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15화 (115/178)

후퍼 교수가 경기 종료를 선언함과 동시에 패배자의 빨간 깃발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자 피츠시몬스 응원단은 큰북을 등에 지고 시무룩하게 공간 이동 마법진으로 향하는 칵스위턴 응원단의 뒤꽁무니에 기다렸다는 듯이 달라붙어서는 놀려 대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켈리는 유달리 신이 났다. 켈리가 얼마나 지독하게 굴었냐면, 몇몇이 분에 못 이겨 눈물을 보일 정도였다.

의기양양하게 교정을 행진하고 나서 경기장으로 돌아왔다. 극적인 경기의 여운이 남아 어수선한 가운데 천막 너덧 개가 세워져 있었다. 승리를 축하하는 간이 연회가 열린 모양이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와중이라, 천막의 가장자리엔 픽시 구슬과 조명 도구가 번갈아 매달린 채였다. 나는 아직도 광란의 도가니인 그리폰 크리켓부 애들을 지나쳐 카일과 제이든을 찾았다.

가는 길에 마련된 초콜릿 상자를 며칠 전 이디스가 사다 놓은 술 초콜릿으로 바꿔치기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어차피 난리 통이니 술에 취했는지 승리감에 취했는지도 모를 것이었다.

눈에 띄는 빨간 머리에 항상 설치며 다니는 카일과,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제이든을 발견하기란 어디서든 어렵지 않았다.

경기장의 중앙에 둥글게 모인 인파가 후퍼 교수를 내던지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폰 크리켓부의 고문이기도 하고, 이번 경기의 심판을 볼 때 은근슬쩍 피츠시몬스의 편의를 봐주기도 해서 그가 승리에 기여한 바를 헹가래로 치하하려 했던 모양인데, 각자 힘을 쓰는 정도가 달라 벌어진 참사였다.

후퍼 교수에 이어 노먼 케이시가 바닥을 뒹굴자 나는 카일이나 제이든에게 똑같은 사달이 벌어지기 전에 서두를 필요성을 느꼈다. 특히나 머리통을 깨 먹을 뻔했던 나에게는 카일에게 표할 개인적인 감사의 뜻이 있었으므로, 적어도 그를 메다꽂는 손 중 하나는 내 것이어야 마땅했다.

잔뜩 흥분한 무리를 헤치며 나아가는데, 별안간 픽시 구슬보다 환한 금발의 여자애가 그보다 더 환한 미소를 띠고 등장했다. 그녀가 등을 살짝 두드리자 입꼬리를 귀에 걸고 고개를 돌린 것은 틀림없는 나의 소꿉친구였다.

‘사랑하는 남자’ 스위치가 켜진 카일의 모습은 너무 간만이라서, 기분이 되게 이상해졌다. 걔가 속으로 뭘 생각하는지 아는 나로서도 헷갈릴 정도로 친근해 보였던 것이다.

심지어 카일은 블로썸과 손바닥, 주먹, 팔꿈치를 차례로 맞부딪치기까지 했다. 그건 신이 났을 때 나와 나누곤 하는 인사 동작이었다.

확실히, 세계가 어쨌든 시스템이 어쨌든 로즈마리 블로썸이 피츠시몬스에서 가지는 영향력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합류하자 무슨 마물 떼의 저주 의식 같던 분위기가 일변했다.

성별을 막론한 동경의 눈초리가 블로썸에게 모였다. 몇몇은 강한 신성력을 보유하여 성녀 에이레네의 현신이라 불리는 블로썸인 만큼, 그녀가 나눠 주었던 물통이 선수들에게 축복을 내린 게 확실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곧 공주님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나타나는 학생회도 모습을 보였다. 나돈과 볼턴, 그리고 켈란 말이다. 꽃이며 반짝이며 다양한 효과들로 눈이 시려운 꼴을 보고 있노라니 불청객이 될 의욕이 아예 사라졌다.

경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카일이나 누가 내 존재를 눈치챌 거 같지도 않았다. 쟤랑 공략 대상의 연애 감정을 걸고 경쟁하기를 때려치운 건 정말이지 훌륭한 결정이라고 되뇌며, 나는 미련 없이 발을 돌렸다.

그리고 언제부터 내게 향해 있었는지 모를 새빨간 눈과 마주쳤다.

“뭐야, 그 시무룩한 표정은? 안 반가워?”

“너, 왜, 너 아직 징계 중 아냐?”

“제발, 미스 달튼. 정말로 콘리 교수가 나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음, 아니, 나는….”

그야 당연히 아니었다. 국경도 집 드나들듯 하는데, 한낱 아카데미의 결계쯤이야 얘한테는 애들 장난이나 다름이 없을 거였다. 나는 불쾌하다는 듯이 인상을 구긴 에드가에게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네가 성실하게 반성하기로 마음먹은 줄 알았지.”

만일 에드가에게 교칙을 어기고 아카데미를 누빌 마음이 있었다면 진작에 그렇게 했을 거였다. 그러니만큼 에드가의 두문불출은 어디까지나 그의 의지였다. 지극히 논리적으로 말하자 에드가는 약간 조용해졌다가 이내 험악스레 중얼거렸다.

“그랬지. 그랬는데… 무지하게 웃긴 이야기를 들었지 뭐야.”

“뭐?”

반사적으로 되묻고 나서, 별안간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래에 그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또 검술 대회에서 월시를 구워 버린 후에 눈이 마주쳤을 때 에드가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도 말이다.

습관처럼 눈을 굴려 도망갈 거리를 찾다가 금방 그만두었다. 내 저울에서 에드가와 제이든은 완벽히 수평을 이루고 있었고, 나는 누구의 마음을 손에 쥐고 계산할 만큼의 담도 지력도 없는 소인배였다.

긴장을 삭이기 위해 이디스의 초콜릿을 왕창 씹어 먹었다. 혀 아래로 쌉싸름한 맛이 감돌았다.

“왜 내 고백은 씹냐, 너?”

내가 초콜릿을 우물거리는 동안 선수를 친 쪽은 에드가였다. 나는 깜짝 놀라 허둥거리다가 그만 딸꾹질 말고 에드가에게 건넬 대답을 목구멍으로 넘겨 버렸다.

벌어진 주둥이에서 말이 아니라 히끅 소리가 새어 나왔을 때, 에드가는 질린다는 듯이 입꼬리를 깊게 당겼다.

“됐어.”

일순 영원하게까지 느껴진 정적 끝에, 참았던 무언가를 끄집어내듯이 말이 뱉어졌다. 언뜻 태연을 가장하는 말투였지만, 간간히 성마른 어조가 손끝에 박힌 가시처럼 튀어나왔다. ‘네 시선이 내 시선과 다르다는 건 알아.’

“너 맨날 걔 보고 있잖아. 켈란 일레스티아. 브라이스도 그러던데, 뭐.”

상냥한 내 친구 브리아나 모슬리는 일단 아니라고 말해 주었지만, 아무래도 내 이마나 얼굴 어디에 ‘사랑해요 켈란 일레스티아’가 쓰여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멍청하게 딸꾹거리는 한편 당황하여 손등으로 얼굴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마찰로 인해 볼에서 뜨뜻한 기운이 오를 쯤에, 에드가는 옅은 한숨과 함께 내 손을 잡아 내렸다. 그러고는 나의 한심스러운 행동을 지적하는 대신 크래커에 크림치즈를 치덕치덕 바르면서 투덜거리기나 했다.

“살면서 거절당한 적이 별로 없어서, 자존심 엄청 상했다고. 그것도 한낱 자작가 영애한테는. 이래봬도 왕자잖아, 나.”

장난기 가득한 어조에 눈치 없이 입매가 둥글어졌다. 내가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자, 에드가는 사람을 무자비하게 걷어찬 주제에 비웃지 말라고 짜증을 부렸다. 그마저도 부자연스러울 만큼 과장된 반응이어서 더욱 우스웠다.

그건 에드가식의 배려처럼 느껴졌다. 스스로의 실연을 아무렇지 않게 언급하는 거 말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낱 자작가 영애 운운을 이만큼 기분 안 나쁘게 하기도 어려울 거였다. 나는 피츠시몬스 내 대표적 계급주의자로 꼽히는 페드로 캔트렐에게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과는 기분이 전혀 달랐다.

덕분에 다소나마 차분해질 수 있었다. 에드가가 크림치즈 위에 다진 고추가 점점이 박힌 덩어리 치즈, 노랗고 납작한 치즈, 잘게 갈린 치즈를 차례차례 올리는 동안 겨우 속을 가라앉혔다. 나는 딸꾹질과 다음 딸꾹질의 사이에 급히 사과의 말을 끼워 넣었다.

“미안하게 됐네… 한낱 자작가 영애 주제에 왕자를 차서.”

“미안하면 받아 주든가.”

이제 당과류보다 유제품에 가까워진 크래커를 한입에 던져 넣은 에드가가 심드렁하게 웅얼거렸다. 나는 짝사랑을 들킨 데서 오는 부끄러움과 누군가의 마음을 밀어낸 데서 오는 죄책감을 가리고자 무아지경으로 초콜릿을 삼키다가 그만 딸꾹질에 이어 사레에 들려 버렸다.

“켁, 크흡, 포기하는, 거, 아니었어?”

“뭘? 널? 내가? 왜?”

“됐다며? 자존심 상한다며? 그, 안다고 했잖아. 내가, 켈란을….”

“그래, 알아. 걔한테 빠진 거. 비참하니까 내 입으로 말하게 하지 마라.”

“…….”

“근데 아까도 말했다시피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말이야. 이대로는 못 물러나겠거든.”

“어쩌려고?”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아, 미스 달튼. 그대는 내가 아무런 대가 없이 유혹할 처음이자 마지막 여자가 될 테니까.”

자신만만하게 턱을 치켜드는 에드가에게서는 오만함뿐만 아니라 교만함마저 느껴졌는데, 그게 그와 놀라우리만치 어울렸기 때문에 조금도 불쾌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나는 농담으로 받아치는 것과 쐐기를 박아 주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덜 불편할지 가늠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에게 할 말이 남은 듯해서였다.

“그러게 누가 반하게 만들래? 엄연히 네 잘못이야, 이거.”

약간 망설이다가 입을 연 에드가의 손에 네모난 물건이 쥐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건 내가 그의 생일에 선물한 음성 녹음 및 재생용 마도구였다. 그새 험한 일이라도 겪었는지 상태가 말이 아니었는데, 녹음에 쓰이는 부품은 동강 난 지 오래였고, 음성이 나오는 부분은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였다.

재생 버튼에는 검붉은 자국이 나 있었다. 내가 기함을 하자 에드가는 잽싸게 손톱으로 그걸 긁어냈다.

“내 피는 아냐.”

“정말 안심된다, 야.”

뻔뻔하게 거짓말을 지껄이는 에드가를 흘겼다. 내 판단이 맞는다면 마도구가 망가진 시점은 나돈의 생일 연회일 것이었다. 나는 그의 왼 어깨와 오른 갈빗대에 둘둘 감겨 있던 붕대를 떠올렸고, 아마도 만티코어의 발톱에 꿰뚫렸을 음성 녹음 및 재생용 마도구를 쳐다봤다.

그러자 에드가는 붕대 아래 상처와 같이 처참한 꼴을 한 마도구를 명탐정 아리엘 달튼이 선보인 날카로운 추리에서 구해 내기 위해 셔츠 가슴팍에 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사실상 자백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내 목숨을 살렸다는 거야.”

그가 마도구가 담겨 불룩하게 튀어나온 주머니를 두드리며 말했다.

“소름 돋지 않냐? 나는 운명 같은 건 안 믿을뿐더러 오히려 증오하지만 만일 내게 운명이 있다면 그건 너일 거라고. 안 반할 수가 있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