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삐를 쥔 것은 나의 손이었지만 진로를 정하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눈토끼가 이끄는 대로 가다 보니 교환식용 선물들을 검수하는 볼턴이 나타났다.
기름을 발라 빡빡하게 넘겨 묶은 머리, 고풍스러운 느낌이 나는 단안경, 적색과 검은색, 금색으로 꾸며진 망토, 누가 봐도 흡혈귀였다.
하기는 비쩍 마른 데다가, 일레스티아인치고도 유달리 창백한 볼턴은 흡혈귀와 아주 어울렸다. 내게 농담의 달 연회에서 흡혈귀로 분장하는 애들은 도전 정신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겁쟁이라는 편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켈란 일레스티아의 부관이면서 케이틀린 대제에게 충성을 바친 마르퀴즈 볼턴을 용서한 바가 없었다. 그래서 분주하게 무슨 목록을 작성하는 볼턴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테이블에 내가 준비한 선물을 올렸다.
나를 발견한 볼턴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려 보였다. 하지만 내가 인사하는 시늉을 하다가 손가락 욕을 건네니 시무룩하게 늘어져서는 선물 더미에서 폭발물이나 날붙이를 걸러내는 작업을 계속했다. 어디 평생 시무룩해 보라지.
한 사람만 빼고 학생회 전원을 만났다. 나는 고블린 아니면 완두콩으로 분장한 마담 바틀렛의 일장 연설이 이어지는 내도록 두리번거리다가 카일이 아는 체를 하는 통에 깜짝 놀랐다.
그가 푹 눌러쓴 챙이 넓은 가죽 모자는 우스꽝스럽지도 못생기지도 않았고 도리어 세련된 모양새에 가까웠다. 보통 카일처럼 장난꾸러기로 정평이 난 애들은 농담의 달 연회에 세련된 차림을 하지 않았으므로, 나 외에는 아무도 그가 카일 빌라드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으, 이렇게 재미없는 분장을 해 본 적이 없어서 기분이 이상해. 나 괜찮아?”
초조하게 모자챙을 만지작대는 카일은 말마따나 매우 어색한 듯했다. 무릎보다 아래로 내려오는 재킷에 줄줄이 달린 가죽 장식이 섬세해서 돈깨나 썼다는 인상을 주었다.
반면 안에 받쳐 입은 셔츠와 조끼는 상당히 후줄근했는데, 그 점이 격식 차린 형태의 의복에 일종의 악마적인 매력을 부여했다. 신화시대의 가장 유명한 악마 사냥꾼이자 그 스스로 악마였던 군발트가 틀림없었다.
“무지하게 진부하네.”
“너무하네. 진부하기만 해?”
그가 어깨에 걸고 있던 쇠뇌를 내게 겨냥하며 물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현이 걸리고 방아쇠가 당기어졌다. 이내 활대를 가로질러 화살 대신 노란색과 분홍색 꽃잎이 잔뜩 튀어나왔다.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미신이 퍼뜩 떠올랐다. 나는 천천히 흩어지는 꽃잎을 향해 팔을 뻗었으나, 초점이 맞지 않아 허우적거렸다. 나를 대신하여 나의 일일 파트너 눈토끼가 기다란 혀를 잽싸게 내둘러 꽃잎을 전부 훔쳤다.
“무지하게 진부하고 아주 조금 볼만해.”
아무튼 노력이 가상했다. 마지못해 웅얼거리자 카일은 해냈다는 듯이 주먹을 흔들었다. 엄청 신나 보여서 괜히 나까지 들뜨는 기분이었다.
엉덩이가 너무 배겼다. 게다가 말에 오른 채 춤을 출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춤곡이 흐르기 직전에 눈토끼를 근처 나무에 매어 놓았다. 순한 생김새에 비해 제법 성질이 있는 암말은 불만스럽다는 듯 발을 굴렀지만 목을 쓰다듬어 주었더니 얌전해졌다.
사랑의 달 연회와는 반대로, 농담의 달 연회에서 연주되는 춤곡은 마주르카나 폴카처럼 빠르고 신나는 곡이 대부분이었다.
나한테 없는 건 춤 실력이지 흥이 아니었고, 두꺼운 분장이 자신감을 부여하곤 했기 때문에, 나는 농담의 달 연회에서만은 스텝 밟는 것을 즐기는 편이었다. 그래서 백파이프 선율이 귀를 때리자마자 내 다리는 아주 바빠졌다.
지리게 섹시한 데다가 기발하기까지 하지만 뛰어난 춤꾼이라 할 수는 없는 듀라-두사의 첫 춤상대는 머리에 불이 붙은 광대 알르망드였다. 브리는 얇게 펴서 굳힌 설탕물로 구현한 그녀만의 불꽃이 격렬한 동작에 망가진다면 끔찍할 거라고 말했다.
허리 아래로는 난리면서 위로는 새벽 호수보다 고요한 브리아나-백조-모슬리 덕분에 내가 상대적으로 춤을 잘 추는 듯이 느껴졌다.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궁정 광대 알레한드로가 머리카락에 꼬인 개미 무리를 몰아내는 동안 악마 사냥꾼 군발트가 찾아왔다. 이번에도 카일은 공략 대상들과 블로썸의 이벤트에서 슬쩍 빠져나온 듯했다. 에드가의 왼손과 나돈의 오른손을 잡고 춤을 추는 블로썸의 모습이 멀찍이 보였다.
내가 만나지 못한 학생회의 마지막 일원이 근처에 있었다. 스티아의 사도 아르네 말이다. 어떤 위엄이 느껴질 만큼 거대하며 동시에 거추장스러운 날개 덕분에, 켈란은 블로썸 대신 메이나드와 함께 느릿느릿 회전하는 중이었다. 아직 걸음 보조기 신세를 면치 못한 메이나드의 하반신은 브리의 상반신보다 뻣뻣했다.
투명 옷감으로 얼굴을 가린 김에 대 놓고 걔들을 구경했다. 정확히는 켈란을. 그의 금발은 원래 더 밝고 반짝이는 색이었는데, 아르네의 금발은 탁한 기운이 섞여 올리브색에 가까웠다. 들쭉날쭉 다듬어진 머리카락들이 가죽끈 장식과 깃털들로만 가려진 몸에 아무렇게나 늘어진 모습은 여러모로 위험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또 하관을 가리는 황동 반가면이라니! 부리는 일반적으로 누군가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는 요소로 꼽히지 않았으나 켈란 일레스티아는 결코 일반적이라 할 수 없었다. 역시나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간만에 양손을 맞부딪쳐 스스로의 성취를 축하했다.
한편으로는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두 번이나 차였고, 두 번째에는 진짜로 괴상한 거절 대사를 들었다. 아마도 켈란의 속을 짐작하기란 그의 어머니나 전지전능한 여친에게도 쉽지 않을 것이었다. 그 스스로는 가늠이 되는지 궁금했다.
적어도 내가 친하게 지냈던 켈란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의뭉스럽게 굴지언정 감정만큼은 확실하게 표현하는 애였다. 버그가 바로잡히고 그의 꿈에 내가 등장하지 않게 된 어느 새벽의 중정에서보다 켈란이 멀게 느껴졌다. 사랑의 묘약이나 시스템의 영향에 휘둘리는 중인 걸 알아도 순간순간 드는 야속한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다.
블로썸과 방학을 보내는 도중에 나를 찾아왔다. 블로썸의 연극을 보러 가서 내 망토를 붙잡았다. 나와 키스한 이유는 잊어버렸으면서 자기를 포기하지는 말아 달란다. 그의 행동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볼이 콱 잡힌다 싶더니만 고개가 기울여졌다.
“네가 모르는 거 같아서 말해 주는 건데, 네 목 위에 달린 눈이 돌아가면 네 옆구리에 달린 눈도 돌아가거든.”
카일의 말투는 얼핏 친절한 듯했으나 온도가 낮았다. 아무래도 가짜 머리통에 걸린 환영 마법이 너무 정교했나 보았다. 머쓱하게 웃고 나서 까치발을 들었다.
“저기, 이벤트라는 건 호감도를 다 채워도 계속 봐야 하는 거야? 저번에 나돈의 블로썸에 대한 호감도는 더 올라갈 데가 없다고 했잖아. 그럼 쟤랑 춤출 시간에 다른 애를 노리는 게 이득 아니야?”
여태껏 블로썸이 공략 대상들을 게임 캐릭터 이상으로 여기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녀가 유달리 집착하는 카일이나 켈란의 경우에도 말이다. 블로썸이 나돈과 춤을 추게 된 배경에 감정적인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속삭이며 묻자 카일이 약간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공략 조건에는 호감도만 있는 게 아니야. 이벤트를 일정 횟수 이상 본다거나… 반드시 봐야 하는 이벤트도 있고.”
내가 기억하는 9개월은 겨우 다섯 번에 불과했으나 블로썸의 행동 패턴을 찾아내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손쉽게 블로썸이 항상 놓치지 않았던 몇몇 낭만적 사건들을 꼽았다. 그러자 카일은 ‘맞아’라고 대답하면서 뒤이어 투덜거렸다.
“근데 이제 좀 집어치우면 안 될까?”
“응?”
“요즘에 우리 계속 게임 이야기만 하잖아. 마치 그거 아니면 할 말도 없는 것처럼.”
생각해 보면 그랬다. 게임이나 시스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우리는 보다 다양하며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피츠시몬스에서 벌어지는 웃긴 소동, 귀엽고 되바라진 걸로는 천재인 고양이 릴루의 근황, 언제 꺼내도 질리지 않는 옛 추억….
지나치게 많은 비밀이 까발려진 지금 내 머릿속을 점령한 것은 게임과, 게임에서 비롯된 몇 가지 문제가 다였다. 그것들을 공유할 만한 상대가 카일뿐이었으므로, 그와 나의 대화는 가벼이 시작되어도 무겁게 끝나는 일이 잦았다. 강해져만 가는 블로썸의 영향력이나 케이틀린 대제의 방해, 반면 미약하기 그지없는 우리의 진보를 화두에 올리면서 유쾌하게 굴기는 쉽지 않았다.
“오늘은 네가 그토록 기다리던 농담의 달 연회고, 목 없는 메두사 기사는 내가 본 네 분장 중 제일 끝내줘. 그런데도 너는… 내 말은, 여유를 좀 갖자는 거야.”
“내가 그렇게 초조해 보여?”
“젠장, 아리, 당연하지! 탤론 시청 면접자 대기실에도 너만큼 안달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정말이지 처참한 평가였다. 나는 옆구리에 낀 가짜 머리통을 가슴께로 가지고 와서 꼭 안았다. 걔가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만의 길을 구축하겠다고 떵떵거린 주제에 어느 길로도 접어들지 못한 지 제법 되었다. 나름대로 수를 쓰겠답시고 케이틀린 대제에게 덤벼 보았으나 스티아 신의 티아라를 손에 넣기는커녕 결코 풀지 못할 수수께끼만 얻었다.
진보는커녕 후퇴하는 와중에도 걱정거리는 쌓여만 갔다. 블로썸이 내게 붙인 계급주의자라는 딱지는 또 어떻게 떼어 내야 할지 막막했다. 안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았을 때 불안해하는 카일에게 다음 9개월이 있다며 큰소리친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불현듯 최고의 농담 트로피를 목전에 두고도 죽상이나 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여겨졌다. 카일의 말마따나, 생일 다음으로 기대하던 날에는 그놈의 운명을 머릿속에서 몰아내도 될 듯했다.
“야, 아리엘 달튼. 너는 내 최고의 친구고, 가족이고,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유일하게 애틋한 존재야. 솔직히 말해서, 난 너만 행복할 수 있다면 세계고 운명이고 쥐뿔도 신경 안 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