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의 이동에 따라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 하는 카일의 목소리는 높이 부는 가을의 바람처럼 선선해서 도리어 진정성 있게 다가왔다. 신기할 정도로 금방 부대끼던 속이 가라앉았다.
바로 다음에 동선이 겹칠 때, 카일은 그가 쓰고 있던 멋진 모자를 벗어 내 품에 안긴 머리통에 씌웠다. 아우성치는 모형 뱀들 아래의 눈매와 입매가 사뭇 부드러워졌다. 단언컨대 내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 소꿉친구가 택하는 방법은 실패한 역사가 없었다. 나는 일부러 뻔뻔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네 조언을 수용하도록 할게. 적어도 오늘 나는 게임의 등장인물인 아리엘 달튼이 아니라 목 없는 메두사 기사니까.”
“목 없는 메두사 악마 사냥꾼이겠지.”
너스레를 떠는 카일의 정강이를 장난삼아 걷어찼다. 그랬더니 카일은 춤 동작을 과장해서 하면서 팔꿈치로 내 등을 눌러 댔다. 손아귀에 각자의 멱살이 쥐일 때쯤 음악이 바뀌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이끌어 춤판을 벗어났다.
“브래들리 봤어? 아주 작정한 것 같더라.”
“어땠길래?”
“제단을 지고 와서 미아 페터슨을 바치던데.”
“아, 켄드라 브래들리. 걔는 진짜 천재라니까.”
마냥 단단해 보이던 켄드라에게도 무른 구석이 있었다. 퍼셀이 신화시대의 패륜아를 언급하며 켄드라를 조롱했을 때 그녀가 지었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런데 바로 그 ‘엠마 피오렐리’로 분장하다니. 나로서는 흉내조차 내기 힘든 모험심이었다.
아마도 그게 켄드라 브래들리가 싸우는 방식인가 보았다. 나는 그녀가 자랑스러운 반면 최고의 농담 트로피를 노리는 경쟁자가 늘어났다는 사실에 통탄을 금치 못했다. 여태껏 마베릭과 이디스, 코넬리아가 전부 졸업한 피츠시몬스에서 내 적수라고는 카일뿐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말했더니 카일은 애초에 조악하지 않은 가짜 팔을 두 쌍이나 제작할 만큼 엘리자베스를 부유하게 만들고, 험프리스 교수의 아이디어를 훔쳐 퍼셀을 열 받게 만든 장본인이 누구인지를 돌이켜 보라며 꼬집었다. 받아칠 거리가 없어져서 간식 테이블로 갔다.
암만 기막힌 환영 마법을 걸어도 나무토막으로 만든 머리통이 다쿠아즈를 삼키게 만들지는 못했다. 나는 판금 갑옷의 커다란 관절 보호대에 간식거리를 쟁이며 카일과 계속 어울렸다. 마침 검수가 끝난 선물이 날다람박쥐 집배원을 통해 전달된 터라 우리의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골 때리는 선물 교환식이 되었다.
올해 내가 선물 교환식에 파트너로 택한 사람은 제이든 스펜서였으므로, 카일은 아주 오래전에 아카데미에서 운영비 모금을 위해 발행했던 <마법은 사실 섹시하다 : 피츠시몬스의 멋쟁이 교수들> 달력을 선물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나는 로브 아래 속옷만 걸친 콘리 교수나 빳빳하게 풀을 먹인 수염으로 중요 부위만 가린 커닝엄 교수가 그려진 달력이라면 누가 받아도 재밌을 거라고 했다가, 켄드라에게 절박하게 필요할 듯해서 말을 바꿨다.
학생회장 선거로 인해 교수 파벌 간 알력 싸움의 정도가 심해진 탓에 요새 험프리스 교수와 드와이어 교수는 눈인사조차 나누질 않았다. 켄드라에게는 호재이면서 기회였다. 만일 두 세력이 손이라도 잡았다간 탄탄한 지지층을 가진 그녀라도 상대하기 까다로울 것이었다.
그래서 켄드라는 휴스턴 교수가 약속했던 두 번의 원조를 어떻게 하면 더욱 효과적으로 써먹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내 생각에 <멋쟁이 교수들> 달력은 그녀에게 검이나 다름이 없었다.
카일은 나의 제안을 쉽게 수긍했다. 켄드라가 선물을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그는 광장 입구에 아치를 이룬 호박들 중 가장 큰 호박에 달력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켄드라 브래들리의 이름과 선물을 숨긴 위치를 쪽지에 적어 날다람박쥐를 보냈다.
제이든에게 전달할 내 선물은 호박에 아슬아슬하게 안 들어갔다. 등에 검을 부착할 수 있게끔, 몸통과 어깨를 빠듯하게 가로지르는 형태로 짜인 만티코어 가죽 하네스는 이디스와 함께 외출했을 때 구입한 것이었다. 작년에 카일에게 선물한 실물 크기 드와이어 교수 목조각과는 천지 차이였기 때문에, 나는 사프란이 핀 덤불 속에 하네스를 숨기면서 그의 눈치를 봤다.
“제이든은 분명히 좋은 거 줄 텐데, 나는 영원히 늘어나는 혀 같은 거나 주면 좀 그렇잖아….”
“누가 뭐래?”
카일이 콧잔등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기쁜 것도 같고 짜증 난 것도 같고 알쏭달쏭한 반응이었다. 하여튼 그의 귓불은 머리색만큼 빨개졌고 우리 사이에는 다소 어색한 분위기가 생겨났다.
구석진 나무에 기대 깃펜에 잉크를 먹이고 있는 크리스타 에드워즈의 존재를 깨달은 것은 그때였다. 코에 찰흙을 붙이고 두꺼비 뜨개 인형을 어깨에 얹음으로써 분장을 마친 에드워즈에게선 농담의 달 연회에 대한 열정의 조각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긴 어떤 연회이든 에드워즈가 제대로 임하는 꼴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녀가 연회에 참석하는 이유는 오로지 연회장에 감도는 분홍빛 낭만과 보랏빛 음모였으니까.
일레스티아 사교계 가십 전문가인 브리아나 모슬리는 불명예스러운 이혼 이후 레이디 에드워즈가 일레스티아의 연회장에 등장한 적은 단연코 없다고 했다. 사교계에서 추방당하다시피 한 그녀의 딸에게 기꺼이 샤프롱이 되어 줄 귀부인이 있을 리도 만무했으므로, 크리스타 에드워즈는 데뷔탕트 볼에 홀로 참석했다.
몇몇 끔찍한 실수를 저지른 뒤에, 미스 에드워즈 역시 어머니처럼 연회장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인물이 되었다. 어쩌면 그때의 트라우마가 에드워즈로 하여금 연회를 만끽할 수 없게끔 했을는지 모른다. 어쩌면 걔의 인간성이 고갈되기 시작한 최초의 장소가 거기였을지도. 나는 카일이 메두사에게 씌워 준 악마 사냥꾼의 모자를 돌려주면서 그의 옆구리를 은근슬쩍 찔렀다.
“너 춤 잘 추잖아, 맞지?”
“어마어마하지. 아리엘 달튼하고 파트너 하려면 발등이 아다만티움으로 되어 있거나 춤의 달인이어야 하잖아.”
“시끄러워. 어쨌든, 네가 춤 신청을 하면 에드워즈가 받아 줄까?”
내가 듣기에도 엄청 뜬금없는 소리였다. 카일이 한 눈썹을 치켜올린 채 나를 쳐다봤다.
“너라면 에드워즈에게 연회에 대한 좋은 인상을 남겨 줄 수 있을 거 같아서. 적어도 나는 네 파트너로 참석한 연회가 즐겁지 않은 적이 없었거든.”
나는 크리스타 에드워즈를 월시 패거리와 블로썸 다음으로 싫어했고 걔가 매일 적당히 나쁜 기분으로 잠들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농담의 달 연회에서 춤을 추지 않는 사람을 그냥 구경하기는 싫었다.
에드워즈가 카일과 함께하며 일말의 재미를 느낀 뒤에 그나 그의 소꿉친구에게 약간이나마 관대해질 것을 노리기도 했다. 대충 그런 이야기를 주절거리자, 카일은 미간을 찌푸리고 모자를 눌러 쓰더니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도리질을 쳤다.
“이걸 뭐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아무튼 다녀올게.”
그제야 내가 카일에게 또다시 매정하게 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시 후회가 밀려들었으나, 무르기에 카일의 걸음은 너무 빨랐다. 내가 그를 부르기 위해 입술을 반쯤 떼었을 때 카일은 이미 에드워즈에게 다가가는 중이었다.
처음에, 에드워즈는 맑은 녹색의 눈동자를 모자로 거의 가린 악마 사냥꾼의 정체를 모르는 듯했다. 무시로 일관하는 에드워즈의 태도는 언제나와 같이 무례했으나 영겁 이상의 시간을 미치지 않고 살아온 카일의 처세를 당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끈질기게 뭐라고 떠드는 말투가 얼핏 듣기에도 물 흐르듯 했다.
생각해 보면 에드워즈는 카일을 썩 반길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그녀는 1학기에 나와 관련된 못된 기사를 쓴 죄로 카일의 마법에 당해 하루 반나절이나 입에서 무지개 슬라임을 쏟아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일이 손가락으로 챙을 툭 쳐올린 뒤에 그가 자신 있어 하는 미소를 짓자 상황이 일변했다.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당혹스러운 듯이 인상을 구기다가, 결국 살짝 볼을 붉히는 에드워즈의 모습이 듀라-두사의 네 개 눈에 남김없이 들어왔다. 그녀가 새침하게 턱을 들고 카일의 손을 잡은 찰나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 이마를 간지럽혔다.
이윽고 개미 떼와의 지난한 전투에서 승리한 궁정 광대 알리스테어가 켄드라 피오렐리와 함께 돌아왔다. 그녀의 제단에는 여전히 모조 칼을 심장에 꽂은 미아가 혀를 빼물고 누워 있었다. 켄드라처럼 나와 인사하고 싶었는지 자꾸 실눈을 뜨고 들썩이는 것이 웃겼다.
미아가 귀엽기도 하고, 마침내 연회를 즐기는 에드워즈가 보기에 흐뭇해서, 나는 내가 웃고 있는 줄만 알았다. 근데 켄드라도, 브리아나도 내 옆구리의 가짜 머리통을 가리키며 대뜸 무슨 일이라도 났냐고 물어 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걔를 봤는데, 이럴 수가, 연회가 아니라 장례식에라도 참석한 마냥 죽상을 하고 있었다!
깜짝 놀라 이마를 만졌더니 굵게 잡힌 주름이 손끝에 느껴졌다. 나는 양손으로 이마를 눌러 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복면으로 덮인 채이기도 하고, 아무리 세게 눌러도 자꾸 주름이 가서 포기했다. 환영 마법의 부작용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