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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14화 (114/178)

칵스위턴의 투수는 퍼셀 공국과 일레스티아 제국을 통틀어 그런대로 알아주는 그리폰 크리켓 유망주였다. 뿌리듯 공을 던지는 팔이 어찌나 길쭉한지 내 다리 길이쯤 되는 듯했다.

빠르게 회전하며 파고들어 오는 공의 궤도가 사뭇 거칠었다. 그리폰 크리켓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그걸 치기는 퍽 쉽지 않아 보였다. 포수가 가까스로 공을 낚아채자 초구를 신중히 보낸 카일에게는 네 번의 기회가 남았다.

두 번째 공은 카일을 거의 맞힐 기세로 꺾였다. 그리폰 크리켓에는 반칙 투구의 개념이 없었으므로 카일은 잽싸게 루이사의 고삐를 당겨 몸을 피해야만 했다. 피츠시몬스 응원석에서 퍼부어진 야유를 칵스위턴 응원단이 큰북을 두드리는 소리로 막았다.

마침내 카일의 배트를 두드린 것은 세 번째 공이었다. 길게 뻗은 타구가 수비수 사이로 빠져나갔다. 공이 일정 고도를 벗어나자 비컨에 불이 들어왔다. 카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비수들을 제치고 세 개의 비컨을 전부 터치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귀를 울렸다.

“피츠시몬스에 3점!”

후퍼 교수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득점으로 인한 환희의 여운을 입가에 매달고, 카일은 우드와 케이시, 제이든과 차례대로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그러고 나서 잔뜩 뻐기며 내게로 날아왔다. ‘어때?’ 그가 입모양으로 물었다. 혀를 빼물고 죽는 시늉으로 답하자 카일은 소리 내서 웃고는 다른 장난치는 무리에 합류했다.

유감스럽게도, 카일의 활약은 수비수에게 타구를 잡힌 타자와 몸싸움에 져서 비컨을 터치하는 데 실패한 타자 다음으로 배트를 잡은 제이든에 의해 완전히 묻혀 버렸다. 검을 휘두를 때처럼 묵직한 타격에 얻어맞은 공은 하필이면 칵스위턴 응원석에 떨어졌다.

곧 작지 않은 소란이 벌어졌다. 피츠시몬스만큼 칵스위턴에도 용기사의 팬이 제법 있는 모양이었다. 비명과 욕설이 난무한 끝에, 손꼽히게 지루한 대회를 준비하느라고 손꼽히게 흥미진진한 경기를 놓친 룸메이트를 연상시키는 곱슬머리 여자애가 남친을 뭉개 버리고 공을 차지했다.

상황이 정리된 것을 확인한 후퍼 교수가 손가락 여섯 개를 치켜들자 경기장 전체가 들썩였다. 나는 켈리와 어깨동무를 한 채 칵스위턴 응원단이 울리는 큰북의 박자에 맞추어 ‘피츠시몬스’와 ‘제이든 스펜서’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났을 때쯤 내 목은 맛이 갔다. 말보다 찢어지는 소리가 더 많이 나왔다. 슬프게도, 경기 역시 마찬가지로 처참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카일이 낸 3점과 제이든이 낸 6점 이후로 피츠시몬스는 고작 17점을 더 냈다.

칵스위턴은 놀랍게도 47점을 득점하며 승승장구하는 중이었다. 투수를 제외한 칵스위턴 선수 개개인의 역량은 피츠시몬스에서 뛰어난 축에 속하는 제이든이나 카일, 우드에 밀릴지언정 그들의 단합력은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수비수들의 움직임이 어찌나 일사불란한지 마치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가 흐르는 듯했다.

또 칵스위턴 그리폰 크리켓부의 주장은 케이시를 거울에 비추기라도 한 듯이 정반대였다. 왜소하고 힘이 약한 반면 머리를 잘 쓴다는 뜻이었다. 그는 경기가 시작된 지 정확히 20분 만에 피츠시몬스의 모든 것을 파악한 듯했다. 칵스위턴이 카일과 제이든에게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점수를 내주는 대신 다른 선수들을 압박하는 전략을 택하자 피츠시몬스의 승기는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

자기도 놀리려고 했던 주제에, 켈리는 칵스위턴 응원단의 약 오르는 노랫말에 케이시의 어깨가 세모꼴로 늘어지자 누구보다 분개했다. 그녀가 손목에 주렁주렁 매단 어쩌고를 기원하는 팔찌들을 케이시에게 채워 주러 사라진 뒤에 제이든이 가까이 왔다. 또 다른 피츠시몬스의 타자가 칵스위턴의 수비수에게 농락을 당하는 와중에도 언제나처럼 덤덤한 모습이었다.

“괜찮아?”

울타리에 허리를 반쯤 걸치고 묻자 제이든은 우선 위험하니 몸을 물리라고 말한 뒤에 대답했다.

“아니. 열 받아.”

인간도 용도 아닌 ‘제이든’이 되고 나서 그의 표현은 꽤나 풍부해졌다. 표정은 여전히 돌조각이나 다름이 없는데. 나는 작은 웃음을 코에 걸었다. 많이 먹으면 소화하기 힘든 것처럼 클수록 느리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변화였다. 아마도 그가 갈 길은 아직 아득한가 보았다.

“어쩔 수 없잖아. 쟤들이 너한테는 맥 빠지는 공만 던지는걸. 강자의 숙명이려니 생각해.”

“그것도 있고.”

“응?”

예상치 못했던 대화 전개에 아연하여 반문하자 제이든이 눈썹을 약간 찌푸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 나서는 웬 상념에 잠긴 채로 골똘히 있다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도 도무지 맥락을 짚기 어려운 소리였다.

“나도 언젠가 재밌는 농담을 할 수 있게 될까? 시간이 많으니까… 노력하다 보면?”

어디서 썰렁하다고 욕이라도 먹었냐고 묻기 전에 제이든의 타석이 되었다. 나는 뭐라고 중얼거리며 돌아서는 제이든에게, 잘은 모르겠지만 열받게 구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떠올리며 배트를 휘두르라고 조언했다. 피츠시몬스가 50점을 내는 데에 나의 전 재산이 걸려 있음을 은근슬쩍 언급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후퍼 교수보다 아리엘 달튼이 그리폰 크리켓부의 고문에 제격일지도 몰랐다. 여느 때보다 배트를 꽉 쥔 제이든은 비겁하고 비실비실한 투구를 억지로 밀어 쳤다. 무지막지하게 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공이 경기장을 멀찍이 벗어나자 제이든의 화를 돋운 누군가를 애도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

제이든 스펜서의 10점짜리 타격이 경기의 판도를 바꾸었다. 터무니없이 컸던 점수 차가 단숨에 좁혀지니 피츠시몬스의 기세는 거짓말처럼 살아났다. 1점이라도 따겠다는 각오로 몸 사리지 않고 달려드는 선수들 덕에 차츰 상황이 나아져 갔다. 날아오는 공마다 무식하게 띄우기나 하던 케이시마저 점수를 낼 정도였으니 어련했다.

피츠시몬스의 마지막 공격 기회, 마침내 역전의 주역으로 거듭난 것은 카일이었다. 비컨 사이를 누비는 그의 비행은 너무 빨라서 눈으로 쫓기 어려울 정도였다. 피츠시몬스를 상징하는 푸른 깃발에 금색으로 새겨진 숫자가 48에서 51로 변하는 순간, 피츠시몬스 응원석은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나는 무지하게 감격해서 손에 닿는 사람이면 누구든 간에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폰이 아니라 그리폰을 탄 케이시의 등에 올라 경기장과 관중석을 누비던 카일은 특히나 뼈가 부서져라 안았는데, 그가 부끄러워하는 통에 나도 부끄러워졌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세리머니에 불만을 가진 칵스위턴 선수들의 항의로 경기가 속행되었다. 카일 뒤의 타자들이 줄줄이 잡기 쉬운 공을 날린 탓에 피츠시몬스는 칵스위턴과 2점 이상의 점수 차를 벌리지 못했다.

마지막 수비를 위해 경기장 여기저기 흩어진 피츠시몬스 선수들의 분위기가 퍽 엄숙했다. 손가락으로 공의 봉제선을 하염없이 더듬던 피츠시몬스의 투수, 딜레이니 우드도 역시나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피츠시몬스의 승리가 그녀의 팔에 걸린 전부가 아니었다. 드워프족 혼혈 학생회장 후보인 우드에게 지금 이 순간보다 잘 깔린 판이 주어질 가능성은 없다시피 했다.

거진 세 시간을 교체 선수 없이 공을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드의 공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녀가 두 명을 깔끔하게 잡아낸 후에 칵스위턴의 타석에는 마지막 선수가 올라왔다. 우드처럼 투수로 활약했던, 유일하게 유의미한 개인 역량을 지닌 선수였다.

그의 타격은 투구만큼이나 뛰어났으므로 피츠시몬스의 응원석도, 칵스위턴의 응원석도 숨을 죽인 채 우드의 손끝과 그의 배트에 집중했다.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된 듯이 두들겨 대던 큰북은 잠잠해진 지 오래였다.

우드가 최초에 던진 두 개의 공은 안쪽으로 가파르게 굽어졌다. 타자의 팔이 길어 몸에 가까운 공을 치기 어려울 것이라는 계산속이었다. 타자는 타격과 투구만큼 공을 보는 눈도 좋아서 그가 날리지 못할 공엔 손도 대지 않았다.

다음 두 개는 회전을 죽여 뚝 떨어뜨리는 공이었다. 타자의 배트는 힘차게 움직였으나 공을 맞히지 못했다. 세 번째 배트는 공의 궤도와 크게 벗어났다지만 네 번째 배트는 꽤 가까워서, 다음번에는 맞힐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우드도 깨달은 듯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녀가 골라낸 비장의 무기는 먼저 던졌던 두 종류의 투구를 적절히 섞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최악의 선택이었다. 우드의 손을 떠난 공은 굽어지다 말고 떨어지다 말아서, 마침내는 지극히 단조로운 궤도로 날기 시작했다. 카일의 배트를 장난삼아 몇 번 만져 본 것에 불과한 나조차도 쳐 낼 법한 실투였다.

피츠시몬스 응원석에서 탄식이 일었다. 칵스위턴 애들은 만세를 부를 준비를 했다. 우드의 낯빛이 새하얘졌다. 타자가 거세게 배트를 휘두르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이 떠올랐다.

다음 순간 날벼락 같은 재앙이 나를 습격했다.

돌풍에 휩싸인 낙엽처럼 빠르게 그리고 갑작스럽게, 피츠시몬스와 칵스위턴 최후의 공은 응원석의 울타리를 짚고 몸을 내민 나와 아주 근접해졌다. 과하게 말이다. 켈리가 기겁하여 내 어깨를 잡아당겼으나 피하기엔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나는 월시 후작처럼 콧대를 뭉개지 않기 위해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코르크에 가죽을 덧대 만든 공일지언정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맞으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작년에 카일은 연습 도중에 팔꿈치를 으스러뜨렸다. 모르긴 몰라도 케이시가 ‘장래 희망’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꼴이 된 것은 크리켓 공에 머리를 하도 맞아서일 거였다. 눈을 꼭 감고 비명을 지르는 동안 나는 다양한 절망을 상상했다.

별안간 파도 비슷한 것에 이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앞은 깜깜해졌다. 땀 냄새와 짐승의 비린내에 전신이 휩싸이고, 귀를 먹먹하게 하던 이명이 사라졌다고 느낀 뒤에는 여러 사람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온 데에서 웅웅거렸다.

자세히 들어 보니 그것은 환호성이었다. 익숙한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얼굴을 가린 손을 치워 보았다. 온통 젖어 번들거리는 남자의 가슴팍과 푸른색과 금색으로 새겨진 피츠시몬스의 상징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그보다 약간 오른쪽에는 다른 무언가가 쓰여 있었다. 내가 지난밤 플래카드에 수놓은 머리글자와 똑같은 것이.

겨우 뱉어 낸 숨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는지, 카일이 나를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내 몸뚱어리와 고삐를 한꺼번에 붙잡은 손에서 힘을 풀어내고, 줄곧 치켜들고 있던 반대편 손을 내렸다. 투박하게 꿰매진 글러브 가운데 짙은 적색의 공이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우드는 실패하지 않았다. 상대편의 깃발에 새겨진 숫자는 그대로였다. 나의 엉덩이 아래에서 루이사가 꿈틀거렸고 허리에는 단단한 팔이 둘려 있었다. 내 콧대는 무사했다. 피츠시몬스의, 카일 빌라드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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