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27화 (127/178)

“켈란과는 유브리아프스를 두고 꽤 만족스러운 거래를 했어. 일레스티아는 유브리아프스와 나돈이 합쳐지길 바라지 않으니 발레리가 왕위에 오르는 걸 어떻게든 저지하려 들 거야. 우리는 모건만 신경 쓰면 돼.”

“맹세할게, 에드. 모건은 우리가 죽일 마지막 형제가 될 거야.”

“브라이스….”

원하는 바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가에게는 여전히 불안스럽거나 불만스러운 부분이 있는 듯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짙게 깔린 어둠과 구름에 조각난 달 뿐이었으므로 나는 소리로만 에드가의 감정을 파악해야 했는데, 그래서인지 도통 종잡기가 어려웠다.

“알아. 내가 너에게 이래라저래라할 주제가 되지 못한다는 거.”

곧 에드가의 기세가 매우 흉흉해졌다. 마치 혀 대신 잘 벼려진 칼날을 달고 말 대신 바늘을 쏟아 내는 듯했다. 발걸음은 훨씬 분주해졌으며 마나의 흐름은 둔중하면서도 난폭했다. 그가 얼핏 자조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비꼬는 것에 가까운 말투로 지껄였다.

“너를 이 진창에 처박은 게 나잖아.”

형제가 과격하게 굴면 굴수록 나돈은 더욱 차분해졌다. 마지막 소음으로부터 약간의 간격을 두고, 그가 다짐하듯 대꾸했다.

“하지만 선택은 내가 했어. 스펜서 저택을 ‘브라이스’로서 떠나기로 결심한 건 나였다고. 그러니까….”

“씨발, 브라이스! 차라리 욕을 해!”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이 끊겼다고 느낀 순간 돌풍과도 같은 마나가 얼굴을 마구 때렸다.

“차라리 내 턱을 날리고, 배를 걷어차고, 목을 꺾으라고! 빌어 처먹을 ‘선택’ 운운하지 말고! 너를 왕자로 만든 건 너 자신도, 제이든 스펜서도 아니고 나였어!”

미친 듯이 날뛰며 악 지르는 에드가는 내게 공포감과 우울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나는 불현듯 아주 슬퍼져서 코를 찡긋거렸다.

“만약 내가 충분히 강했더라면, 그래서 궁에서 도망치지 않았다면, 하다못해 그 발코니에서 벌벌 떨지 않았더라면! 너는 훨씬 행복할 수 있었을 거야. 에드가 막시밀리아노 라모스로서.”

찰나 착각한 줄 알았다. 부릅뜬 눈이 견딜 수 없이 시릴 때까지 곱씹어 봤는데 제대로 들은 게 맞았다. 경악이 전신을 관통했다. 온몸의 털이 솟는 기분이었다.

“그걸 다 망쳐 버린 주제에, 그런 주제에 나는 지금 네게 주어진 시한부 자유마저 빼앗고 네 팔과 다리를 왕좌에 묶으려고 하고 있지. 순전히 내 이기심으로.”

“…….”

“대체 왜 원망하지 않는 거야….”

숫제 울먹이기 시작한 에드가의 주변에서 풀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나돈이 방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심장은 목구멍에서 뛰었다. 어찌나 난리인지 숨이라도 뱉으면 바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손끝과 발끝은 얼어붙었으며 감당하기 버거운 진실에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러니까, 모두가 아는 ‘브라이스 나돈’이 실은 ‘에드가 라모스’고, ‘에드가 라모스’가 ‘브라이스 나돈’이라고?

두 사람이 가끔 서로의 흉내를 내는 것과는 별개로, 아주 오래전부터 뒤바뀌어 있었단 말이야?

그렇게 된 원인은 당시 브라이스였던 에드가가 제공했고, 과정엔 제이든 스펜서가 얽혀 있고?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머리가 지끈거려 오기에 눈을 꼭 감았더니 다른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다. 모든 소리가 또렷이 귀에 꽂혔다. 에드가의 흐느낌도, 나돈의 잔뜩 억눌린 중얼거림도, 거기에 섞인 체념도.

“지난 일이야, 형. 다 지난 일이라고….”

***

내 몸뚱어리를 속박한 마나 덩어리는 쌍둥이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두어졌다. 나는 다리를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즉시 광장으로 향했다. 머릿속에 너무 많은 상념이 휘몰아쳐서, 그것들을 전부 꺼냈다가 차곡차곡 담는 과정이 필요했다.

복면과 가짜 머리통을 눈토끼의 안장에 얹은 뒤에는 마르퀴즈 볼턴을 찾았다. 다들 선물에 혈안이 되어 있어서, 그와 함께 케이틀린 대제의 비밀의 방까지 가는 동안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볼턴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는,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건지, 멱살을 잡혀 질질 끌려가면서도 되게 기뻐 보였던 것이다. 내가 마도구 제작 실습실에 그를 팽개치자 볼턴은 이대로 화해 못 하고 졸업하는 줄만 알았다고 호들갑을 떨어 댔다.

화해고 나발이고 꿈도 꾸지 말고 열쇠면 열쇠답게 문이나 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볼턴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아니’ ‘나는’ ‘그게’ 같은 단어들을 웅얼거리며 안경을 닦는 손놀림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다소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고개를 젓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의 충심이 케이틀린 대제에게 있는 한 볼턴을 가까이 두기란 어불성설이었다.

어지간히 모질게 군 것이 아닌데, 볼턴은 쭈뼛거리면서도 나를 졸졸 따라왔다. 부탁이니 제발 꺼져 달라고 지랄을 할까 싶다가도, 그에게 기력을 쏟고 싶지 않아서 내버려 두었다. 하여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나는 볼턴과 횃대를 마주하고 나란히 앉아 함께 멍을 때리는 꼴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까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또 있었다. 나는 일렁이는 불길 속에서 용케도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티아라를 집중해서 봤다. 보기보다 뜨겁지 않나? 성물인 만큼 뭔가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 있는 걸까? 궁금증을 참지 못해 묻자 볼턴은 약간 뽐내듯이 후자라고 알려 주었다.

재수 털리긴 하는데 도움은 되었다. 기왕 이렇게 된 이상 써먹을 건 써먹어도 괜찮을 듯했다. 나는 몸을 반 정도 돌려 완전히 볼턴 쪽으로 앉았다. 열쇠에서 백과사전으로 신분을 격상시켜 주겠노라고 말하니 은근 좋아하기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성화를 꺼뜨릴 방법은 정말 없어?”

“내가 아는 한은. 그보다 너, 왜 하필 황실의 보물을 원하는 거야? 탐욕스러운 줄은 알았지만 주제 파악이 안 된다는 인상은 못 받았는데.”

“네 알 바 아냐. 그리고 또 두들겨 맞기 싫으면 단어 똑바로 골라라.”

음산하게 지껄이며 영원한 맹세용 트롤 깃펜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볼턴이 무심코 엉덩이를 가리는 시늉을 했다. 당시의 고통이 뇌리에 강렬하게 남은 듯하니 다행이었다.

코로 웃던 와중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평범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절로 이가 악물렸다.

“너는 케이틀린 대제가 자기 아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었어.”

언젠가 볼턴은 내게 ‘그분’을 이기지 못할 거라며, 켈란을 포기하라고 했다. 말인즉슨 켈란을 향한 음모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금지된 마법 약이 얼마나 은밀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물건인지를 고려하고, 주술을 몸에 새길 정도로 케이틀린 대제에게 종속적인 볼턴의 입장을 고려했을 때, 어쩌면 대제의 지시로 켈란에게 묘약을 먹인 장본인은 볼턴일지도 몰랐다.

내 추궁에 볼턴은 대충 얼버무리다가 고개를 떨궜다. 화가 나서 욕을 퍼부으려다가 일단 참았다.

“대체 언제부터 대제의 사람이었던 거야? 너희 가문은 원래 황실 쪽이 아니라며.”

지금으로부터 대충 삼십여 년 전, 다수의 전투에서 역사서를 반쯤 메울 활약을 남긴 케이틀린 황녀는 스스로가 준비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보물을 등에 진 코끼리 열두 마리와 물소 스물네 마리, 노새 마흔여덟 마리와 말 아흔여섯 필을 이끌고 나고 자란 곳으로 돌아왔는데, 선두를 달리는 백마의 뒤로 야만인 포로가 어찌나 많은지 성문서부터 왕궁까지 기다란 줄이 생길 정도였다.

당시 히스론드 대교구를 등에 업은 오브라이언 공작가와 성녀 에이레네를 상징으로 내세운 볼턴 공작가는 제후국의 지배자를 자처하는 어중이떠중이를 제외하면 가장 강한 힘을 지닌 귀족이었다. 황실과 가장 맹렬히 대립하는 귀족이기도 했다. 그들의 위세가 하도 강해서 황제는 정부 한 사람 마음대로 두지 못했다.

투병 중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셉터를 쥔 황녀가 야만인 포로를 올리던 처형대에 겸사겸사 다른 것들을 올리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대신전과 귀족 세력의 와해는 갑자기 빛에 노출된 벌레 떼보다 빨랐다. 뒤늦게 늙고 병든 황제의 침실에 갖은 여인을 들여보내며 황녀 외의 정통성을 간절히 찾던 귀족들은 익숙한 모가지가 저잣거리에 내걸리자 전의를 잃었다.

다 죽어 가는 황제의 명줄을 어떻게든 붙여 놓기란 교황청에서 떠올릴 법한 발악이었다. 그마저도 두 달을 견디지 못했다. 스티아의 가호가 어디에 있는지는 명확했다(물론 지금은 그것이 스티아의 가호 따위가 아님을 안다). 비로소 훗날 대제라 불릴 철권 황제의 탄생이었다.

아무튼 그랬다. 케이틀린 대제가 황녀일 적에 볼턴 공작가는 황실의 반대편에 있었다. 그녀가 황제가 되었을 때도, 대제가 되고 황자를 낳았을 때도, 고개는 조금 수그릴지언정 발끝을 둔 방향은 여전했다.

마르퀴즈 볼턴이 황태자의 부관이 된 까닭은 오로지 켈란과 친해서였다. 점차 커져만 가는 케이틀린 대제의 힘을 버거이 여기던 볼턴 공작에게는 좋은 핑곗거리가 생긴 셈이었다. 막내딸의 이름을 케이틀린이라 짓게 됨이란 그로 말미암은 일이었다.

엄밀히는 켈란과의 친분과 볼턴의 능력 때문이었지만 인정하기 싫어서 반만 쳐 줬다. 그러자 볼턴은 저열하게 웃으며 애당초 그 친분이 어떻게 쌓인 거 같냐고 되물었다. 열불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배신자. 기만자. 켈란은 너를 믿고 있는데. 네가 아주 충성스럽다고 했는데.”

“…….”

“블로썸을 사랑한다며. 진짜 밸도 없냐? 네 손으로 더러운 수작까지 써서 다른 남자랑 이어 줄 만큼?”

“로즈가 바랐으니까.”

로즈마리 블로썸의 애칭을 입에 담을 때 볼턴은 나를 똑바로 봤다. 색 바랜 푸른 눈에 못 다 버린 감정의 찌꺼기가 침전되어 있었다.

“간단한 이야기야. 로즈는 내가 아닌 켈란 전하의 연인이 되길 바랐고, 나는 로즈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어. 폐하께서 지시하지 않았더라도… 똑같은 짓을 했을 거야.”

“켈란이 가여워. 너는 머저리고.”

“동감이야.”

볼턴이 시원스럽게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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