 반향이 너무 커.”
“블로썸이랑 나 사이에 역사가 깊었잖아.”
“그리고 그 역사도 크리스타 에드워즈가 쌓았지. 아리엘, 전에 걔가 왜 그러는지 알겠다고 했잖아. 어떻게 됐어?”
아나이스가 물었다.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저었다. 에드워즈와는 켈란 이상으로 잘되지 않았다. 그녀를 찾아가 대뜸 카일에게 마음이 있냐고 물었다가 문전박대당한 이래로 나는 에드워즈와 소통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사정을 모르는 카일이 언제나처럼 소꿉친구를 대신해 신문부 부실의 의자들에 자세 교정 마법을 걸자 상황은 더욱 지저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