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18화 (118/178)

“칵스위턴의 마지막 타자 말이야. 퍼셀 공국의. 그 자식, 계속 네 쪽을 쳐다봤어.”

“미안했나 보지. 걔 땜에 머리 깨질 뻔했잖아, 나.”

하마터면 매력적인 동그라미 형태에서 벗어나게 될 뻔했던 두상을 과시하려다 이불과 베개로 가려져 보이지 않음을 깨닫고 말았다. 그랬더니 두상의 수호자 카일 빌라드는 목에 뭐라도 걸린 듯 떨떠름하게 웃고 나서 방을 나갔다.

“공을 치기 전에 말이야. 치고 나서가 아니라.”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카일이 덧붙였다.

“조심해, 아리. 나도 노력할 테니까. 널 지키기 위해.”

그의 말을 소화하기 위해 멍하니 있다가. 나는 이불 더미를 세게 껴안아 요란스레 차오르는 두려움을 짓눌렀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

누군가 나를 노리고 있다. 그 공포스러운 명제에 사로잡혀 수업 내용을 죄다 놓쳤다. 콘리 교수가 분홍색 분필로 칠판의 왼쪽 위부터 오른쪽 아래까지 빼곡하게 메우는 동안 내 공책에는 구불구불한 선만 잔뜩 생겼다.

드디어 외출 금지 징계가 풀려, 2학기 들어 처음으로 수업을 받는 에드가의 깃펜에도 열정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었다. 나돈은 그래도 수업을 듣는 시늉이라도 했는데, 얘는 마법 잉크로 나를 그린 다음 걔에게 웃긴 표정을 짓게 해서 내 주의를 끌려고나 했다.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에드가는 심통이 났다. 그가 손끝으로 날리는 종이쪽지들에 멍하니 볼을 대 주고 있다가, 불현듯 <패치 노트>의 존재가 떠올랐다. 나는 보름달을 본 늑대 인간처럼 갑자기 흉포해져서 에드가를 마구 때렸다.

콘리 교수가 면학 분위기를 흐리는 아리엘 달튼에게 또다시 추방을 명한 것과 내가 기다렸다는 듯 교실을 뛰쳐나간 것은 거의 동시였다.

별관 2층까지 쉼 없이 달리면서 문득 너무 작위적으로 굴지 않았나 싶었으나,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부디 뒤끝이 센 콘리 교수에게 찍히지 않았기만을 바라며 마도구 제작 실습실의 문을 열었다.

나를 해하려고 하는 존재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만한 것은 시스템이었으나, 카일도 나도 이번만은 시스템이 개입하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공을 쳐 날릴 때 칵스위턴의 타자는 지극히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패닝턴이나 조디, 월시와는 다르게.

블로썸도 아니었다. 카일은 내게로 쏘아진 공을 잡아채기 위해 비행하는 사이 블로썸을 봤다고 했다. 그리고 만약 블로썸에게 그만큼 놀란 표정을 가짜로 지을 만한 연기력이 있었더라면 연극부의 무대가 그 정도로 난장판이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최근에 내가 다치거나 다칠 뻔한 모든 사건에는 명확한 앞뒤가 있었다. 이번만 빼고. 거기서부터 곰곰이 되짚어 보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서 내가 아마도 자살을 기도했음을 알았다. 내게는 그때의 기억이 없었으므로, 타메니 강 사건의 경위는 이번 그리폰 크리켓 사건처럼 암흑에 묻혀 있었다.

<패치 노트>의 어느 부분은 동일한 암흑 속에서 기록되었다. 어쩌면 내가 다치길 바라는 누군가의 이름은 아니어도 작금의 사태를 설명할 증거물을 찾아낼지 몰랐다(이를테면, 만일 여자 기숙사의 빗물받이에 난 구멍을 5월 14일에 메꾼 이력을 확인한다면, 5월 13일이나 그 부근에 레이디 에드워즈가 구멍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맞았음을 추측해도 되었다.).

돌이켜 보았을 때, <패치 노트>가 별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던 카일의 모습에는 약간 어색한 구석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시스템과 블로썸마저 범접하지 못하는 유대가 있었으나, 그가 나의 자살 기도 사건을 철저히 숨기려고 했던 것을 떠올리면 카일이 온전한 진실을 말했다고 판단하기는 힘들었다.

버그를 고치고 나서 켈란과 나의 독서 모임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켈란은 <패치 노트>라는 게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했고.

그러니까, 어쩌면, 나는 비밀의 방에서 <패치 노트>를 찾을 수도 있었다. 아니, 찾아야만 했다. 2밖에 안 되는 지력을 완전 연소하여 이끌어 낸 결론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섰다. 마도구 제작 실습실에.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이끼로 뒤덮인 돌벽에 이마를 대고. 신성력에 반응하는 통로를 열 방법을 생각하지 못한 점이 패착이었다. 진짜 똥멍청이 아냐, 나?

“달튼.”

“여기에 난 이끼의 모양새 말인데, 커닝엄 교수님이랑 좀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어? 봐, 이 부분을 수염이라고 치면… 어, 뭐야. 볼턴이잖아.”

수상하게 벽을 더듬는 모습을 들켰을 때를 대비한 변명을 줄줄 읊다가 돌아보자, 유령처럼 창백하고 멀대처럼 키가 큰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마르퀴즈 볼턴이었다.

참으로 반가운 얼굴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손뼉을 치고 볼턴의 팔뚝을 잡아당겼다. 그는 독서 모임을 위해 켈란과 만나기로 약속한 나를 비밀의 방으로 데려다준 적이 더러 있었다.

“나랑 켈란이랑 여기서 독서 모임 했던 거 기억나지? 전에 두고 온 게 있어서 그러는데, 나 좀 들어가게 해 줘.”

“…….”

“그, 내가 두고 온 게 되게 은밀한, 숙녀라면 으레 가질 법한 비밀, 뭐 그런 거거든. 그래서 열기만 하고 가던 길 가 주면 정말 고마울 것 같은데… 볼턴?”

분명히 의식의 흐름으로 헛소리를 지껄이는 중인 건 나인데, 내 눈이 아니라 바닥 어드메를 보는 볼턴이 수상했다.

게다가 그는 냉혈한으로 여겨지는 것과 별개로 꽤나 수다쟁이였다. 나는 그와 일정 수준 이상 친해진 이후로 이토록 무뚝뚝하게 구는 볼턴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묘한 기운이 발뒤꿈치에 달라붙었다.

“뭔 일 있어?”

“아무것도. 손이나 내.”

볼턴이 허리께에서 달랑거리는 내 손을 낚아채 쥐었다. 불안정하게 날뛰는 신성력이 손에서 손을 타고 요동치며 들어왔다. 켈란이나, 하다못해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서 패닝턴의 손을 잡았을 때에도 접하지 못한 종류의 힘이었다.

나는 볼턴이 일레스티아에서 가장 강한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가장 난폭한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다시 한 번 발뒤꿈치가 무거워졌다.

그러나 지금이 비밀의 방에 드나들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나 외에 비밀의 방을 아는 사람은 켈란과 볼턴, 그리고 제임스 패닝턴이었으나 패닝턴은 자퇴한 지 오래였고 볼턴은 무슨 중책을 맡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근래 계속 바빠서 부르기가 애매했다.

또 블로썸의 감시를 피해 켈란과 대화할 겨를은 없다시피 했다. 나는 아치형 통로를 지나며 발끝을 바닥에 부딪쳐 발뒤꿈치에 묻은 불안을 털어 냈다.

볼턴은 비밀의 방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걸으면서도 침잠된 분위기 쇄신을 위한 나의 모든 시도를 침묵으로 쳐 내었다. 그래서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쯤 나는 매우 시무룩해졌다.

비밀의 방까지 멀지 않아서 살았다. 나는 간만에 마주하는 내 취향의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페가수스 태피스트리에 그리움을 느끼며 볼턴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가 봐도 된다는 뜻이었다.

통로에 인식 저해 마법이 걸려 있지 않은 것은 평행 세계에서 진작에 증명한 바가 있으니 볼턴은 내게 더는 쓸모가 없었다. 도리어 내가 비밀의 방을 뒤졌다는 걸 켈란에게 일러바칠 장애물이 되었으면 되었지.

“야, 뭐 하는 거야? 빨리 안 나가? 숙녀의 비밀이라니까?”

그런데, 도무지 손모가지가 빠져라 손을 흔들어 대도 옴짝달싹을 않는 것이 아닌가. 수상하기 그지없는 마르퀴즈 볼턴이. 줄곧 유지하던 불안한 침묵을 고수한 채로.

두어 걸음가량 발을 물렸다가, 다시 앞으로 갔다. 공략 대상인 볼턴이 월시나 몇몇 배경 인물들처럼 시스템에 먹힐 가능성은 극히 드물었다. 그렇다면 난데없이 이상하게 굴 만한 사정이 있다는 건데, 그게 뭔지 궁금했다.

재수 털려도 친구였다. 내 관심의 바다에 떠다니는 부표 중 하나쯤 볼턴의 것으로 두어도 나쁘지 않겠다고 판단했다.

“젠장… 젠장할!”

그릇된 판단이었다.

“대체 왜… 아악!”

시야가 기울어진다고 느꼈을 때 등이 바닥에 부딪혔다. 골이 띵하게 울린 뒤에는 목덜미에 뭐가 닿았다. 커다랗고 뼈가 툭 불거진 손이었다.

볼턴의 손이 목덜미에 가볍게 닿은 찰나 저변에 묻어 두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카일의 절박한 표정, 입술을 비집고 흐르던 피, 절규… 숨이 사라진 자리를 마구잡이로 치고 들어오던 고통.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프게 할 마음은 없어. 내게 필요한 건 두려움이니, 다치는 정도가 중요하지는 않아. 가만히만 있으면….”

누구에게 건넨다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듯한 중얼거림이 귀를 메웠다. 이윽고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가락들이 목줄기를 완전히 감쌌다. 삽시간에 전신에서 피가 모조리 빠져나간 마냥 추워졌다.

신성력에 묶인 와중에도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버둥거리는 내 허벅지를 볼턴이 무릎으로 눌러 제압했다. 약하게 신음하는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미간은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갑자기 엄청난 명배우로 거듭난 것이 아니라면, 볼턴이 지금 상황을 나만큼이나 달가워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저항하기를 멈췄다. 대신 볼턴을 봤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그의 가느다란 신경이 높다란 마음의 벽에 난 틈새로 기어들어 가 심장을 쿡쿡 찌르도록. 아니나 다를까, 힘 빠진 손바닥이 나의 목에서 미끄러져 마침내 바닥을 짚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안 돼… 못 하겠어. 못 하겠다고. 나는… 부디, 폐하… 스티아시여!”

단말마 같은 외침과 함께 볼턴이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얼핏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안이 벙벙하여 멍하니 있다가, 나는 볼턴의 용태를 살피기 위해 그에게 아주 조금 다가갔다.

그때였다. 긴 머리카락이 바짝 솟아오르며 고개가 치켜 들렸다. 어둑하게 그림자가 드리운 청회색 동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게 확장되어 있었다. 뾰족한 콧날 아래 얇은 입술은 안색만큼 희게 질린 채였다.

덩치에 비해 비쩍 마른 볼턴의 턱뼈는 날카롭게 튀어나와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곧 콧대 위로 미끄러지기 시작한 안경을 따라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