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라. 그건 공략 대상인 에드가를 통해 듣기에는 꽤나 흥미로운 단어였다. 아까까지 블로썸을 보고 있었던 탓에, 그것에 대해 골몰하지 않기가 힘들었다.
고룡 이그나스의 비늘과, 반쪽이기는 해도 로즈마리 왕비의 귀걸이를 손에 넣었다. 에드가와 제이든이 운명의 물레의 지배에서 다소나마 벗어났음은 분명해 보였다.
블로썸이 나를 방해물로 여기고 없애려 했던 이유는 켈란이 스스로의 운명을 거부한 탓이었다. 공략 대상 중 두 명이나 비슷한 상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블로썸이 별다른 조치를 않는다는 건, 아무리 나라도 마냥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물론 케이틀린 대제의 조언을 수용하여 시스템의 완전 붕괴를 방지하고자 울며 겨자 먹기로 모른 체하는 중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여유로운 태도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녀와 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돌이켜 보면, 블로썸은 반드시 이번 시도에 목표를 이루어야만 했다. 거기에 뭐가 걸려 있건 간에 여간 엄청난 게 아닐 거라고 직감했다.
그런데 시월도 거의 막바지인 시점에, 평화롭게 카일이랑 팔꿈치나 부딪치고 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연스러웠다.
“네 방에 두고 간 귀걸이 말인데, 왕비 전하가 가장 아끼던 거야. 그녀가 지금보다 덜 미쳤을 때 나와 브라이스에게 나눠 줬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에드가가 마침 그의 증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어색하게 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남은 반쪽의 행방을 물었다. 선물은 받고 마음은 안 받는 자작가 영애가 왕자에게 괘씸하거나 치사하게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말이다.
어느 정도 속물적으로 보일 각오는 했다. 내게도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사정이 있었으므로.
다행히, 에드가는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겨를이 없는 듯했다. 그는 새로운 크래커를 유제품으로 만드는 동안 계속해서 내 어깨 너머를 흘끔거렸다.
슬쩍 돌아보니 휴스턴 교수가 여러 천막을 드나들며 외출 금지 명령을 어긴 범인과 칵스위턴 응원단석에 끈적한 슬라임을 푼 범인에 덤으로 평범한 초콜릿을 술이 들어간 초콜릿으로 바꿔치기한 범인을 찾는 중이었다.
셋 중에 둘이 내 죄였고 나머지 하나는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의 죄였다. 꼬리라도 밟혔다간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것을 확신했다.
나는 남은 초콜릿을 한입에 욱여넣은 뒤 에드가의 손아귀에 포장지를 쥐여 줌으로써 증거를 인멸했다. 그러자 그가 동그란 초콜릿들 때문에 올록볼록해진 내 볼을 쿡 찌르더니 말을 이었다.
“걱정 마, 조만간 받아 올 테니까. 걔가 나한테 크게 빚질 만한 일이 있거든.”
“망히호어에게 대시 히껴주는 거호다 더?”
“훨씬 더.”
에드가의 나돈 왕실 내 위치를 고려하면, 그건 만티코어에게 대신 찢겨 주는 것보다 위험한 일이라는 뜻이 되었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물론 에드가는 공략 대상이었고, 시스템에 있어 나 같은 배경 인물과는 격이 다른 존재감을 가졌다. 내게 문제가 생긴다고 해서 게임에 장애가 생기는 경우는 없을 테지만, 공략 대상은 아니었으므로, 남 걱정할 시간에 내 신변이나 챙기라는 잔소리를 카일로부터 몇 번이나 들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다 보면 통 와닿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블로썸에게는 이 모든 난리가 그저 게임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나에게는 현실이었다. 선 긋고 멀찍이 볼 줄 아는 카일이 대단한 거지.
초콜릿을 열심히 씹어 넘기고 나서, 나는 크래커와 치즈들이 놓인 테이블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그런 뒤에는 테이블보 사이로 얼굴만 쏙 내밀었다.
“너 나랑 약속했던 거 기억나지? 내 소원?”
“어, 지금 뭐 하는 건지 물어봐도 돼?”
“신경 쓰지 마. 네가 자꾸 내 뒤를 쳐다보는 거랑 같은 이유니까. 대답이나 해.”
“네 소원 말이야? 어디 보자… 예물에 반드시 불사조 수정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야!”
카일이 불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택하는 방법이 주로 침묵이라면, 에드가 라모스는 딴소리였다. 버럭 소리를 지르니까 에드가는 천막 바깥쪽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쪼그려 앉았다.
이윽고 두터운 아마색 테이블보로 시야가 암전되었다. 마침내 마나의 거센 움직임을 감지한 휴스턴 교수의 다급한 구둣발 소리보다 먼저 내 귀에 꽂힌 것은 사뭇 진지한 속삭임이었다.
“안 잊었지. 누구랑 한 약속인데.”
***
끈질긴 휴스턴 교수는 외출 금지 명령을 어긴 범인이 초콜릿을 바꿔치기한 범인의 증거물을 가지고 사라진 자리에 한참이나 머물렀다. 나는 그가 이 좁다란 천막에서 갑자기 길을 잃은 방랑자처럼 마구 돌아다니는 동안 상념에 잠겼다.
에드가와 나의 친분이 만들어진 계기는 게임의 이벤트였다. 월시가 판 함정에 빠져 블로썸에게서 가로챈, 실습용 마도구 보관실 사건 말이다. 그걸 따지면 그와 내가 구축한 관계가 시스템과 아예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제이든 역시 마찬가지였다. 블로썸에게 대항하여 독자 노선을 구축하고자 마음먹기 이전에, 나는 카일의 도움을 받아 글로윈 숲을 헤매며 제이든의 이벤트를 봤다. 이그나스의 비늘을 얻는 데에 그것이 지대한 역할을 했음을 부정할 만큼 뻔뻔하지는 않았다.
결론적으로, 나에 대한 호감으로 그들이 운명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지언정 결국 그 호감의 기반은 운명에 있었다는 거다. 적어도 두 사람에게 있어 물레와 나는 완전히 분리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만일 시스템이 전복되어 운명의 물레가 무너질 경우, 에드가와 제이든이 갖고 있는 나에 대한 감정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남아 있나? 없어지나? 과연 어느 쪽이 모두에게 있어 다행인 걸까?
진엔딩 이후에 대해 물었을 때 블로썸은 알 게 뭐냐고 답했다. 말인즉슨 진엔딩 이후의 세계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내 감이 맞는다면, 목적을 달성한 순간 블로썸은 이 세계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원하는 게 단순히 잘생긴 남자애들에게 둘러싸인 채 졸업하는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로썸과 우리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던 카일의 말이 떠올랐다. 플로렌스 벨이 입학 이전에 없는 사람이었다는 켈란의 말도. 그것들을 전부 고려했을 때, 주인공은 게임과 완전히 별개의 존재라고 보는 게 맞을 듯했다.
반면 나는 게임 속 등장인물이었다. 나와 게임은 별개일 수 없었다. 진엔딩 이후의 세계이든 운명의 물레가 부서진 세계이든 나는 살아가야 했다. 졸업 연회가 슬슬 눈에 보이는 시기가 되어서인지 울컥울컥 두려움이 일었다.
생각에 골몰해 있는 동안 휴스턴 교수의 동태를 충분히 살피지 않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 인기척은 내가 숨어 있는 테이블의 바로 근처에 있었다. 깜짝 놀라 들썩였다가, 잘못하고 테이블 상판에 머리를 박았다.
환청이라 우기면 납득할 만은 하나 아예 무시하기는 어려운 만큼의 소음이 일었다. 테이블보와 바닥 사이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휴스턴 교수의 구두가 못 박힌 듯 멎었다.
“제이든은 저쪽 천막에 있는데요.”
아슬아슬한 순간에 극적으로 끼어들어 온 목소리는 반갑고도 친숙한 카일 빌라드의 것이었다. 나는 한계까지 참았던 숨을 살며시 뱉어냈다. 사촌 형제가 아니라 흉악범을 찾아 헤매던 휴스턴 교수가 뭐라 설명할 새도 없이, 명랑한 목소리가 빠르게 이어졌다.
“슬라임이요? 아니면 술 초콜릿? 어느 쪽이든 악마 같은 제 소꿉친구가 충분히 저지를 법한 짓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번엔 걔 탓을 하기 어렵겠네요. 외뿔소 우유로 만든 치즈를 잘못 먹었다고 해서, 경기 전에 기숙사까지 데려다주고 왔거든요.”
“외뿔소?”
“알레르기가 있어요. 아직도 화장실에 틀어박혀 있을걸요. 위아래로 막, 어휴….”
“달튼이 아니라면….
“아시겠지만, 제가 수상하게 굴었다면 진작에 누가 일러바쳤을 거예요. 승리의 주역에게는 이목이 따른다고요.”
카일의 혀는 너무 기름져서 고슴도치의 등에서도 미끄러질 수 있을 듯했다. 두어 번의 공방 만에 휴스턴 교수는 전의를 모조리 잃고 말았다.
“지켜보마, 빌라드.”
이를 악문 으름장에 이어, 다시금 구둣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완벽히 같은 간극을 두고 점점 멀어지던 그것이 아예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아까처럼 테이블보 사이로 머리를 빼 바로 보이는 카일의 정강이를 들이받았다.
“‘위아래로 막’? 너 그게 숙녀한테 갖다 댈 소리야?”
“아야!”
실실 웃으며 엄살을 부리는 꼴이 재수 없었다. 나는 달튼의 돌주먹으로 카일을 조금 더 응징하고 나서 방금 그가 지껄였던 멋대가리 없는 변명에 대해 따졌다. 그러자 카일은 멋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나를 또 구했다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생색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빨리 고마워하지 않으면 공치사로 귀가 메워지는 경험을 할 것만 같았다. 내키지 않는 감사의 말을 웅얼거렸더니 카일은 뻔뻔하게도 ‘오냐’라고 대꾸했다. 진짜 얄미워 죽겠다.
“근데 범인이 나인지는 어떻게 알았어?”
“끈적한 슬라임 소환 주문은 내가 너한테 알려 준 거잖아. 또 연회장에서 술이 발견되었다는데, 나 아니면 너밖에 더 있어? 근데 나는 아니니까.”
“젠장할, 카일 빌라드. 내 생각에 우리는 조금 거리를 둘 필요가 있어.”
“미안하지만, 아리엘 달튼. 아무리 너라도 내게서 너를 앗아갈 수는 없어.”
카일이 천연덕스럽게 받아치며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것 같았다. 나는 살짝 더워지는 것을 느끼며 카일의 도움을 받아 테이블 감옥에서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