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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22화 (122/178)

블로썸이 메이나드에게 내가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고 말했다면, 켈란에게도 똑같이 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한 상황에서 지금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모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별거 아냐. 그냥 이야기 중이었어. 친구끼리는 원래 할 말이 많거든.”

“내 기억에 너희가 친구였던 적은 없는데.”

퍽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받아치는 켈란에게 뻔뻔하게 시치미를 뗐다. 볼턴 사건이나 누명 사건은 어디까지나 블로썸과 내가 해결할 문제였다. 안 그래도 학생회장 선거 기간이라 공사가 다망할 텐데, 굳이 그를 끌어들이기 싫었다.

공교롭게도 켈란과, 하필이면 블로썸을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그의 마음 속 저울에 나를 달아 보는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내가 배경 인물이고 블로썸이 주인공임을 확인하는 행위가 유쾌했던 적은 단연코 없었다.

뭐라고 떠벌리려는 메이나드의 입을 잽싸게 틀어막았다. 켈란은 명백히 숨기는 게 있어 보이는 나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의 우아한 손가락은 내게 삿대질하는 데에 쓰이지 않았으며,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메이나드의 발뒤꿈치 부근에서, 그녀의 걸음 보조기에 ‘금붕어’라고 쓰는 중이던 영원한 맹세용 트롤 깃펜이 끄집어내졌다. 누가 입을 막은 것도 아닌데, 나는 순식간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합죽이가 되고 말았다.

고대 마법과 신화 수업이 끝나자마자 켈란을 따라 학생회실로 갔다. 제이든은 만일 위험에 처한 상황이라면 교재를 거꾸로 놓아서 표시해 달라고 말했지만, 그가 그리폰 크리켓 연습에 참여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내가 좋아하는 애와의 갈등에서 나를 좋아하는 애의 도움을 받는 건 치사하게 느껴져서 정중히 사양했다.

“일단, 영원한 맹세용 트롤 깃펜을 네가 또 어디서 구했는지는 따지지 않을게.”

켈란이 새로운 영원한 맹세용 트롤 깃펜을 옛날 영원한 맹세용 트롤 깃펜이 들어 있는 서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금색 시선이 안경알을 통과해 닿자, 나는 코카트리스나 메두사라도 만난 듯이 굳어 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5학년 2학기에 일부 금지 물품은 졸업 시험에 필요한 경우 반입이 가능하다고 들었다’거나 ‘휴스턴 교수는 맹세용 트롤 깃펜으로 서명까지 했다’고 항의했을 텐데 말이다.

갑자기 엄청나게 무방비해졌다. 또한 아주 두려운 기분이 들었는데, 나 스스로도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 제일 두려웠다.

“블로썸이 네게 무슨 소리를 지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결백하지. 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충분히 알아. 내가 로즈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해서 진실이 변하는 건 아니니까.”

내가 결백하다는 것은 누군가는 결백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나는 켈란의 대꾸에서 블로썸이 내게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씌운 것과 별개로 그녀에 대한 공격이 실재함을 깨닫고 약간 놀랐다.

또한 켈란이 블로썸의 말보다 그가 봐 왔던 내 모습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것도.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서 반성문을 썼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어서, 로즈마리 블로썸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할 거라고 지레짐작했었다.

약간 들떴다가 금방 우울해졌다. 믿음을 얻어 봐야 사랑을 얻지는 못했고, 계약서에 이름을 적음으로써 성립한 연인 관계와 마법 약을 통해 구축한 연인 관계 중 어느 한쪽도 다른 쪽보다 낫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가 궁금한 건 다른 거야. 하나, 내 부관과 너 사이에 있었던 일. 둘, 로즈가 하필이면 너를 지목한 이유. 셋,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 여부.”

“첫 번째는 다른 쪽에 알아봐. 나는 그 자식 머리글자도 발음하고 싶지 않으니까. 두 번째는, 글쎄, 나는 네가 모르는 게 없는 줄 알았는데.”

“그랬지. 요새 들어 자꾸 생기더라.”

켈란이 검지로 눈썹 뼈 가장자리를 꾹 누르며 자조했다. 아무래도 켈란은 뭔가 복잡하고 하릴없는 이유가 있어서 블로썸이 나를 음해하는 줄 아나 보았다. 그럴 법도 했다. 사랑에 빠진 남자에게 그의 연인은 완전무결한 천사에 금을 녹여 불어 낸 비눗방울처럼 아껴 마땅한 사랑둥이일 테니까. 천사는 까닭 없이 누구를 깎아내리지 않는 법이었다.

내가 봤을 때 블로썸은 완전무결한 천사도 아니었고, 그녀의 행동 본위가 복잡하고 하릴없는 이유인 것도 아니었다. 나를 향한 블로썸의 손가락질은 그보다 한결 인간적인 데다가 단순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당연히….”

당연히 내 평판을 시궁창에 처박는 행위에서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미케일라 메이나드나 몇몇 애들이 아리엘 달튼을 페드로 캔트렐에 맞먹는 계급주의자로 치부한다면 즐거울 거 같아서였고. 나를 싫어하니까.

운을 떼다 말고 버벅거렸다. 우리가 서로를 향해 가진 부정적인 인식을 언급하려면 필수적으로 설명할 거리가 구구절절이었던 탓이다. 몸소 경험한바 로즈마리 블로썸의 남친인 켈란 일레스티아는 그것 중 어느 것도 소화할 수 없었다. 잠깐 바닥을 노려보며 고민하다가, 그냥 말하기로 했다.

“궁극적인 목적은 모르겠지만, 블로썸은 졸업 연회까지 너를 포함해 남자애 여섯을 동시에 꼬셔 가지고 진엔딩이라는 걸 봐야 되는데, 내가 어쩌다 보니까 걔를 방해하고 있거든.”

“그랬나?”

“나는 더는 5학년을 반복하고 싶지 않고, 5학년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시스템을 망가뜨려야 해. 시스템이 망가지려면 게임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어선 안 되고….”

“그랬나?”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익히 아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멍청한 소리를 반복하기 시작한 켈란이 제정신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며 테이블 서랍에서 영원한 맹세용 트롤 깃펜을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쿠키를 서너 개쯤 집어 먹기도 했다.

아무래도 켈란의 실은 아직 견고한 모양이었다. 올해 농담의 달에 갑자기 사악한 마도서와 커틀러스를 집어 던지고 스티아의 사도 분장을 택한 그의 심경 변화에 내 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여긴 것은 착각인 듯했다. 브레넌의 말마따나, 블로썸의 취향이 그거였나 보다. 약간의 머쓱함을 느끼며 버터쿠키를 씹어 넘겼다.

그런 다음에는 갓 깎아 낸 보석처럼 정교한 얼굴뼈 위로 여백 없이 자리 잡은 이목구비를 구경했다. 안면부를 장식하는 모든 선이 지우개질 없이 그려 낸 듯이 깔끔해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또 호박에 햇살을 가둔 듯한 눈동자에는 부정한 무언가가 비추어진 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얘는 여자애랑 이야기하면서 가슴 안 보겠지. 월시가 그럴 때마다 진짜 눈알을 파내 버리고 싶었는데. 하위 귀족이라 결혼하긴 뭐하니 정부로 삼겠다고 선심 쓰듯 지껄이지도 않을 거고, 내 룸메이트랑 사귀지도 않겠지. 멋대로 상상하다 보니 블로썸이 견딜 수 없이 부러워졌다.

“좋아해.”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흐리멍덩하던 시선이 바로잡혔는지 아닌지 확인도 안 해 보고 저질렀다.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음을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살짝 기울어진 고개가 내 쪽을 향하자마자 손아귀에 얼굴을 파묻었다. 발을 구르고 몸서리를 치며 왜 들어선 안 되는 것만 듣냐고 짜증을 냈다. 그러자 켈란은 꽤나 부드러운 말투로 들어선 안 되는 거면 왜 말하냐고 되물었다.

지극히 옳은 말이라 금방 자포자기했다. 둘러대기에 퍽 적당한 핑계이지 않나 싶기도 했다.

“어차피 모르지는 않을 거 아냐. 브리가 그러는데, 나 티 엄청 난대. 블로썸도 느꼈나 보지 뭐. 그래서 착각하는 거 아닐까?”

실은 브리만 그러지도 않았다. 내가 켈란에게 빠진 걸 모르는 사람이나 드워프는 피츠시몬스에 진짜 아무도 없었다(모르는 엘프는 있었다. 오염 덩어리의 대소사에 일말의 관심도 없는 난나 교수라면 모르는 게 당연했다.).

엊그제는 ‘켈란 일레스티아와 지독하게 얽히고 싶은 모임’이라는 비밀 단체로부터 조그마한 향낭을 받았는데, 내 실연을 위로하는 의미에서라고 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새어 나갔는지 궁금해졌다.

아무튼 기왕 이렇게 된 거 짚고 넘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내가 켈란에게 직접적으로 내 감정을 말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 입매를 굳힌 채 아마도 두 번째 거절을 준비하는 중이던 켈란을 똑바로 봤다.

카일과 제이든과 에드가가 내게 보답받지 못할 마음을 전한 것은 걔들이 특별히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게 정당했기 때문이다. 난나 교수를 제외한 모두가 우리의 이름을 귀엣말로 나누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 그랬다. 그건 우리에게 대화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간절히.

“제대로 부딪쳐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아닌 거 같아서.”

울먹이지도 않았고, 말끝을 흐리거나 농담으로 얼버무리지도 않았다. 꽤나 멋진 태도라고 생각했다. 자화자찬하는 시점에서 멋없어진다는 생각은 의식적으로 피했다.

상당히 드문 경우였다. 여태껏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에 휩쓸렸을 때 내가 취한 행동은 다름 아닌 회피였다. 피하고, 숨어서, 시간이 지나는 것을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죄다 잠잠해지기 마련이었다.

쉬운 선택이었다. 비겁한 선택이었고. 하지만 큰 소동을 일으킨 적이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19년에 최소 6년을 더 살다 보니 나를 둘러싼 환경이 아닌 나 스스로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신기하고 우쭐해졌다. 아주 잠깐 동안.

“포기할 거야?”

가까스로 짜낸 용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피하는 것보다 훨씬 비겁한 답이 돌아왔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눈을 크게 떴다가 금방 찡그렸다. 입술은 절로 튀어나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목소리가 꽤나 날카롭게 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켈란은 테이블 위에서 꼼지락거리던 내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뿌리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포기하지 마.”

“뭐라고?”

“네가 포기 안 했으면 좋겠어.”

켈란이 빠르게 지껄였다. 초조한 것처럼 들리기도 했고, 무감정하게 들리기도 했다. 순식간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구어졌다. 코끝에 매운 기운이 서린다 싶더니만 금세 시야에 물기가 어렸다. 나는 찰나 느꼈던 성취감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눈을 부릅떴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말이었다. 포기 안 했으면 좋겠다고? 갖기는 싫은데 남 주기도 싫다는 거야? 아니면, 뭐, 포기 안 하고 기다리면 내 차례가 돌아오기라도 한다는 거야? 세상에 그렇게 욕심 많고 이기적인 소리가 어디 있어? 그렇게….

비겁해.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포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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