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12화 (112/178)

“슬라임을 토해 내는 마법도 제대로 못 쓰면서 무슨 주문이야?”

“아이, 씨. 죽을래? 그 마법이 아냐. 이것만 알아 두면 네가 콩으로 호두 파이를 굽는다고 말해도 철석같이 믿을 거라고… 새로운 아리든, 썩어 문드러진 아리든 말이야.”

내가 들이민 주먹을 대충 잡아 치우다가, 카일은 내 손에서 정말로 썩어 문드러진 냄새가 난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물렸다.

“익숙한 구린내인데.”

그가 추억을 회상하듯 아련한 눈을 했다. 나는 ‘네 손윗 형제 중 그나마 나은 빌라드야’라고 답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미신에 약하던 시절이 있었잖아, 나.”

“꼬마들은 다 그렇지.”

자기는 꼬마가 아니었던 것처럼 말하는 소꿉친구가 웃겼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감탕나무에서 떨어졌을 때 나는 고작 다섯 살이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이상할 정도로 완벽하게 남아 있어.”

그것이 내가 거푸집 자매들과 공유하는 설정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의식적으로 배제했다. 나는 로즈마리 블로썸과 이 세계의 기준으로 창작물 속 등장인물일지언정 엄연히 스스로 사유할 줄 알았다.

“엄마도 모르고 아빠도 몰라. 이디스도, 코넬리아도, 심지어는 내 일기장도 모르지. 오로지 나의 심장만이 간직하고 있던 사실인데… 내가 감탕나무 열매를 따려고 했던 건, 너 때문이야.”

“나?”

“당시 감탕나무 열매가 겨울에 태어난 여자애의 사랑을 이루어 준다는 소문이 돌았고… 내가 너한테 완전히 빠져 있었거든.”

무덤까지 가져가려 했던 비밀이었다. 나는 아주 빠르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끔찍하게 인정하기 싫은 잘못을 인정해야만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발음은 잔뜩 뭉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카일은 내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듯했다. 그가 경악했다.

“빌어먹을, 아리엘 마리아-멜라니-매그놀리아 달튼, 그거 진짜야?”

‘마리아’와 ‘멜라니’, 그리고 ‘매그놀리아’는 죽어도 ‘미첼’이고 싶지 않았던 어린 아리엘들이 스스로 붙였던 미들네임이었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카일을 가볍게 쳤다.

“그럼, 카일 다미앙 빌라드. 비록 너는 나한테 조금도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은 엄청 있는데….”

“너 기차가 후진하는 거 봤냐?”

어처구니없다는 듯 받아치자 카일은 아쉬워 죽겠는지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금방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그의 집중이 필요한 부분이 나의 풋사랑 역사는 아니었다.

“좋아. 어차피 어떤 제안을 한들 내가 널 거부할 수는 없을 테니.”

“아니까 이러는 거야.”

“열받네. 그래서 널 사랑하지만.”

한숨 같은 목소리에 등을 둥글게 말았다. 내가 기억하는 십구 년과 더해서 5년을 통틀어 사랑 운운하는 소리를 이만큼 많이 들은 적이 없었다.

나는 갑자기 너무 많이 변한 관계에서 느껴지는 어색함을 떨쳐 내기 위해 헛기침을 한 뒤에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러자 이번에 경악할 차례가 된 것은 나였다.

“근데, 도대체 무슨 끔찍한 사정이 있었길래 갑자기 강에 뛰어든 거래? 걔, 그러니까 나 말이야.”

“나도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확실한 건, 너를 절망에 빠지게 한 상대가 켈란 일레스티아라는 거야. 네가 그… 렇게 되기 전에 그 자식을 찾았고, 또 너희 둘이 사귀는 사이였으니까….”

***

내 기억 속 모든 11월에 켄드라 브래들리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내고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와 브래들리 공작가의 승리자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광장과 본관, 별관을 연결하는 통로에 나란히 서서 <브래들리는 승리를>에 맞춰 춤추는 짓거리에 일말의 열정도 가질 수 없었다. 의무적으로 팔다리를 흔드는 동안 나는 속으로 줄곧 카일의 말을 되새겼다.

아무래도 카일이 말한 아리엘은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 사는 걔인 듯했다. 타메니 강에 뛰어들었다는 아리엘 말이다. 켈란이 여태 블로썸, 혹은 벨에게 얼마나 충실하게 굴었던가를 떠올리면 우리가 그렇고 그런 사이인 과거가 더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걸까? 벨의 세계에 몇 번이고 다녀온 경험을 살려 뭔가 그럴듯한 추리를 해내기에 내게 남은 감상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켈란이 나 이상으로 운명에 저항하고자 노력 중이라는 것과 수심에 빠진 그에게서 평소와 다른 매력이 느껴졌다는 것.

지금 돌이키면, 물색없이 켈란과 어울리며 즐길 때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벨의 세계는 존재 자체로 내 눈을 가린 안대를 벗겨 낼 단서였다. 블로썸의 뒤를 밟지 않고 시스템에 맞서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준비를 해야 했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를 기회를 그렇게 한심하게 날려 버리다니.

“상당히 독창적인 안무네요.”

언제나처럼 파괴적인 방법으로 스스로를 응징하던 중, 줄의 끝에서부터 지휘하는 시늉을 하며 걸어오던 켄드라가 내 앞에 멈춰 섰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던 오른손을 펼쳐 내밀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맞부딪쳤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좀 창의적이잖아.”

“그럼요. 덕분에 재미 좀 봤잖아요.”

켄드라가 시시덕대며 내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놓았다. 근래 유리창에 들이박는 날다람쥐 집배원의 수를 줄이겠다는 공약으로 소수의 열렬한 지지층을 획득한 켄드라는 내게 꽤나 고마워했다. 내가 그녀에게 날다람쥐 비행 장치를 저렴하고 기발하게 개선하는 방법을 귀띔한 탓이었다.

날 수는 없었으나 나는 수준으로 도약하는 뿔메뚜기는 장애물 인지력이 비상하게 발달된 곤충이었다. 또 수확의 달 연회 이후로 시간이 제법 지났음에도 아직 아카데미 곳곳에서는 적당히 튀겨진 뿔메뚜기가 발견되고 있었다. 가까스로 죽은 상태인 뿔메뚜기 튀김을 충돌 방지 보조기에 집어 넣는다고 해서 비윤리적이라 비난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건 딱히 내 창의력이 힘쓴 결과물은 아니었으므로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기나 했다. 내가 겪은 어느 겨울에 유리창을 제거하고자 하는 날다람쥐 보호 협회와 추워 죽겠다는 학생들 사이에서 골머리를 썩다가 마침내 그 번뜩이는 발상을 해낸 사람은 다름 아닌 험프리스 교수였다.

그녀의 아이디어를 훔치고 나서, 나는 지글러 후작의 광산을 훔쳤을 때와 비슷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날다람쥐 집배원의 부상 확률을 현저히 줄였다고 해서 험프리스 교수를 향한 여론이 극적으로 좋아지지는 않았으므로, 금세 뻔뻔해졌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교직원이 아카데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아주 당연히 여겼다.

더구나 나는 앞으로 누군가의 부나 아이디어 외에도 많은 것을 훔칠 예정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저기서 퍼셀의 지지자들에 둘러싸여 가까워지고 있는 켈란 일레스티아의 공략 증표라든가.

밝은 호박색 눈동자에서 반사된 빛이 내게 닿자, 나는 켄드라의 머리글자를 몸으로 표현하는 행위가 그에게 얼마나 얼간이처럼 보일지 가늠했다. 그러고 나서 쭉 뻗었던 팔을 잽싸게 갈무리했다.

“안녕, 아리엘. 브래들리.”

만일 대륙 어디선가 케이틀린 대제 발가락 핥기 대회가 열린다면 거기서 우승을 차지할 사람은 퍼셀 공작이었다. 켈란은 케이틀린 대제가 끔찍하게 아끼는 외동아들로 알려져 있었고. 그래서 제럴드 퍼셀이 켈란에게 알랑거리는 건 그다지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켈란이 성가신 퍼셀을 무지막지하게 우아한 데다 아슬아슬하게 부드러운 태도로 떼어 놓지 않는 건 특이한 일이었다. 그것도 학생회장 선거 기간에 말이다. 그건 나나 켄드라를 포함한 아카데미 전체에 하나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켈란 일레스티아는 제럴드 퍼셀을 지지하고 있다.

어째 요사이 이 세계의 켈란과는 마음이 맞는 경우가 드물었다. 나는 켈란을 향해 입술을 비죽이는 대신 퍼셀을 봤다.

퍼셀은 일전에 기분이 엉망이었던 나의 실수로 정강이를 얻어맞고 나서 내게 안 좋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가 켈란의 어깨를 사이에 두고 눈을 부라리기에 나도 똑같이 했다.

“너희끼리 시선 교환하고 그러지 마. 질투 나잖아.”

켈란이 가볍게 웃으며 농담했다. 나는 쟤가 저럴 때마다 진짜 다양한 상상을 하는데, 알기나 할는지 모르겠다.

내가 습관처럼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는 동안 퍼셀은 세모눈 뜨기를 관두고 켄드라에게 아는 체를 했다.

“아, 레이디 브래들리. 마동물권 운동가들을 겨냥한 그대의 허세가 효과를 보게 되어 다행이네.”

“아, 서 퍼셀. 마동물권 운동가들의 포섭에 실패하신 점 유감입니다. 몸은 좀 괜찮아지셨는지요.”

켄드라가 날다람쥐 보호 협회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되자 퍼셀은 위기감을 느꼈다. 마물 및 동물 애호가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그가 택한 방법은 히포그리프 사육장에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애석하게도 난폭한 마물들의 무자비한 발굽에 호되게 얻어맞는 꼴이나 되었다.

어떤 후보든 동등하게 까내리곤 하는 피츠시몬스 타임즈는 퍼셀이 비교적 온순하고 똑똑한 그리폰과 히포그리프를 헷갈린 게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마물학에 무지한 멍청이거나 히포그리프 한 마리 제압하지 못한 겁쟁이가 되지 않기 위해 일부 유권자를 버려야만 했다.

지나치게 공손하게 굴면서 속을 긁는 켄드라의 말에 퍼셀의 투실투실한 볼살이 부르르 떨렸다. 이윽고 그가 비열한 미소를 띠고 이렇게 말하자 여기저기서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그대가 걱정해 준 덕분에 많이 나아졌지, 레이디 피오렐리.”

신화시대에, 탐욕을 이기지 못하고 악마의 제단에 아버지를 바친 것으로 알려진 악인이 바로 엠마 피오렐리였다. 지독하게 무례한 발언에 좌중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나는 손끝에서부터 핏기가 빠져나가는 기분에 몸서리치며 켄드라를 곁눈질했다. 처참한 표정이었다.

심지어 퍼셀마저 스스로 부적절한 대처라고 느꼈는지 입매를 어색하게 비트는 와중이었다. 안색을 유지한 것은 오로지 켈란뿐이었다. 그가 버벅거리는 퍼셀을 데리고 자연스럽게 자리를 뜨자 수십 개의 눈이 동시에 켄드라를 향했다.

브래들리 공작 부부에게 안타까운 사고가 벌어진 것은 작년 이맘때였다. 수도 근처에 사는 사촌 자매의 편지에 의하면, 브래들리의 후계자는 부모의 장례식이 진행되는 내도록 눈물을 보이거나 어쩔 줄 몰라 하기는커녕 아주 침착하게 굴었다고 했다.

나는 켄드라가 아니니까, 그녀가 어떻게 느꼈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켄드라의 감정은 온전히 자기 거였으며 그녀에게는 울고 싶은 순간에 울 자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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