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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17화 (117/178)

“그보다 휴스턴 교수님, 언제부터 브래들리를 지지하시기로 한 거야? 망토에 백합 무늬가 있던데.”

치마에 이어 망토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는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카일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지지하기로 한 적 없어. 교수님은 자기가 백합 무늬 망토를 입고 다니는 줄도 모를걸.”

켄드라가 나와 제이든의 원조를 받아 휴스턴 교수와 약속한 내용은 ‘세 번에 한해 켄드라 브래들리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었다. 켄드라의 첫 번째 부탁은 망토를 교체해 달라는 거였고. 원래 휴스턴 교수가 걸치고 다니던 망토가 붉은색에 가까워, 퍼셀 공국을 연상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휴스턴 교수는 퍼셀 공국의 붉은색도, 브래들리 공작가의 금색도 아닌 검은색이 과하다고 여기지 않았으므로 그녀가 내미는 망토를 받아들였다. 일부가 빛을 다르게 반사하는 옷감으로 누벼져, 움직일 때마다 켄드라 브래들리를 상징하는 백합 무늬가 언뜻언뜻 나타나는 망토를 말이다.

만일 휴스턴 교수가 옷을 착용하기 전에 꼼꼼히 확인하거나, 거울에 전신을 자주 비추는 사람이었다면 통하지 않을 잔꾀였다. 하지만, 슬프게도, 전형적인 마법사인 휴스턴 교수는 옷이나 옷감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더구나 사무적이기 그지없는 태도 탓에 옷차림 같은 신변잡기를 주제로 그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가 망토에 얽힌 비밀을 풀어냈을 때에는 아마도 대부분의 피츠시몬스가 휴스턴 교수를 브래들리 지지자로 착각한 뒤일 것이었다.

요새 켄드라 브래들리 선대위에서 가장 활발히 토론이 이루어지는 주제는 과연 휴스턴 교수가 언제쯤 켄드라에게 속아 넘어갔음을 깨달을 것인가였다. 나는 ‘올해 안에 못 알아챈다’에 그리폰 크리켓 경기를 가지고 벌린 내기와는 비교도 안 될 금액을 걸었다.

이미 휴스턴 교수를 너무나도 동경하는 나머지 그가 하는 거라면 뭐든지 따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콘리 교수는 켄드라에게 접촉을 시도했다. 그녀가 비마탑 파벌을 등에 업고 퍼셀 따위가 다다를 수 없는 지지율을 확보하기까지는 머지않은 듯했다.

내가 설명을 마침과 동시에 카일이 혀를 내둘렀다.

“브래들리도 진짜 독하다. 그렇게 안 해도 충분할 텐데.”

나는 카일에게 동의하지 않았다. 수면 밑의 지지층이 실은 엄청나게 확고해서, 막말로 연단에 똥을 싸질러도 켄드라 브래들리가 학생회장에 당선될 것을 아는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켄드라 입장에서는 절박하겠지. 열성적으로 말하자 카일은 대충 수긍한 뒤에 화제를 전환했다.

“그럼 이제 가 볼까?”

“어디를?”

“거짓을 진실로 만들어야지.”

잠깐 얼떨떨했다가, 휴스턴 교수에게 둘러댄 내용을 말하는 것을 깨닫고 끄덕였다. 어차피 돌아가려던 참이기는 했다. 블로썸이 공략 대상들과 노닥거리는 걸 구경해 봐야 재미도 없고. 괜히 기분만 잡치지.

나는 켈란의 팔을 잡아끌어 안던 블로썸을 떠올렸다. 다음으로는 소꿉친구들만의 특별한 손인사를 나누던 블로썸을 돌이켰다. 절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영광스럽게도 네게 팔꿈치를 허락해 준 학생회의 공주님이 기다리고 계실 텐데.”

“맙소사, 아리. 질투하는 거야? 나 막 감격스러우려고 해.”

카일이 하도 짜증 나게 굴어서 내 볼은 온통 열기로 뜨끈뜨끈했다. 어쩌면 취기가 오르는 거일 수도 있었다. 초콜릿 속에 쥐똥만큼 담긴 것도 술은 술이라고, 한꺼번에 다 때려 부었더니 기분이 살짝 뜨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랬다.

답지 않게 조용히 있었다. 그랬더니 카일은 뭘 생각했는지 뒷머리를 벅벅 긁다가 바로 실토했다.

“모든 이벤트에 낄 필요가 없다는 게 서브 캐릭터의 좋은 점이지.”

말인즉슨 서브 캐릭터가 아닌 켈란은 아직도 블로썸과 함께 이벤트를 즐기는 중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약간 우울했다가, 다른 공략 대상 말고 카일이 서브 캐릭터라 다행이라고 느꼈다. 만일 그가 이벤트에 묶여 있는 꼴이었다면 곁에 누가 있는대도 안심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발랄하게 굴었다. 농담의 달 연회 이야기를 꺼냈더니 올 초에 이야기했던 스무 마리 가짜 뱀을 양도한다기에 더 신이 났다. 마침 듀라한을 구현하는 데 꼭 필요한 투명 옷감을 제이든이 잃어버린 탓에 다른 분장을 떠올려야 하는 참이었다.

연회가 코앞인데 분장 콘셉트를 바꾸는 이유를 묻자, 카일은 능숙하게 말을 돌리다가 갑자기 솔직하게 굴고 싶어졌는지 올해는 좀 멋있는 걸 하고 싶다고 그랬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동작이 어색해서, 나는 그의 발화가 다소 충동적임을 짐작했다.

내 기억에 얘는 단 한 번도 멋을 이유로 최고의 농담 트로피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헐벗은 스티아 사도 분장을 할 켈란이 신경 쓰여서일까. 리즈와 브레넌과 함께했던 식사 자리에서 내가 어땠는지를 돌이키다가, 불현듯 너무 자의식 과잉 같이 느껴져서 그만두었다.

카일이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얘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적절치 않았다.

멍 때리는 사이 기숙사에 도착했다. 방문을 열어젖히자 싸늘한 기운만이 나를 맞았다. 새로이 지루한 대회를 앞둔 브리아나 모슬리가 그녀의 성과에 따라 천사가 될 수도, 악마가 될 수도 있는 오우거 조교 이디스와 맹훈련 중인 탓이었다.

가방과 외투, 망토를 차례차례 벽에 건 뒤에 카일을 돌아봤다.

“고마워.”

브리아나의 침대 머리맡에 놓인 <니베이아 모험기 : 밀루아의 역사적 미남들>을 뒤적거리던 카일이 나의 맥락 없는 살가운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까 말하지 않았어? 시간이 또 돌아갔나?”

“휴스턴 교수 말고. 경기에서.”

카일이 마침 내 주위에 있지 않았다면, 그리폰을 부리거나 글러브를 다루는 카일의 솜씨가 조금이라도 서툴렀다면 정말 심각한 부상을 입을 뻔했다. 침대가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대꾸하자 카일이 시원스레 웃어 보였다.

“드디어 네 소꿉친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깨달은 거야?”

“응.”

“이… 상하다. 내 청개구리가 웬일로 이렇게 예쁘게 굴지? 너 혹시 아까 공에 맞았어? 아니면 뭐 잘못 먹었어? 열나나?”

“아이, 씨.”

큰마음을 먹고 긍정해 주었는데 심각하게 의문스러워하기에 성질이 났다. 아주 잘해 줘도 지랄이었다. 이마에 손바닥을 얹은 카일에게 마구 주먹을 내지르자 낄낄거리면서도 다 피해서 숨만 가빠졌다.

한편으로는 스리슬쩍 죄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대수롭지도 않은 말을 대수로이 여길 만큼 내가 얘를 모질게 대했던가? 혀끝을 감도는 술 냄새 때문인지 괜히 감상적이 되었다. 콧잔등에 주름을 잡고 말을 이었다.

“네가 지금 나랑 같이 있는 게, 그게 좋아서 그래.”

내가 아직 반복되는 시간에 대한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고 막연히 헤매던 때. 블로썸과 카일의 관계를 의심하며 땅이나 파던 때. 그때에도 카일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잠에서 깨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빨간 머리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고작 나와 사이가 나쁜 애랑 팔꿈치를 부딪쳤다는 거 하나에 토라지는 주제에 호의와 애정은 당연하게 여길 줄이나 아는 스스로가 유치하게 느껴졌다. 항상 같은 자리에 있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이디스의 말마따나, 나에게는 변하지 않는 것을 소중히 여길 필요성이 있었다.

반성하다 보니 힘이 빠졌다. 나는 쓰러지듯 뒤로 누웠다. 일그러진 육각형의 나무 격자 장식이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이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심장이 두근대는 것과 비슷했다.

울렁이는 천장이 왜인지 모르게 웃음을 유발했다. 그래서 한참을 키득거리는데, 별안간 허공에 카일이 나타났다. 즐거운 기운이 덜 가신 녹색 눈에는 약간의 걱정하는 빛이 담겨 있었다.

“너 괜찮아?”

나는 기세 좋게 엄지를 세웠다. 시계추처럼 휘청대며 치켜든 엄지를 카일이 한심스럽다는 듯이 흘겼다. 그것을 부드럽게 잡아 내리고 나서, 그는 내 곁에 앉았다.

남자의 무게가 더해지자 매트리스가 크게 흔들렸다. 나는 누운 자세 그대로 고개만 까닥여 카일을 봤다. 그는 내 손목에 매달린 팔찌를 만지작대는 중이었다. 몇 번이고 끊어졌다 도로 붙은 내 명줄처럼 너덜거리는 끈 팔찌는 언젠가 그가 내게 손수 채워 주었던 것이었다.

팔찌의 매듭을 손끝으로 굴리던 카일의 엄지가 불현듯 팔찌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윽고 집요한 손길이 느껴졌다. 손목 바깥쪽으로 살짝 도드라진 부분을 따라 올라가던 감각은 꽤나 오래도록 손바닥 아래 튀어나온 뼈에 머물렀다. 약간 끈적하지 않나 생각한 순간 시선이 맞았다.

때로는 말로 하지 않아서 더욱 와 닿는 것이 있었다. 나는 카일이 입맞춤을 갈망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소꿉장난 같은 뽀뽀가 아니라, 그보다 더욱 깊은 교감을.

그가 허리를 구부리자 공략 대상을 장식하던 반짝거리는 효과들이 마구 쏟아졌다. 온 얼굴로 유성을 받는 기분이었다. 귓속으로는 누가 거기서 뜀박질이라도 하는 마냥 쿵쿵대는 소리가 끊임이 없었다.

마녀의 길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의 뺨을 갈길 수 있었다. 꺼지라고 소리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팔을 뻗어 카일의 목덜미에 둘렀다.

오늘이 지나면 나는 이 밤의 행동들을 땅 치며 후회하고 두 번 다시 술을 입에도 대지 않으리라. 그런 확신이 들었으므로 도리어 단호하게 나왔다. 절반은 장난이었고 나머지 반의 반은 치기였으며 사 분의 일은….

피하지 않는 내 모습에, 카일은 오히려 당황한 듯했다.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바뀌었다. 어느 순간은 환희에 차 보였고, 어느 순간은 슬퍼 보였는데, 다음 순간에는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러나 마침내는 한 손으로 내 어깨 근처를, 다른 손으로 얼굴 바로 옆을 짚고 기대었다.

누운 자리가 올록볼록해져서 불편했다. 안정적인 자세를 찾기 위해 꿈지럭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할 쯤에 조심스러운 손가락이 귀 아래에 닿았다.

상대가 눈을 감지 않아서 내가 눈을 감았다. 시각이 차단된 상태에서 습한 숨이 입술에 닿으니까 덜컥 겁이 났다. 죄다 버겁고 혼란스럽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 신중했다고 오만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카일과는 아직 친구인데 이래도 되는 걸까? 지금이라도 밀어낼까? 아냐. 하지만. 그래도. 실은….

“안 할래.”

후터분하던 공기가 급변했다. 슬며시 눈을 뜨자 카일은 아까처럼 멀찍이서 나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방금 키스하려던 애치고는 너무 말끔한 안색이어서 이상했다.

“왜?”

“그냥. 지금은 싫어. 잠이나 자.”

그가 이불 귀퉁이를 집어 내 위로 덮었다. 그러고 나서는 부피가 어느 정도 있으면서도 가벼운 물건을 두 개쯤 얹었다. 곰곰이 추측하기로 그것들의 정체는 나와 내 룸메이트의 베개였다.

“아리엘.”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침구의 미로에서 빠져나오다가, 불현듯 이름이 불리어 멈췄다. 그가 나를 ‘아리’가 아니라 ‘아리엘’이라고 부를 때는 보통 진지하게 굴어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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