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26화 (126/178)

밤이 무르익자 다들 골 때리는 선물들을 찾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적어도 날다람박쥐가 전해 준 쪽지에 적힌 선물만은 스스로 수거해야 했기 때문이다. 환영 마법을 유지하고자 마나를 계속해서 쓴 끝에 엄청나게 지쳐 버린 나라고 해도 예외는 없었다. 나는 흐느적거리며 발을 옮겼다. 눈토끼를 타는 방법도 고려해 봤으나, 그쪽이 더 힘을 뺄 거 같아서 말았다.

원래 내 손아귀에 떨어져야 하는 쪽지의 개수는 하나였다. 나는 제이든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선물을 줄 계획이 없었고, 받을 계획도 없었다. 골 때리는 선물 교환식은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장난을 위한 행사여서, 연인 사이가 아닌 이상 선물을 교환하고 안 하고가 친분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이든의 선물을 찾아 적어도 칠십 그루는 되는 정원수 근처를 기웃대는 내게, 무려 두 마리의 날다람박쥐가 더 날아왔다. 카일은 켄드라에게 보냈고, 켄드라는 미아와, 브리아나는 켈리와, 아나이스는 포크너와 주고받는다고 했다. 정다운 사랑앵무 한 쌍은 용의선상에 올릴 가치도 없었다.

잠시간 에드가를 떠올렸으나, 그가 일찌감치 선약이 잡힌 제이든을 제외한 학생회는 학생회끼리 교환하기로 했다며 투덜대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학생회를 모조리 뺐더니 남은 사람이 없었다.

나는 나뭇가지로 땅을 파다 말고 사뭇 심각해졌다. 세 개의 선물을 전부 찾는 게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여섯 번째 아리엘이 된 후에 나는 여러 음모의 대상이 되고 있어서, 어쩌면 이것 또한 나를 골탕 먹이거나 심한 꼴로 만들고자 그리는 큰 그림의 일부분일지도 몰랐다.

물론 볼턴이 위험한 물건은 미리 걸렀다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최근에 내게 제일 큰 위험을 선사한 게 바로 볼턴이었다.

마나를 쓰는 동시에 몸도 쓰고, 더불어 머리까지 쓰다 보니 탈진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서른여덟 번째 정원수 밑에서 자그마한 상자를 발견하고 나서, 나는 남은 마나를 진짜 쥐어짜서 투명 복면을 거대하게 만들었다. 덤불과 덤불 사이에 발라당 눕고 나서 그걸 덮으니까 가장 뛰어난 암살자보다도 은밀해졌다.

누운 채로 꼼질거리며, 스펜서 공작가의 인장이 정직하게 박힌 상자를 깠다. 아니나 다를까, <멋쟁이 교수들> 달력처럼 쓸모라고는 먹고 죽으려 해도 없을뿐더러 끔찍하기만 한 무언가를 선물하기에 지나치게 착한 제이든은 나를 위해 깔끔한 디자인의 반지를 샀다. 자세히 보니 그건 내가 블로썸의 생일 선물로 제이든에게 추천한 것이었다.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그걸 고르는 동안 내가 탐 난다는 티를 많이 내기는 했다. 득달같이 손가락에 끼운 뒤에 달빛에 비추어 보며 돌리니 평범한 고리에서 나사, 나사에서 참이 달린 모양으로 바뀌었다. 깜찍한 제이든 스펜서. 섬세하기는. 한참 낄낄거린 다음에 소매 안쪽에서 쪽지 세 장을 꺼내었다.

종이가 뚫리도록 눌러 쓴 제이든의 글씨는 비교적 알아보기 쉬운 편에 속했다. 나머지 두 장 중 하나는 누가 썼는지 감조차 오질 않았고, 하나는 절대 아닐 것 같은 사람과 글씨가 비슷했다. 후자에 쓰여 있는 대로 도넛이 놓인 테이블의 아랫면을 더듬자 한 뼘 반 정도 길이의 종이봉투가 나왔다. 안에는 전시회 티켓이 들어 있었다. <윌리엄 그리피스 : 장난감들의 왕>….

입 안의 살을 잘근잘근 씹으며 다양한 가능성을 꼽아 가던 와중이었다. 별안간 거대한 마나의 파도가 전신을 훑는 느낌이 났다. 출입국 관리청에서 기차를 타고 국경을 지날 때의 감각과 비슷했다. 머리 꼭대기부터 발뒤꿈치까지 저릿하게 눌리는 기분에 가만히 있자니 멀지 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마지막이야.”

남자의 목소리였다. 내던지듯 하는 말투와 살짝 늘어진 말꼬리. 이윽고 따라붙는 침음은 먼저 말한 목소리와 거의 같았다. 잠시 혼잣말을 하나 싶었지만 금세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판단이 맞는다면 에드가 라모스와 그의 형제가 대화 중인 듯했다.

그렇다면 내 몸뚱어리를 압박하는 마나 덩어리가 무엇인지도 짐작이 되었다. 불청객을 감지하기 위한 결계가 틀림없었다. 하기는 한참 계승 전쟁 중인 나돈의 왕자와 전 왕자의 밀담에 끼어들어도 되는 쥐새끼는 피츠시몬스에 없다고 봐도 되었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내 존재가 들통나지 않은 점이 의아했다. 환영 마법과 가속 마법으로 마나가 완전히 고갈된 탓일까. 속박되다시피 하여 눈만 굴려 쳐다본 상태 창에는 잔여 마나량이 0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뭐가 어찌 되었건 섣불리 움직이기 어려웠다. 늦지 않은 시점에 발을 빼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가도, 공략 대상인 두 사람의 대화니만큼 게임과 관련된 중요한 무언가를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퍽 망설여졌다.

“네 마음은 알아… 나도 같은 입장이니까. 하지만 더는 기회가 없어. 모건이 돌아와서 발레리를 제압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끼어들 틈은 없을 거라고.”

당연하게도, 두 갈래의 치명적인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는 중이라고 해서 시간이 나를 기다려 주지는 않았다. ‘모건’과 ‘발레리’가 신문을 통해 스치듯 접한 에드가의 누나들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자 실수했다고 직감했다. 그들의 화제가 블로썸이나 학생회가 아니라 계승 전쟁이라면 결코 밀루아 자작가 영애가 귀에 담아서는 안 되었다.

뒷북이라도 쳐 보려 하였으나 잘되지 않았다. 어깨와 팔꿈치, 무릎과 발목, 손가락과 발가락의 마디마다 무게감이 느껴졌다. 젖 먹던 힘까지 쓰면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들키기라도 하면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에드가가 내게 가진 호감이 그와 형제와 어머니의 신변을 위협할 정도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로즈마리 왕비의 귀걸이를 건네러 내 방에 찾아온 날에도 그는 등에 새겨진 금주를 언급하자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절대 들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최대한 고요하게 호흡했다.

“이 빌어먹을 전쟁은 끝나야만 해. 그리고 칼과 창과 마나가 전부 거두어지는 순간 네가 있을 자리는 여기가 아니지.”

이어지는 말은 나로 하여금 화자의 정체를 추리해 내기 용이하게 했다. 아무래도 계속해서 말하는 쪽이 에드가이고, 듣고만 있는 쪽이 나돈인 듯했다.

매년 졸업 시험 이후에 쌍둥이가 꾸준히 자리를 비웠다가 졸업 연회에나 나타났던 게 떠올랐다. 전쟁 때문이었구나. 소리 죽여 숨을 들이켰다. 제이든 스펜서가 실은 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그보다 놀랄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냥, 졸업 시험도 봤겠다, 아카데미에서 허송세월하기 싫어서인 줄만 알았다. 그때엔 내 안에서 쌍둥이의 인상이 그다지 견실하지 않아서 그랬다. 나돈의 내전과 관련된 정보가 철저히 내부에서만 공유된 탓이기도 했다. 하기는 따지자면 집안 싸움인데 굳이 동네방네 중계하는 것도 웃겼다.

곰곰이 돌이켜 보면, 브라이스 나돈의 블로썸을 향한 순정은 마르퀴즈 볼턴에 비견할 만했다. 그가 사랑하는 블로썸의 곁을 잠깐이나마 떠날 만큼 중대한 사항이 많지는 않았다. 나는 느리게 침을 삼키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발소리가 어지럽게 났다. 에드가의 말투가 격앙되기 시작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흥분하여 이리저리 움직이는 중인 모양이었다.

“어머니를 생각해, 브라이스. 그리고 나를!”

“에드.”

“이렇게 말하게 돼서 유감이지만, 나는 더 이상 내 손에 형제의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

에드가의 목소리는 너무나 쓸쓸하게 들려서 나의 뇌리 구석에서 어떤 장면을 끄집어냈다. 그와 함께 마법 인형의 잔해를 뒤적이던 순간 말이다. 마나 서명을 조작할 수 없냐고 묻던 에드가의 눈에서 일말의 희망을 목격한 기억이 났다. 그의 형제를 해하려고 했던 사람이 그의 다른 형제가 아니길 바라는 희망.

“그랬다간… 걔 앞에서 떳떳하지 못할 것 같아.”

하지만 브라이스 나돈이 생일 연회에서 크게 다쳤다는 기사에는 손위 형제 도날드의 부고도 함께 실려 있었다. 비교적 세가 작은 왕자였으므로 그의 죽음은 동생의 부상보다 조그마한 글씨로 조용히 알려졌다.

지력 2의 명탐정에게도 도날드, 즉 ‘도니’가 마법 인형을 통한 시도의 처참한 실패에서 전혀 배우지 못했음을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신문에 실린 도날드 나돈의 초상화와 솟구치는 불기둥에 휩쓸린 채 비명을 지르던 월시를 차례로 떠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의식적으로 무엇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넌 어렸을 때부터 마음이 약했어. 덕분에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시종일관 나를 짓누르는 마나 덩어리보다 무거운 침묵 끝에, 나돈이 입을 열었다. 그가 침착하게 말하는 동안 에드가는 줄곧 격렬하게 호흡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금세 둘을 구분 지었다.

“좋아. 시험만 마치고 떠나자.”

나돈이 나를 커피 하우스에 데려가 구스타보의 노래를 들려준 날에 나는 쌍둥이와 로즈마리 왕비 간에 처절한 까닭에 더욱 견고한 유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에드가가 형제를 대신하여 만티코어의 발톱에 몸을 내던지는 동안 나돈도 형제를 위해 그가 열망하는 것들을 포기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글쎄… 유례없이 다정한 나돈의 말투에서 나는 무시하기 어려운 위화감을 감지했다. 아무래도 서로를 지독히 애틋하게 여기는 두 사람 역시도 쉬이 짐작하기 어려운 비밀을 끌어안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제이든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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