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귀족 사회가 비극의 주연이 된 여자애에게 상냥했던 적은 단연코 전무했다. 브래들리 공작 부부의 관에 흙이 덮이자마자 켄드라 브래들리에게 날아든 것은 무수한 손가락질이었다.
혹자는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부모의 장례식을 준비한 켄드라가 지독하다고 했다. 혹자는 켄드라의 눈물샘이 말라 버린 이유를 자신의 망상 속 브래들리 공작가의 불화에서 찾았다. 슬프지만 공작 부부의 사고를 켄드라가 일으켰다고 떠벌리는 퍼셀 같은 무뢰한도 적지 않았다.
당시 밀루아에서 발간된 많은 신문이 ‘비정하거나 냉정한 양철 심장의 공녀’라는 문구를 머리기사에 실었다. 때로는 옹호하는 논조로, 때로는 비난조로 사용된 문구였으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항상 동일했다.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여자애답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공작위를 물려받게 생긴 처지가 아니었으나 그녀가 느꼈을 막대한 고통과 그보다 큰 위기감을 짐작하기에 충분한 공감 능력을 보유했다. 달튼의 첫 번째 딸과 달리 브래들리의 82번째 딸에게는 마냥 무너질 여유 따위는 없을 것이었다. 호시탐탐 그녀의 자리를 노리는 후견인의 존재도 무시하기 어려울 테고 말이다.
애초에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여자애가 보여 마땅한 태도는 뭐란 말인가? 짜증스레 혀끝에서 욕을 굴리는 내 귀에 날숨 같은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만약 제가 오열하며 쓰러졌더라면 저 사람들은 만족했을까요?”
아니. 그때는 공작가 후계자답지 않게 감정적이라고 그랬겠지. 어깨를 으쓱여 대답을 얼버무렸다. 뭣 같은 현실을 짚어 낸들 거짓말로 가짜 희망을 심어 준들 어색한 침묵이나 흐를 것 같아서였다.
나는 애늙은이 같은 켄드라가 그녀의 상처를 보다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를 바랐다. 퍼셀이나 후견인, 혹은 스스로와의 지난한 전투 끝에 마침내 울고 싶은 순간이 올 때까지.
되도 않는 위로를 하는 대신, 눈시림 안경 같은 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제공하겠노라며 선심 쓰듯 말했다. 그걸 쓰면 양파즙을 내어 눈알에 바르기라도 한 마냥 눈물이 흘러서, 꾀병으로 수업을 빼먹고 싶을 때 아주 유용했다.
그러자 켄드라는 우선 양철 심장에 칠할 기름을 구하고 나서 생각해 보겠다고 받아친 다음에 ‘저는 선배가 애매하게 착한 사람이라 참 좋아요.’라고 덧붙였다. 애매하게 뿌듯한 기분이 되었다.
***
내 변덕은 정말로 스튜 끓듯 끓었다. 카일과 화해한 뒤에 우리는 다시 죽고 못 사는 악우 사이가 되었다. 적어도 피츠시몬스-칵스위턴 간 친목 도모를 위한 그리폰 크리켓 경기에서 흔들 플래카드에 카일의 머리글자를 수놓을 만큼은 걔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때 아닌 친선 경기가 성사된 배경에 퍼셀이 있었다. 그는 켄드라가 마동물권 운동가를 필두로 하여 다양한 부류의 학생들에게 호감을 얻어 가는 꼴을 좌시할 수 없었는지, 간만에 아주 그럴듯한 계책을 짜내었다.
샐러맨더의 무지개 비늘에 맹세코 그리폰 크리켓 경기를 구경하길 마다하는 10대는 거의 없었다. 나는 켈리가 탄산음료를 사러 간 사이에 경기장과 좌석을 가르는 울타리를 잡고 한참 방황한 끝에 명당을 차지했다. 경기도 잘 보이고 볕도 덜 들고 칵스위턴 응원석이 가까운 것만 빼면 완벽하다 할 수 있었다.
칵스위턴은 퍼셀 공작이 백치로 이름난 막내딸을 위해 설립한 아카데미로, 작은 규모에 비해 돈깨나 쓸 줄 알았다. 그리폰 열서너 마리와 금박을 입힌 배트, 목덜미가 까끌거리지 않는 경기복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제공할 수 있다는 거다.
그에 비해 피츠시몬스는 어떠한가. 마담 바틀렛이 아카데미장이랍시고 뭔가 할 때는 오로지 스스로를 과시하고 싶을 때뿐이었다. 나는 장비 차이 운운하며 우쭐거리는 칵스위턴 응원단을 흘기다가 걔네가 앉을 자리에 엄청나게 끈적거리는 슬라임을 소환했다. 누구도 나의 앞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깔볼 수 없었다.
장비가 어떻든 중요한 건 그걸 쥔 손이었다. 밀루아의 영웅은, 걔의 팔뚝은 진짜로 칵스위턴에서 제일 건장한 애보다 굵었다. 밀루아에서는 별게 아니어도 내 안에서는 꽤나 쓸 만한 카일 빌라드의 경우, 비행하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과장 쪼끔 섞어서 번개 같았다. 그들의 이름을 외치려고 숨을 들이마시다가 불현듯 경기장 구석에서 야단법석을 떠는 블로썸이 눈에 들어왔다.
물병 몇 개에 물을 나눠 담는 블로썸의 곁에 언제나처럼 나돈이 있었다. 한 발짝 거리를 두고는 볼턴이 보였다. 친구들을 발견한 제이든이 그리로 가자 블로썸은 밝게 웃으며 물병을 건네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 눈에는 절로 표정이 풀어질 만큼 훈훈한 광경이었다.
피츠시몬스의 인기인이 죄 모였으니 어중이떠중이가 끼어들 법도 한데, 네 사람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완벽한 그림을 위해 여백을 만들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이벤트’ 중임을 금방 눈치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로즈마리 블로썸은 정말 열심히 사는 애였다.
“나 보고 싶어서 왔어?”
“악! 깜짝이야!”
울타리에 팔을 걸치고 멍하니 있는 나에게 카일이 재빨리 다가왔다. 그가 전조도 없이 나타나 말을 건 탓에 나는 2인치쯤 뛰어오르면서 놀랐다. 내 비명에 고개를 돌린 칵스위턴 애들이 카일을 보고 웅성거렸다.
구경할 맛 나긴 하지, 얘도. 일단은 공략 캐릭터니까. 약간 우쭐해지는 기분에 그의 머리글자가 수놓인 플래카드를 손아귀에 숨긴 채 되레 퉁명스럽게 굴었다.
“아니거든. 켈리가 케이시 놀리러 가자고 해서 온 거야.”
“말이라도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해 주면 덧나냐.”
“보고-싶어서-왔어.”
“짜증 난다. 상상 이상으로 기분 좋네.”
“참고로 나 너네가 50점 이상 내고 이기는 조건으로 켈리랑 내기했거든? 분발하자.”
“귀부인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어떻게 할 도리가 있겠습니까? 태양이 날아온대도 쳐 내야지요.”
멋있는 척 배트를 휘두르는 카일을 대충 치우고 루이사의 부리를 매만졌다. 한때 흉포하기 그지없었던 그리폰이 부드럽게 날개를 펄럭였다. 느리게 끔뻑이는 눈에는 유순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암만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됐다.
“제이든은 도대체 루이사랑 무슨 원수를 진 걸까?”
“루이사는 엄청나게 예민하거든. 왜, 적당한 힘은 동경의 대상이 되지만, 지나친 힘은 공포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라잖아.”
무심코 중얼거리니 카일이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뜬구름 잡는 소리에 눈썹을 치켜들자 그가 낄낄대며 루이사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제이든의 공략을 끝냈다며.’ 은밀한 귓속말이 이어졌다. ‘알 거 아냐. 걔가 어떤 존재인지.’
낮은 울림이 더운 숨과 함께 내 귓불에 닿자 칵스위턴 응원석이 확 시끄러워졌다. 나는 간질거리는 귓불을 긁적이고 카일을 다시 밀어냈다. 그가 오랜 미스터리를 풀어 주기도 했고, 켈란만큼은 아니어도 카일의 목소리도 꽤나 매력적인 편에 속했으므로 때리지는 않았다.
또한 정보를 공유하는 문제로 싸우고 막 화해한 참인데도 불구하고 내게는 새로이 숨겨야만 하는 비밀이 생기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통 모질게 굴지 못했다.
어처구니없게도, 막상 카일의 입장에 서니 그를 이해하겠다고 느꼈다. 나를 위한다는 이유로 어둠 속에 내다 버린 거 말이다.
나는 아직 내 목숨이 경각에 달하면 평행 세계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카일에게 밝힌 바가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고. 루이사의 공격성 외에도 이 세계에 산재한 미스터리들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벨의 세계가 필요한데, 나의 자살 아닌 자살 소동에도 온 얼굴을 적시며 울었던 카일이 그걸 알게 되면 가만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였다.
내게 친구라 함은 위아래로 놓인 평행선이 아니라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가는 존재였다. 카일이 나를 위해 피를 흘리거나 이를 뽑아내는 만큼 나도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카일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뭐, 그건 알 바 아니고. 켄드라 브래들리가 내린 평가대로 애매하게 착한 아리엘 달튼은 동시에 애매하게 이기적이기도 했다.
“야, 무슨 생각 해?”
“제이든 말이야, 경기복이 너무 꽉 끼는 거 같은데. 저러다 터지는 거 아냐?”
눈치 빼면 시체인 카일 빌라드는 내가 갑자기 조용해지자 바로 캐물었다. 당황하다가 아무 말이나 내뱉었더니 그가 한껏 툴툴거렸다. ‘몸을 만들든가 해야지, 진짜 치사해서.’ 그러고는 그리폰 크리켓부의 고문이자 일일 심판인 후퍼 교수가 가리키는 쪽으로 루이사의 고삐를 돌렸다.
“마음껏 방심해 둬, 아리. 적어도 경기 중에는 네 집중 안 뺏길 자신 있으니까. 이제 나한테 껌뻑 죽을 거다.”
카일이 으름장을 놓고 날아간 뒤에 켈리가 음료와 거품이 정확히 반씩 담긴 컵 두 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거품의 산에 빨대로 갱도를 뚫고 음료를 빨아들이니 보석 같은 단맛이 혀 밑에 한참이나 감돌았다.
이윽고 피츠시몬스와 칵스위턴의 그리폰 크리켓 선수들이 경기장 중앙에 모였다. 호전적인 노먼 케이시와 학생회장 후보로서 이목이 모인 자리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싶을 딜레이니 우드는 벌써부터 상대 팀과 절찬리에 눈싸움 중이었다.
눈싸움이 말싸움이 되기 직전에 후퍼 교수가 겹쳐 쥔 두 개의 깃발에 마나를 흘렸다. 파란 깃발에 그려진 피츠시몬스의 상징 문양과 빨간 깃발에 그려진 칵스위턴의 상징 문양이 빛무리가 되어 하늘에 쏘아지고, 경기장을 크게 돌며 타자가 터치할 비컨을 생성하자 스물두 마리 그리폰이 동시에 날아올랐다.
그리폰 크리켓은 이름만 크리켓이지 납작한 배트와 코르크 공을 쓴다는 것 외에 크리켓과 닮은 구석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애당초 공중에서 경기를 하는 만큼 공을 땅에 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리폰 크리켓의 룰은 지극히 단순했는데, 도리어 그게 이 마법적인 스포츠로 하여금 공전의 인기를 구가하게끔 했다.
피츠시몬스의 첫 타자는 카일이었다. 칵스위턴의 선수들은 마법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피츠시몬스의 선수들은 실수로라도 마나가 사용되지 않도록 막는 마도구를 착용해야 했다. 거추장스러운 듯 팔에 끼운 마도구를 만지작대던 그가 자리를 잡고 타석에 서자 어마어마한 환호성이 쏟아졌다.
“쟤 또 너한테 끼 부린다.”
나를 가리킨 다음 배트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는 카일을 보며 켈리가 비아냥거렸다.
“저게 어딜 봐서 끼 부리는 거야? 협박하는 거지.”
나는 항변하듯 말했으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여서 발화에 충분한 신빙성을 부여하지 못했다. 이상하게 볼이 화끈거렸다. 허튼짓거리 말고 점수나 내라고 커다랗게 외쳤더니,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씩 웃는 모습이 나름대로 근사했다. 즉시 진지하게 표정을 굳히는 것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