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를 오래도록 흘기다가 그만 눈이 시려졌다. 건틀릿을 벗고 내의 소매를 길게 빼어 눈을 비볐다. 눈꺼풀 안으로 볼턴과, 블로썸과, 켈란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마지막에는 스티아 신의 티아라가 아른거렸다. 금세 정신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는 욕을 다 하고 싶지만, 네게 쓸 시간이 아까우니 때려치울래. 티아라의 중앙에 박힌 사파이어 말인데. 평범한 보석이 아닌 것 같던데.”
“너 불사조 수정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아?”
내가 물은 것은 사파이어에 대해서인데, 영 딴소리가 돌아왔다. 만면에 물음표를 띄우자 볼턴은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짜증 나게 굴었다.
“험프리스 교수님께 보물 사냥꾼 하고 싶다고 했다며?”
“미친, 소름 끼쳐. 너 내 뒷조사하고 다니냐?”
“상관이 모든 학생의 미들네임을 외운다면 부하는 걔네 할아버지의 미들네임을 외워야 해.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헌신적인 척하기는.”
2학기 진로 상담은 지난주였고 그때 내 머릿속에는 성화에 잠긴 성물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상인이 아니라 보물 사냥꾼의 딸이었더라면 덜 막막했을까, 적당히 푸념했더니 험프리스 교수는 오 분가량 콧등을 주무르다가 몇몇 길드의 팸플릿을 꺼내 주었다.
내가 받았던 팸플릿에는 길드의 연혁과 길드 명의로 등록된 주요 보물들에 대한 설명, 길드가 바라는 인재상과 사무실의 위치 따위가 적혀 있었으나 불사조 수정의 탄생 설화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한껏 비아냥대자 볼턴은 볼을 붉히고 안경을 치켜 올렸다.
“세간의 인식처럼 불사조는 ‘죽지 않는’ 마물이 아냐. ‘죽었다가 살아나는’ 마물이지. 죽음을 감지했을 때, 불사조는 스스로의 영혼을 잘게 찢어서 땅에 가둬. 그리고 언젠가 그것들을 모아 되살아나지. 불사조 수정은 땅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불사조의 영혼이 결정을 이룬 결과물이야.”
“그런 걸 막 캐내도 되는 거야? 그러니까, 네 말대로 불사조의 수정이 불사조의 영혼석이라면, 영혼의 조각이 빠져도 불사조는 되살아날 수 있는 거야?”
“안 되지. 만일 어떤 불사조 수정이 보석으로 가공되었다면, 거기 갇힌 영혼의 주인은 되살아날 수 없어. 슬픈 일이지. 불사조인데.”
“끔찍해!”
“어쩌겠어. 마물 따위가 어찌 되건 목에 예쁜 보석을 걸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고, 그런 사람에게 불사조 수정을 비싼 값에 팔고 싶은 사람도 많고. 기껏해야 채굴 규제 법안이나 만들고 마는 거지.”
잠깐의 침묵 뒤에 볼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불사조 수정에서 착안해, 뛰어난 보석 세공사들은 빛을 담고 있는 보석이 실은 영혼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어. 나아가 최고급 품질의 보석에는 후가공하여 영혼을 담을 수 있다는 것도.”
“불사조 수정이 불사조의 영혼을 담고 있다면, 스티아 신의 티아라는….”
“일레스티아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지.”
입이 떡 벌어졌다. 주먹만 한 사파이어 외에는 특별할 것이 전혀 없는 티아라가 황가 대대로 간직되어 온 데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걸 가지고 내기를 하자는 둥 뻔뻔스레 요구했으니, 케이틀린 대제가 열받은 것도 어찌 보면 이해가 되었다.
문득 여느 때보다 로즈마리 블로썸이 굉장하게 느껴졌다. 고작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받기에는 너무 대단한 물건이었다. 즉시 켈란 일레스티아에게도 감탄했다. 크루아상보다 겹겹이 쌓인 벽에 갇힌 듯 느껴지는 그의 마음이 황실의 보물을 냅다 바칠 만큼 달구어지리라는 상상은 잘 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애초 블로썸을 위해 이 세계와 공략 대상, 그리고 증표가 존재함을 따지면 영혼이 담긴 아티팩트쯤은 되어야 수지가 맞겠다 싶기도 했다. 비뚤어진 생각을 속으로 뇌까리는 동안에도 볼턴은 계속 떠들었다. 체면을 차리거나 멋진 척할 필요 없는 상대와 간만에 대화하다 보니 신이 난 모양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성녀 에이레네는 내 먼 조상이야. 증조할아버지의 고조할머니쯤 되겠네.”
“전혀 몰랐는데.”
“너 진짜 나한테는 관심이 조금도 없구나….”
볼턴이 허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는 힘차게 긍정했다. 당장에 볼턴 공작가의 깃발에 에이레네가 그려져 있음에도, 정작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만 파고들어 보면 당연한 건데도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우리 가문에도 전해져 내려오는 보물이 있어.”
“묵주?”
“그건 또 아네.”
“너한테 관심 있어서 아는 건 아니니까 걱정 마. 지금 맥락에서 네가 그걸 언급하니까 묻는 건데, 설마 에이레네의 묵주에도 에이레네의 영혼이 담겨 있는 거야?”
원하던 답을 듣자마자, 나는 백과사전의 신분을 다시 열쇠로 격하시킨 뒤 그를 비밀의 방에서 쫓아냈다. 그런 다음에는 가방 깊숙이서 회중시계와 펜던트, 그리고 귀걸이를 꺼냈다.
회중시계의 겉면에 음각된 늑대의 눈에는 손톱보다도 작은 에메랄드가 박혀 있었다. 불에 비추어 보니 거기에도 빛이 일렁거렸다. 볼턴의 말대로 빛을 내포한 보석에 영혼이 들어 있다면, 이건 다미앙 할아버지의 영혼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다소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다음으로 펜던트를 살폈다. 여태껏 제이든의 우는 얼굴이 겹쳐지는 통에 자세히 들여다본 바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홍색으로 번쩍이는 용의 비늘 속에서도 자그마한 빛이 돌아다녔다. 나는 그것이 이그나스의 영혼임을 직감했다.
마지막으로 로즈마리 왕비의 귀걸이를 보았다. 귓불을 늘어뜨릴 정도로 묵직한 루비 가운데 얼핏 스쳐서는 알아채기 힘들 만큼 희미한 운동감이 있었다. 그것은 다른 영혼만큼 부드럽게 흐르지 않았으며 심장 박동처럼 일정한 주기로 이리저리 튀곤 했다.
나는 회중시계와 펜던트를 가방에 도로 집어넣었다. 귀걸이는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검지부터 소지까지 천천히 구부리자 로즈마리 왕비의 영혼이 시야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이쯤이면 모든 증표가 실은 영혼석으로 장식된 아티팩트임은 분명한 듯했으나, 마냥 납득하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스티아 신. 죽었다고 하기는 뭐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인물임은 확신했다. 근래 대륙에 창궐한 일부 사교가 신의 그릇이네 대리인이네 환생이네 하는 작자들을 모시는 것과 별개로 말이다. 다미앙 할아버지. 관에 흙이 덮이는 것까지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 성녀 에이레네. 고룡 이그나스. 확실히 죽었다.
하지만 로즈마리 왕비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불사조처럼 죽었다가 되살아날 것도 아니고, 그녀가 멀쩡한 영혼을 쪼개 보석에 담을 이유는 단연코 없었다.
에드가는 로즈마리 왕비의 영혼이 담긴 이 루비 귀걸이가 그녀가 가장 아끼던 것이고, 지금보다 덜 미쳤을 때 그와 형제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말했다. 위화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뭔가 단단히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
올해 농담의 달 연회는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다. 카일은 내가 딱 하루만이라도 근심을 잊고 보내길 바랐지만, 새로이 발목에 매달린 의문점들은 언제나처럼 무겁고 두려워서 내 기분을 띄우지 못했다.
그토록 열망하던 ‘최고의 농담’ 트로피를 손에 넣은 순간에도 나는 기쁨보다 착잡함을 더욱 느꼈다. 축하의 말을 건네는 친구들을 향해 억지로 명랑한 목소리를 꾸며 내느라고 기력을 다 썼다.
마구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말을 묶은 나무를 찾았을 때, 몇 시간이나 방치한 탓에 열 받은 눈토끼가 휘두르는 꼬리를 피하지 못한 것도 그래서였다. 하필이면 그 장면이 신문에 박제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주의했을 텐데.
오늘 자 신문을 테이블에 펼쳐 놓고 둘러앉은 켄드라 브래들리 긴급 선대위 위원들의 낯빛에 침통한 기운이 가시질 않았다. 감히 농담의 달 연회 최고의 순간으로 꼽힌 ‘말 꼬리에 뭉개진 입꼬리’를 눈에 담은 포크너만이 실룩대는 입술을 부여잡을 뿐이었다. 웃기면 웃으라고 힘없이 말하자 작은 방이 깔깔대는 소리로 꽉 찼다.
아나이스와 켄드라는 웃지 않았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사뭇 엄숙했다. 아마도 크리스타 에드워즈가 내 초상화에 덧붙인 문장 때문인 듯했다. ‘나돈의 쌍둥이를 잇는 피츠시몬스의 난봉꾼’ ‘친근한 태도로 위장한 이면에는 악랄한 음모와 저열한 질투가’ ‘메두사가 돌로 만든 것은 뭇 남성들의 심장이었다’ ‘백마의 편자 아래 짓밟힌 평민 공주님의 드레스 자락’….
그것들이 주장하는 바는 명백했다. 로즈마리 블로썸에 대한 공격의 배후로 나를 지목한 것이다. 학생회 애들 중 아무나 붙잡고 신분 상승을 노리려다 실패한 뒤, 더 낮은 신분임에도 학생회의 사랑을 받는 블로썸을 질투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최근에 내가 블로썸을 위협하고 메이나드의 걸음 보조기에 욕설을 남기다가 켈란에게 저지당한 사실을 덧붙이자, 얼핏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솔직히 억울했다. ‘금붕어 똥’은 욕설도 아니었고 나는 그 단어를 끝까지 쓰지도 못했다).
술술 읽히는 소설이기는 했다. 남의 치정에 아주 미쳐 버린 에드워즈가 쓸 법한. 이를 득득 갈았다. 여느 때 같았으면 에드워즈가 또 ‘에드워즈’ 했다고 코웃음이나 쳤겠으나 학생회장 선거가 보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켄드라의 선거 도우미로서 최전방에서 활동하는 나의 부정은 머지않아 켄드라의 부정이 될 거였다.
“나는 블로썸 안 괴롭혔어. 교복을 망치지도 않았고, 교재를 찢지도 않았어. 당연히, 협박 편지를 쓴 것도 내가 아니야. 증거는 없지만….”
“그럴 줄 알았어. 다 죽여 버릴 거예요. 다 죽이고, 저도 죽을 거예요….”
“진정해, 미아…. 선배가 누구인지 아니까 증거는 필요 없어요. 저희한테는요. 하지만 모두가 납득해 주지는 않겠죠. 혹시 신문부가 퍼셀에게 붙은 걸까요?”
“음, 아니. 그건 아니라고 봐.”
아나이스의 손가락이 다른 기사의 일부분을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