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29화 (129/178)

‘죄송합니다, 공주님’이라는 제목이 붙은 블로썸의 초상화는 평소 그녀의 미모를 감안하면 용납하기 어려울 만큼 우스꽝스럽게 그려져 있었다.

더구나 내 초상화 밑에서는 간악한 아리엘 달튼의 흉계에 당한 청초하고 연약한 여자애처럼 블로썸을 묘사해 놓고, 정작 블로썸의 초상화에 딸린 기사로는 그녀가 주로 어울리는 학생회에 비해 하잘것없는 블로썸의 신분과, 근본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 어려운 평민 여자애가 꾸는 꿈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지에 대해 떠들어 대었던 것이다.

드워프를 땅딸보라 부르지 않듯이, 평민인 블로썸을 신분으로 조롱하기란 아무리 가짜 언론인이라고 해도 못 할 짓이었다. 그녀가 목 놓아 주장하는 취재 윤리-감당할 수 있는 대상에 한해서만 자극적인 기사를 쓴다는-에 명백히 위배되기도 했다. 악의가 느껴졌다.

“퍼셀과 같은 편이라면 켈란의 여자 친구를 두고 이렇게 서술할 리가 없잖아.”

“참… 종잡을 수가 없네요.”

켄드라가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목덜미를 주물렀다. 나도 그렇게 했다. 아무래도 농담의 달 연회 전후로 에드워즈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생긴 것만은 분명한데, 그로 인해 피해를 본 대상이 하필이면 나와 블로썸이라는 점이 이상했다.

재빨리 우리의 공통점을 되짚었다.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끝.

그리고 에드워즈와 사이가 나쁘다는 것. 근데 그건 실마리로 삼기에는 너무 미약했다. 크리스타 에드워즈는 정말로 모든 사람에게 엿같이 굴었으므로, 샐러맨더의 무지개 비늘에 맹세코 피츠시몬스에서 에드워즈를 저주용 제단에 올려 보지 않은 학생은 걔의 오른팔인 글렌 차베즈 말고는 없을 거였다.

찌그러진 빵 봉지처럼 생긴 갈색 머리 여자애가 말 꼬리에 얻어맞는 걸 하염없이 보던 와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엄청 예쁜 것도 아니었고, 자주 칠칠치 못하게 굴었다. 확실히 내게서 못난 순간을 포착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거다.

블로썸은 달랐다. 실물에서 크게 벗어나는 게 불가능한 마법 잉크로 로즈마리 블로썸을 욕보이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계속해서 같은 의문이 머리를 맴돌았다. 이건… 너무… 공을 들이지 않았나?

나나 블로썸이 농담의 달 연회에서 에드워즈에게 뭐라도 했던가를 돌이켜 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한 블로썸은 에드워즈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나는, 내가 에드워즈와 직접 접촉하지는 않았는데, 접촉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 사람과 블로썸은 불가피하게 얽혀 있고….

불현듯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이 떠올랐다. 아니, 말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글쎄….

크리스타 에드워즈에게도 실은 감정이라는 게 있었던 걸까? 마물이 득시글대는 숲에서 자기를 구해 준 상대에게 감사 편지 대신 청구서를 건네는 그 인성에도 일말의 물기가 남았을까? 어쩌면, 걔도, 말랑한 마음을 품을 수 있었던 걸까?

“있잖아. 알 것 같기도 해… 걔가 왜 그러는지.”

하지만 카일이 에드워즈를 광장의 중앙으로 이끌 때 그녀의 볼에는 분명히 홍조가 떠올랐다. 또 사랑에 빠진 여자애가 어디까지 어리석게 굴 수 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떻게든 해 볼게.”

만일 내가 짐작하는 이유로 에드워즈가 블로썸과 내게 박하게 구는 거라면, 적어도 이 문제에 있어서 나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카일은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이 세상에 많다고 했지만, 이번만은 아니었다.

해결해야 했다. 내 손으로. 반드시.

그대로 기숙사를 빠져나와 신문부실까지 갔다. 차베즈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질 않았으므로, 나는 신문부의 취재 부장을 만날 기회를 얻고자 늘어진 대기 줄에 합류해야 했다.

줄의 끄트머리를 가늠하며 걷는 동안 다양한 눈초리가 뒤통수에 꽂혀 왔다. 대다수가 호기심이었지만, 일부는 적의였다. ‘자기도 하위 귀족인 주제에’라고 말하는 최소 다섯 명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기분이 진짜 구렸다.

기다림이 무색하게도,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대면한 에드워즈는 내 추궁에 모르쇠로 일관했다. 터질 듯이 새빨간 얼굴과 그녀답지 않게 여유 없는 태도가 나로 하여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줄 뿐이었다.

***

이게 맞는 걸까? 평소보다 오래 씻고, 옷장을 연 뒤에 고민했다. 속고 있는 게 아닐까? 빨간 체크무늬를 대 봤다가, 잔꽃이 수놓인 노랑 리본을 쥐었다가, 마침내 옅은 파란색에 레이스가 달린 리본으로 머리를 묶으면서 생각했다.

함정이 분명해. 룸메이트의 화장품을 왕창 빌려 모조리 바른 뒤에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피니건 거리로 향하는 마법진에 올라 있었다.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 몰랐다.

호박과 송곳니와 뾰족모자와 함께 시월은 자취를 감추었다. 연회가 그 모든 농담을 태워 버리기라도 한 듯했다.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의 표정에도 웃음이 거의 없었다. 코가 되게 긴 구두를 신은 광대와 야바위꾼, 호객 행위를 하는 레스토랑의 직원들에게서나 가까스로 즐거움을 찾아볼 수 있었다.

요새는 낮에도 엄청 추웠다. 괜히 얇은 외투를 입었다 싶었다. 치맛단이 무릎을 겨우 가리는 드레스 또한 과한 감이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양말이라도 긴 거를 신을 것을. 역시 룸메이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케이크가 나왔다.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을 저주하며 몇 개의 골목을 굽이굽이 돌자 거대한 석조 건물이 보였다. 쇠기둥에 천막을 대충 걸쳐 만든 매표소에 내 키만 한 입간판이 서 있었다. 거기 쓰인 글씨를 무심코 되뇌었다. <윌리엄 그리피스 : 장난감들의 왕>….

드디어 미쳐 버린 게 아니라면, 그래서 뭐든 좋아하는 남자애와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니라면, 골 때리는 선물 교환식에서 내가 받은 쪽지 중 하나는 켈란이 쓴 것이 틀림없었다. <패치 노트> 덕분에 그의 손 글씨를 많이 접한 탓에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쪽지가 선사한 선물 역시 증거가 될 만했다. 하고 많은 전시회 중에 하필이면 윌리엄 그리피스라고? 켈란의 농담의 달 연회 분장 콘셉트가 아르네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와 비슷한 소름이 손톱 밑을 파고들어 왔다. 사실 피니건 거리로 내 발을 이끈 것은 강렬한 설렘보다 미약한 섬찟함에 가까웠다.

저변에는 희박한 기대감이 있었다. 켈란의 기억이 다시 조각나기 시작한 걸까? 붙었던 실이 다시 끊길 수도 있나? 아니면, 혹시, 처음부터 켈란의 버그는 고쳐지지 않았던 걸까? 카일처럼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거나, 혹은 다른 불가피한 이유로 내게 진실을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자꾸만 차오르는 호흡을 다스리기 위해 가슴을 꾹 눌렀다.

티켓에 적힌 입장 시간은 오후 일곱 시였다. 한 바퀴 돌고 저녁을 먹으면 딱이었다. 전시관으로 향하는 계단 근처를 서성이다가 매표소에서 근방의 지도가 그려진 팸플릿을 가지고 왔다. 나도 모르게 ‘연인에게 추천하는 분위기 좋은 맛집’ 카테고리를 살피다 끝내 구겨 버렸다. 켈란이나 누구한테 들킨다면 콱 죽고 싶을 거 같았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인고의 시간이었다. 매표소 입구에 내걸린 시계가 일곱 시에 가까워질수록 내면의 갈등이 커졌다. 나를 골탕 먹이려는, 아마도 블로썸이나 케이틀린 대제가 정교하게 놓은 덫일 리는 없을까? 볼턴은, 켈란의 글씨를 매일같이 볼 테니, 흉내를 내기는 어렵지 않을 듯했다. 바보처럼 한껏 꾸미고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는 내 모습을 구경하는 중이면 어떡하지?

한편으로는 여태껏 헷갈리게 굴었던 켈란의 말과 행동들을 계속 되새겼다. 만일 켈란의 연애 사업에 뭔가 다른 목적이 있다면, 그래서 냉담하게 밀치다가도 마지막 순간에는 기어코 끌어당기고 마는 거라면, 실은 유월의 키스를 기억하고 있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갈팡질팡 움직이던 발이 멎었다. 미련을 마주하는 방향이었다. 거기서 잠시 기다리자 시계의 분침이 북쪽을 가리켰다. 먼 곳에서는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났다. 속으로 울림을 세어 보았다. 하나, 둘, 셋, 심장이 너무 뛰어서 귀가 시끄러웠다. 넷, 다섯, 속이 마구 뒤집어졌다. 여섯, 일곱. 도망치고자 하는 충동이 격하게 일었다.

눈을 꼭 감았다가 떴는데, 맙소사, 아무 일도 안 벌어졌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으며 각자의 친구나 연인을 챙기기나 했다. 갓 떠오르는 태양보다 찬란한 금발과 금안은 어디에도 없었다. 살짝 멍해졌다.

켈란과 지각은 절대 나란히 놓을 만한 단어라고 할 수 없었다. 속았다 싶어진 찰나 열이 올랐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에는 공간 이동 마법진에서 전시관까지 가는 길이 제법 복잡했던 기억이 났다. 미아가 되는 것도 켈란과 그리 어울리지는 않았으나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분침이 북동쪽을 가리킬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일곱 시 십오 분이 넘자 걱정이 되었다. 온갖 나쁜 상상이 머리를 지배했다. 어떤 상황은 삼십 분을, 다른 상황은 한 시간은 기다리고도 남았다. 사십오 분이 되었을 때 매표소로 가서 약간의 수수료를 내고 여덟 시 티켓으로 바꿨다.

엘리자베스에게 빌린 드레스에 먼지를 묻히기 싫어서 계단이나 벤치에 앉지 않았다. 하지만 서 있은 지 한 시간 반이 지나니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배도 고파 왔다. 당장 돌아가면 아슬아슬하게 학생 식당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돌아가다가 켈란과 엇갈리면 어쩌지 하는 마음도 들었다.

우아한 필체로 단정하게 써 내린 글자. 손끝에 닿는 매끄러운 종이 표면에 얕게 감돌던 온기. 윌리엄 그리피스 전시회. 전부 내게는 신호처럼 보였다. 놓지 못할. 놓아선 안 되는. 쉼 없이 되뇌며 시간을 더 보냈다.

열 시가 되자 더 이상 표를 바꿀 수 없게 되었다. 아쉽지는 않았다. 전에 들렀을 때 나는 아기 그렘린 마니 탈을 쓴 직원보다 더욱 구석구석 전시관을 살폈다. 게다가 그때도 나의 동행인은 켈란이었다. 그가 각각의 전시물에 보였던 반응을 다 기억했다.

팔짱을 끼면서 팔뚝을 마구 문질렀다. 밤이 깊어짐에 따라 공기가 더욱 싸늘해졌다. 브리아나에게 통금 시간 이후 내 부재를 숨길 거짓말을 가르쳐 두길 잘했다고 느꼈다. 베개를 이불로 그럴 듯하게 덮어서 누운 사람 모양을 만드는 방법도. 똑똑이니까 알아서 잘할 거다.

발목이 완전 시렸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 대신 울어 주는 소꿉친구를 가진 터라 아기 때에도 운 기억이 별로 없는데 요새는 뭐만 하면 눈물이 나왔다. 사춘기도 갱년기도 아니면서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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