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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19화 (119/178)

찰나 이어진 정적은 지독하게 깊어서 먼지가 떠다니는 소리조차 들을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모든 소리가 폭발적으로 휘몰아쳤다. 내 숨소리, 신발 밑창이 돌에 문질러지는 소리, 땀방울이 굴러떨어지는 소리…

그중 제일 커다란 것은 볼턴의 절규였다. 인간 여성을 사랑하여 운디네를 배신한 죄로 매일 스스로 손톱을 뽑아 잉어에게 먹여야 하는 반신 니얄도 그만큼 아프게 울부짖지는 않을 거였다. 나는 어깨를 감싸 안고 몸서리쳤다.

바닥을 뒹구는 볼턴의 가슴팍에서 빛이 깜빡거리며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의 밝기가 밝아질수록 볼턴의 비명도 높아졌다. 상당한 아픔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내게 개같은 짓을 저지르려고 한 자식인데도, 불현듯 안쓰럽다는 인상을 받을 만큼 처절했다.

한참 동안 비명을 지르던 볼턴이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나는 잔뜩 웅크린 채 모로 누운 볼턴의 이마를 신발코로 툭툭 치다가, 의식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얼굴 가까이 손바닥을 가져갔다. 미지근한 바람의 흐름이 느껴졌다.

잘됐다. 순간적으로 든 감상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그것이 잠에서 깨는 마법 주문이라도 된 듯이, 별안간 볼턴의 눈이 번쩍 열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엉덩방아 걸음으로 10인치는 갔다.

“짐의 마르퀴즈는 심성이 너무 고와서 탈이구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벌떡 일어선 볼턴에게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가볍게 혀를 차는 모습이 성별부터 다른데다가 이목구비 하나 닮은 구석이 없는 메건 클리블랜드를 연상시켰다.

나는 그녀가 놓은 덫에 걸려 하마터면 끔찍한 꼴을 당할 뻔한 상황에서도 대륙의 패자라는 이유로 케이틀린 대제에게 예를 지켜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애초 케이틀린 대제가 블로썸의 조언자가 맞다면, 그녀는 블로썸처럼 나를 죽이지 못했다. 그녀도 블로썸처럼 시스템의 완전 붕괴를 두려워하고 있으므로.

그러니 볼턴을 시켜 그따위 같잖은 수작으로 내 의지를 꺾어 버리려고 했던 거겠지. 곱씹을수록 열이 받아서 도저히 무릎을 꿇기는커녕 고개를 숙일 수조차 없었다.

“선물은 잘 받았느냐.”

뜬금없는 선물 운운에 얼떨떨한 것도 잠시, 정수리쯤을 톡톡 두드리는 그녀의 행동이 나로 하여금 특정한 기억을 되살리게끔 만들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이를 악물었다.

“이미 아실 테지만… 그 공이 가져다준 건 부상이 아니라 승리예요. 그런 의미로 언급하셨다면, 네, 잘 받았습니다.”

칵스위턴의 마지막 타자는 일레스티아 제국 산하 퍼셀 공국에서 이름난 그리폰 크리켓 유망주였다.

그는 정밀한 제구만큼 정밀하게 타격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카일에 따르면 문제가 된 타구 직전에 계속해서 내 쪽을 봤다고 했다. 마치 공을 쳐 날릴 방향을 가늠하기라도 하듯.

이기적이되 악독하지 않게 살아온 삶이었다. 내가 사소하게 불행하기를 비는 사람은 많을지 몰라도 내 머리통에 공을 맞추고 싶어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블로썸이 아니고, 시스템이 아니라면, 남은 건 한 사람이었다.

“하하, 맹랑하구나!”

불손한 발화에서 농담 이상의 재미를 느꼈는지, 케이틀린 대제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나는 조금도 안 웃겼다. 대륙의 역사 교과서가 찬양하는 위인이 이토록 비겁하고 졸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흐트러진 블라우스와 망토를 추스르며 물었다.

“왜 하필 저인가요?”

“음?”

“아니, 아니지. 왜 하필 블로썸이죠? 로즈마리 블로썸은, 주인공은 우리처럼 이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에요. 목적을 이루고, 그 과정에서 뭔가 잘못되더라도 빠져나가면 그만이라고요.”

처음에는 케이틀린 대제가 블로썸의 편에 선 까닭이 켈란을 위해서인 줄 알았다. 게임에서 주인공은 원한다면 대제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전지전능해질 수 있었으니까.

반드시 누군가를 반려로 맞이해야 하는 경우 켈란에게 로즈마리 블로썸만큼 강력한 선택지는 없을 거였다. 만일 그녀가 평범하게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 시늉을 조금이라도 했더라면 그렇게 믿었겠지.

하지만 케이틀린 대제는 아들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켈란은, 그러니까, 어머니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 그녀가 켈란과 블로썸을 붙이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는 아마도 블로썸이 그것을 바라서였을 것이다.

블로썸에게는 진엔딩이라는 확고한 목적이 있다. 그녀도 그것을 안다. 내 말에 놀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블로썸이 진엔딩 이후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 또한 알고 있는 듯했다.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고.

그렇다면 도대체 왜? 진엔딩과 케이틀린 대제 간 연결 고리는 너무 짙은 안개로 가려져 있어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거듭해서 물었다.

“어째서 도우시는 거예요?”

“짐은 영웅이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눈썹을 들썩였다.

“짐은 대황제이다. 현자이고, 부자이고, 성자이다. 이 세계에서, 짐에게는 가지지 못할 것도 하지 못할 것도 없다. 살아 있는 한은. 짐은 죽고 싶지 않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란 어려웠다. 케이틀린 대제만큼 많은 것을 거머쥐지 않았다고 해도 죽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두려움은 막연하고 희미한 형태에 그쳐야만 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언젠가는 죽기 마련인데, 공포를 코 밑에 달고 살다가는 미치기 십상이었다.

이미 죽음의 문턱을 몇 번이고 드나들어, 다른 사람보다 죽음과 가까운 나만 해도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하루를 어떻게 살아남을지 고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케이틀린 대제의 머릿속에는 죽음에 대한 꽤나 구체적인 상상이 자리 잡고 있는 듯했다.어떠한 계기로부터 태어나, 끊임없이 그녀의 귓가에 의심을 속삭이는, 악마가.

“너는 짐에게 미래를 주려 하지. 언젠가 짐의 아들에 의해 살해당할 미래 말이야. 짐이 짐의 아버지에게 그리하였듯이.”

케이틀린 대제 이전에 일레스티아를 통치했던 선황제의 죽음은 병사로 알려져 있었고, 지금까지 어떤 의혹에도 휩싸이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너무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를 접한 탓에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식은땀이 흐르고 다리가 절로 꼬였다.

“영원.”

내가 휘청거리거나 말거나, 케이틀린 대제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주인공은 짐에게 영원히 계속되는 현재를 줄 것이다. 짐이 너를 도와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가 아는 켈란은 병을 가장하여 어머니를 죽이려고 들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렇게 떠들어 봐야 소용이 없음을 직감했다. 그녀 스스로가 골라 지극히 잘 아는 선택지인 이상, 아무리 다른 가능성을 들이밀어도 머릿속을 지배한 악마를 몰아내기 힘들 것이었다.

블로썸의 정체를 바탕으로 이간질하는 것도 그만두기로 했다. 그건 케이틀린 대제가 시스템의 농간에 휘말려 블로썸에게 매료된 상황에서나 효과가 있을락 말락 했다.

애초에, 엄밀히 따지면, 케이틀린 대제는 블로썸을 ‘돕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방해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선사할 미래를 받고 싶지 않아서. 운명의 물레가 부서지기를 바라지 않아서. 시스템에 의해 무한히 반복되는 9개월이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었으므로.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서 켈란이 했던 말이 드디어 이해되었다.

“그렇다면, 저는, 도움을 바라지 않겠어요.”

그녀의 목적과 나의 목적이 상충되는 한 케이틀린 대제를 포섭하기란 불가능했다. 나는 깔끔하게 그녀를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내기를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대륙의 역사 교재의 탈을 쓴 케이틀린 대제의 위인전이 도움이 될 때가 있었다. 나는 야사에 따르면 지독한 도박광이라는 대제를 성공적으로 낚을 방법을 변덕스러운 그녀의 흥미가 떨어지기 전에 떠올려 내었다.

“짐과 내기를 하겠다고? 짐의 아들을 걸고?”

“아니요.”

케이틀린 대제가 간과하는 게 있었다. 내게는 확실히 켈란의 심장을 얻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그보다 비참히 되풀이되는 운명에서 그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역할에 심취한 거래도 상관없었다.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내기의 대가로 요구하는 건 스티아 신의 티아라예요.”

“호오.”

“내기의 형태는 마음대로 정하셔도 좋아요. 다만 제게 아예 불가능한 방식은 아니어야 해요. 내기가 성립이 되려면 어느 정도의 공정성은 확보해야 하잖아요.”

“그것 참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이거늘… 스티아 신의 티아라는 결코 쉽게 내어 줄 만한 것이 아냐. 황실의 보물이 걸린 내기라면, 짐이 이겼을 때에도 그에 상응하는 보물을 받아야 하겠지. 네게 그만한 가치를 지닌 물건이 있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만.”

확실히, 그녀가 말하는 대로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보물에는 보물인데, 한낱 소국의 자작가 영애에 불과한 내가 스티아 신의 티아라만큼 귀한 보물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다른 공략 대상의 증표, 즉 이그나스의 비늘이나 로즈마리 왕비의 귀걸이라면 비벼 볼만은 하겠으나 증표를 얻기 위해 증표를 버리는 건 바보짓이었다.

하다못해 목숨을 내놓겠다고 허세를 부리려 해도, 그녀에게 나를 죽일 마음이 없는 한 어림도 없었다. 나는 허를 찔려 입을 다물었다.

“아, 그렇다면 이렇게 하지!”

마르퀴즈 볼턴은 사도의 후손이자 대제라 불리는 케이틀린 대제를 상회하는 양의 신성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몸을 써먹어서인지, 케이틀린 대제는 마법진을 그리지 않고 손쉽게 전이 주문을 외웠다. 이윽고 그녀의 손바닥 위로 웬 금관이 나타났다.

엄청나게 귀중한 보물로 분류되는 것 치고, 스티아 신의 티아라는 그다지 정교하게 세공된 물건이 아니었다. 사용된 보석의 수도 적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부분에서 더욱 고대서부터 보존되어 온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만일 그것이 지나치게 섬세한 꼬임 장식과 형형색색의 보석으로 화려했더라면 가품이라는 의심이 들었을 듯했다.

전체적으로 짙게 가라앉은 색의 보석들 중 꽃봉오리처럼 꾸며진 중앙 부근의 사파이어가 유독 특별하게 느껴졌다. 잘 들여다보니, 주먹만 한 사파이어의 가운데 조그만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순간 불사조 수정이 연상되었으나 그것과는 약간 달랐다.

저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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