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아하여 눈을 가늘게 뜨는 동안 케이틀린 대제는 벽난로 근처에 다른 물건을 소환했다. 대리석과 쇠로 된 횃대였다.
횃대의 끄트머리에 나무껍질이나 천이 둘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타오르는 불꽃의 기세가 거셌다. 간혹가다 탁탁거리며 불티를 뿜어내기나 하는 벽난로 따위는 상대도 안 될 듯했다.
“이것을 원한다고 했지? 직접 가져가 보려무나.”
곧 방금까지 내 눈을 사로잡았던 푸른 보석이 시종 붉다가도 언뜻 푸르게 보이는 불꽃 속으로 사라졌다. 케이틀린 대제가 스티아 신의 티아라를 횃불에 집어 던진 것이다.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정말 간단하지 않느냐? 손만 뻗으면 내기에서 이길 수 있다. 단 하나의 불편함만 감수한다면 말이다. 너도 알다시피, 스티아 신전의 성화는 지옥의 봉화와 닮아 있어서 절대 꺼지지 않지.”
대제가 나를 속이려 드는 게 아니라면, 그녀가 소환한 횃불은 스티아 신전의 성화인가 보았다. 신의 숨결 일부가 마기와 섞여 창조되었다는 성화는 아무거나 태우지 않는 신비의 불이었다.
무엇이 성화를 그토록 맹렬하게 타오르도록 하는지는 마탑에서도 밝히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었으나, 대제의 말마따나 그것이 결코 꺼뜨릴 수 없음은 명확했다. 냉각시키거나, 모래를 끼얹거나, 공기를 차단하는 등 여태껏 많은 반신론자가 성화를 끄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모두가 실패했다.
“짐은 전장에서보다 옥좌에서 더 많은 죽음을 봤다. 교수형, 참수형, 음독형, 거열형… 방식도 참 다양했지. 그중에 죄수들이 가장 꺼리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느냐? 화형이다, 화형. 제아무리 강인한 무인이라도, 강직한 절개의 소유자라도 산 채로 불에 타는 고통을 견디지는 못했다. 흐물흐물 녹아내린 손바닥을 비비며 죽여 달라고 읍소하던 모습들이 어찌나 짠하던지.”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 아마 지금 내 얼굴에는 짙은 패색이 떠올랐을 것이다. 스티아의 성화에 닿지 않고 티아라를 꺼낼 방법 같은 건 나의 지력이 2가 아니라 9나 10이었어도 못 찾았다.
최초에 협의한 대로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손만 뻗으면 내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케이틀린 대제의 호언장담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손을 뻗음과 동시에 내 몸은 결코 끌 수 없는 신비한 불길에 휩싸이겠지.
대제라고 해서 전신이 돌이지는 않았다. 그녀마저도 성화에 둘러싸인 티아라를 꺼내지 못할 것이다. 대제와 내가 다른 것은, 나에게는 티아라가 꼭 필요했고, 대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졸업 연회 날까지 나 이외에 티아라를 손에 넣어야 하는 사람은 케이틀린 대제가 아니라 블로썸이었다. 전지전능한 블로썸에게는 성화마저 이겨낼 힘이 있을 공산이 충분했는데, 만에 하나 아니더라도 케이틀린 대제가 책임질 이유는 없었다.
그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게임과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었으니까.
“네가 짐에게 이토록 방약무인하게 구는 이유는 짐이 너를 죽일 수 없음을 알아서이지 않느냐.”
최악이었다. 케이틀린 대제가 이렇게까지 막 나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쩌면 너무 까분 탓에 스스로 부르고 만 재앙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부모님이 언급했던 ‘아리엘 달튼이 입으로 망할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맞아. 짐은 너를 죽이지 못해. 살려 둘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적어도 영원히 계속되는 현재를 사는 동안 네가 죽음을 향해 도망치도록 두는 일은 없을 테다.”
한낱 소국의 자작가 영애로서 얼핏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가 떨어지면 똑똑한 룸메이트, 정보 수집에 능한 소꿉친구, 힘이나 권력을 지닌 친구들에게 기댈 마음이나 먹었다. 참으로 안이하기 그지없었다.
“기대가 되는구나.”
케이틀린 대제가 우아하게 웃었다. 진짜 한심한 게, 이 와중에도 양방으로 완벽하게 같은 높이만큼 끌어 올린 입꼬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켈란을 생각하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켈란을 만나고 싶었다.
***
나와 성화와 티아라를 비밀의 방에 덩그러니 버려둔 채, 케이틀린 대제는 볼턴에 대한 지배력을 거두고 사라졌다.
가슴팍에 새겨진 주술에서 신성력이 빠져나가고 얼마나 흘렀을까, 끙끙대며 정신을 차린 볼턴의 얼굴은 나무껍질처럼 푸석푸석했다. 그의 가죽을 뒤집어쓴 케이틀린 대제가 오히려 지금의 볼턴보다 생기 넘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볼턴이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 잽싸게 속박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그의 손목과 발목이 한꺼번에 달라붙었다. 실은 손목 따로, 발목 따로 붙었어야 맞았지만 언제나처럼 내 마법 실력은 내 기대를 배신했다.
원래 제이든과 비등비등할 정도로 큰데, 내 주문 덕분에 갑자기 엄청 쪼그라들어 버린 볼턴의 모습은 정말이지 참기 힘들었다. 나는 눈치 없이 목구멍을 두드리는 웃음을 헛기침으로 겨우 넘겼다. 그런 다음 웬일로 얌전하게 있던 볼턴을 세게 찼다.
“윽!”
“왜 그랬는지는 알 거 같으니까 안 물을게. 더 차도 되지?”
대답은 듣지 않았다. 나는 분이 풀릴 만큼 볼턴의 엉덩이를 걷어찬 다음 그를 데굴데굴 굴려 마도구 제작 실습실로 쫓아냈다. 운이 좋다면 드와이어 교수가 그를 구원해 줄 것이다. 운이 나쁜 경우엔 내 눈에 다시 뜨이는 거고. 그러면 그의 볼기짝은 정말로 걸레짝이 될 것이었다.
보람찬 노동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패치 노트>를 찾아 헤매었다. 케이틀린 대제로부터 새로운 과제를 받기는 하였으나 당장은 막막해서 신경을 껐다. 애초 내가 비밀의 방에 들어가려고 했던 것은 오로지 <패치 노트> 때문이었으니까.
내가 켈란과 독서 모임을 가지던 시절 <패치 노트>는 항상 통나무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금 통나무 테이블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태피스트리에 수놓인 페가수스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결 좋은 갈기를 뽐내기나 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마도구 제작 실습실로 갔다. 멋없이 늘어진 꼴을 보이기 싫었는지 장식장 뒤로 낑겨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 중이던 볼턴을 굴려서 돌아왔다. 테이블에 책 있던 거 얻다 뒀냐고 묻자 볼턴은 속박을 풀어 준다면 가져다주겠노라고 했다.
기숙사 불심 검문을 통해 학생회에 억울하게 빼앗긴 뒤로, 나는 영원한 맹세용 트롤 깃펜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손바닥에 ‘아리엘 달튼의 몸에 털끝만큼도 닿지 않겠습니다’라고 쓴 뒤 볼턴에게 쥐여 주었더니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끄덕였다.
손과 발이 한데 묶여서는 동작이 굼뜰 수밖에 없었다. 내 손바닥에 서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나와 닿아 있어야 했고, 서명을 마침과 동시에 내게서 떨어지기엔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볼턴은 즉시 트롤들의 응징 대상이 되었다. 나는 조그만 나무 몽둥이의 경쾌한 움직임에 오래도록 박수를 치고 나서 속박 주문을 풀었다.
저지른 짓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서인지 볼턴은 퍽 고분고분했다. 그는 나를 비난하거나 노려보지 않고 곧바로 벽난로를 향해 갔다. 이윽고 기다란 팔이 타오르는 불 속으로 쑥 들어갔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비명도 나오지 않았는데, 정작 팔꿈치까지 벽난로에 담근 채 불덩이를 뒤적거리는 장본인은 평온했다. 잠시 기다리자 그가 장작 사이에서 낡은 책을 꺼내었다. <패치 노트>였다.
“가짜 불이야.”
“하는 김에 저기도 손 한번 넣어 주면 안 되냐?”
성화를 가리키며 뻔뻔스레 물었다. 뾰족한 눈초리가 돌아왔다. 볼턴도 그게 무슨 불인지 아는 모양이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패치 노트>를 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많은 메모지가 <패치 노트>에 붙어 있었다. 켈란이 버그를 고치기 전에 이것에 꽤나 골몰한 모양이었다. 심지어 어떤 페이지에서는 완전한 해독문을 읽을 수도 있었다.
[03.07 아이템 ‘여왕의 관’을 보유하고 있어도 매력이 오르지 않는 현상을 수정하였습니다.]
[03.10 공략 대상에게 적용되는 이펙트의 일부 그래픽을 수정하였습니다.]
[04.21 공략 대상 ‘에드가 라모스’의 기간 제한 이벤트 ‘29. 감금’의 발생 조건 : 22시 ~ 23시, 별관 2층 복도 → 21시 ~ 22시, 별관 2층 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